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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48)화 (48/96)

48화

마침 신호가 걸린 김에 흘끔 옆을 돌아보았다. 이혜준의 새까만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나한테 바라는 게 많은 사기꾼의 느낌.

“뭐예요? 사이비 종교에 걸려든 기분이 드니까 수상한 눈빛 쏘아 보내지 마세요. 무조건 안 할 거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따라 해 봐. 짧아서 금방 외워.”

“싫어요.”

“있으면 있는 거지.”

“…….”

“나하고 무슨 상관?”

“…….”

같이 소리내기 창피해서 외면했다.

“…….”

“…….”

느닷없이 잠잠해졌다.

뭐야. 이걸로 끝?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시트를 뒤로 젖히고 주섬주섬 잠자리를 재정비하는 그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봤다.

진짜 끝이야?

깊어지는 숨소리에 내 황당함의 크기도 점차 부풀었다. 헛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안면 근육이 굳어 바람 빠지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예약했다는 브런치 카페 근처의 주차장에다 차를 댔다. 원래는 기다리는 동안 함께 커피나 마실까 했는데, 이혜준은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로 쿨쿨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날밤 새우며 게임을 해도 멀쩡할 나이에 체력이 왜 저 모양일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작 하룻밤이 아니라 사나흘은 잠을 설친 줄 알겠다. 저 저질 체력으로 호령도를 빠져나와 밤새 전라남도에서 서울까지 주파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있으면 있는 거지.」

바로 어제도 듣고 무심히 넘겼던 대사다. 그에 이어 그들을 상관하지 말라니.

무너지지 않고자, 신령에게 지지 않고자 강인해지려고 노력해 온 내 방식과는 전혀 다른 노선이었다. 굳이 귀신하고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고 이길 필요도 없단다. 그저 있겠구나, 존재하겠지, 하고 흘려 넘기라며.

이혜준답게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미신 믿지 말라고.

황당함이 가시자 정신이 환기됐다.

산에 들어갈 때는 산의 신령에게 허락을 받고, 장승을 마주치면 공손히 예를 올리라는 등, 그들의 존재를 한시도 허투루 지나치지 말라고 배워 왔다.

보통 사람은 등산할 때마다 일일이 산신령에게 입산을 고하지 않지만, 나 강지헌은 귀신이 붙은 주제에 그처럼 안일하게 살면 안 된다고 했다. 무속인도 아니고 신기도 없지만, 고용주가 가르치는 대로 행했다. 그래야만 선업을 쌓고 구원받을 줄 알고서.

이제 더는 거짓 아군이었던 서창경을 섬길 마음이 없었다. 그가 만들어 준 안전 가옥도 더 이상 안전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탈출하고픈 생각만이 굴뚝처럼 치솟았다.

이혜준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예약을 취소할 작정이었는데,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예상 못 한 알람이 울렸다. 잠에 취해 못 일어날 줄 알았던 그가 단번에 눈을 뜨고는 휴대전화를 만졌다.

“강지,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아니, 왜. 더 주무시지?”

“에이, 이담에 너 잘 때 나도 가만히 지켜봐 줄 테니까 그렇게 삐치지 마-.”

무슨 소리야. 내 말이 시비조로 들렸나?

“저 안 삐쳤고요. 꿈자리 사나우니까 저 잘 땐 쳐다보지도 마세요. (시발) 가만 안 둬.”

연애 감정이 생길 만한 구실을 원천 차단하며 입 모양으로만 ‘시발’이라고 중얼거렸다. 알아보든지 말든지. 그러나 혈육을 비롯해 인골파 조직원들에게 수없이 갈굼을 당해 온 이혜준은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예쁘고 다정한 말만 쏙쏙 골라서 할까. 우리 강지 바른 말 고운 말 대회에 내보내야겠다. 완전 대상 감이야. 대상 못 받으면 시발상이라도 받자?”

“…….”

웃지 않는 연습을 해 왔기에 무표정을 가장하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등 뒤에서 “어디 시발시발 대회는 없나?”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왔을 땐 못 참고 결국 끅끅거리고 말았다.

어제처럼 이혜준은 메뉴를 가리키며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치즈는 좋아하는지, 소스는 사과 소스로 할지 시저 소스로 할지 등등, 내 취향을 세심히 물어봐 주었다.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셰프 추천 메뉴 시킬 거면서.”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당할까.

“오늘은 아냐. 나도 여긴 처음이라서 용기 내서 도전해 봐야 해.”

이혜준이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직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 가며 샌드위치, 브런치 플레이트, 파스타, 리조또, 그리고 샐러드를 주문했다. 내 문제로 상담할 땐 귀신 그거 별거 아니라고 하찮게 치부하더니, 제 입으로 들어가는 요리에는 열과 성을 다하는 느낌이라 기가 막혔다.

너, 자취하다가 굶어 죽을 뻔했다는 얘긴 새빨간 거짓말이지?

이혜준의 미모에 넋이 나가 대답이 한두 박자씩 늦어지는 직원에게 양은 정량보다 덜어 달라고 부탁했다. 저렇듯 남자에게도 잘 먹히는 얼굴이건만 어제 기숙사 괴담 그룹엔 얼빠가 없었던 거다.

맞은편에 앉은 나 역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대화하는 첫날이나 마찬가지인데 큰 감흥은 없었다. 오래전부터 이 선배가 잘생겼다는 정보는 뇌에 입력돼 있었고 그냥 정보에 오류가 없구나, 그렇구나, 했다.

이혜준도 첫눈에 영문 모를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걸 빼고는 어떤 감상도 내뱉지 않고 놀림도 없이, 원래 이런 식으로 마주 보고 지낸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했다.

“골고루 먹여 봐야 강지 네가 뭘 좋아하는지 파악하지. 만날 아무거나 잘 먹는대.”

“내 핑계 대지 마세요.”

이 대식가야!

“핑계 아니거든? 전부 너 먹이려고 주문한 거야. 운동하고 와서 배고플 텐데 많이 먹어야지.”

“운동한 거 아니라니까요. 아는 아저씨 도장에서 알바하고 왔어요. 바닥 청소했어.”

잡아떼 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강지, 태권도 잘하니까 네가 나 보디가드 해 주면 되겠다.”

보디가드는 아무나 하나. 무술만 잘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던데 인터넷 보고 배울까?

인터넷 검색으로 부적 쓰고 귀신 쫓는 법을 익혔다는 지리교육이 떠올라 피식했다.

새끼가, 미치려면 혼자 미치지 같이 사는 룸메들은 무슨 죄야.

“저 아직 하얀 띠라 보디가드 할 능력 안 되니까 운전이나 시키세요. ……왜 경호원이 필요한데? 스토커라도 붙었어요?”

어지간한 연예인도 갖다 대기 어려운 미모이기에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자동차도 연예인 밴 같은 걸 몰고 다녀서 오해를 사기 쉬워 보였고.

실상을 들여다보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승용차가 아니라 뒤를 화물칸으로 사용하는 승합차였다. 귀신 든 물건을 옮기는 수단이라고 여기니 뒤 칸을 돌아보기도 꺼림칙한.

내 눈엔 장의차나 마찬가지였다.

“응? 아니, 난 거의 집에만 있어서 스토커 붙을 일 없어. 1년 중에서 집 바깥으로 나가는 날 며칠 안 돼.”

슬슬 이 캐릭터에 익숙해졌는지 학부 선배님께서 어디가 아파서 칩거 중이신 건가, 하는 쓸데없는 염려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요?”

“운전기사는 외출할 때만 만날 수 있잖아. 이웃들 보니까 보디가드는 같이 살던데?”

이야, 경호원 고용으로도 플러팅이 되는구나. 내 일만 아니었다면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을 텐데.

“신세 지기엔 선배님 댁이 너무 무섭고요.”

무슨 용도로 쓰이는 저택인지 알게 된 이상 거긴 못 들어가지. 악령이든 정령이든 간에 귀신 소굴이라잖아.

“그리고?”

“저 사실 고용주한테 묶인 처지예요. 가족들 안전까지 저당 잡혀서 아무 데도 못 가. 어쩌면 평생 거기서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선배님, 공숙선 씨한테 무슨 얘기 못 들었어요?”

이혜준의 초대를 거절해야 하는 진짜 이유를 밝혔다.

“들었어. 그러잖아도 점심 먹고 너희 집에 들러보면 안 될까 물어보려고 했거든. 개천사가 너희 집에다 부적 쓰고 주술 걸어 뒀다던데?”

한만한 남자가 겁먹을 일 없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말을 전했다.

저런 태도가 속 터지고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진정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덕분에 짐작했던 바를, 최악의 상황을 나 역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역시나.

“그럴 것 같았어요. 집에 붙은 부적들은 내가 직접 고용주한테 부탁한 거예요.”

죽은 윤상현이 나타나고 식구들이 혼비백산하고, 그래서 도와 달라고 했다. 내가 어리석어 불러들인 사태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상대방이 작정하고 덫을 놓았는데 네가 무슨 수로 알았겠어. 그거 특정 귀신 불러들이는 호명부라더라.”

호령도 숙소에서 썼던 부적과는 도식이 달랐는데도, 그랬구나.

고용주가 신호를 줄 때마다 수호부라고 믿었던 그것이 윤상현을 불러들인 거였다.

“그럼 집에 붙은 부적만 다 떼어 내면 해결되는 거래요?”

부적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을 날릴 수 있으니 온전한 방비책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았다. 앞으로는 다음번, 그 다음번 저주가 들어올 때마다 주먹구구식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서창경을 죽여 버릴까 싶다가도 악귀가 된 그를 상상하면 너무 무섭고 끔찍했다. 차라리 악귀 흉내를 내며 살아 있는 그를 대적하는 편이 낫지, 귀신 상대론 맞서 싸울 의지조차 사라지지 않을까?

“부적보다 더 심각한 건 너희 집에 가득 들어찬 음기라고 그랬어.”

“음기요?”

“응. 지금 너 지내는 대학로 건물도 정남향이지만 귀기가 짙어서 햇볕이 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고 나니까 호령도에서 네 상태가 나빠 보였던 것이 이해되더라고. 그날 내가 거리를 좁히면 너 바로 졸도할 것 같은 얼굴을 했거든.”

“아…….”

민망한 과거는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남향 건물이었나?

그러고 보니 침실로 사용하는 방 안으로 해가 비치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뭔데, 서창경. 자해하고 있어? 나랑 같이 죽자는 거야?

본인이 생활하는 장소에까지 손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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