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내가 너희 집에 자주 들러 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해. 이 문젠 가족들하고 먼저 상의해 줄래?”
앞서 내 원성을 살 걸 알면서도 흉흉한 터니 기가 강한 사람을 머물게 한다니, 하는 화제를 꺼낸 이유를 깨달았다. 우리 집 이야기였던 거다. 그가 우리 집의 터를 정화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선배님이 보디가드로 취직해 주시겠어요?”
이번엔 내 쪽에서 같이 지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승낙 여부를 알고서 던지는 질문이기에 미리 감사했다.
“그래, 그러자. 나 자신 있어. 어렸을 때 태권도 해 봤거든. 승품 심사받았다가 떨어진 기억도 나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심사였지 싶어.”
이혜준이 미래의 고용주인 내게 감동을 주기 어려운 이력, 태권도 무급을 들이밀었다. 첫 번째 심사에서 떨어졌다면 기본도 없다는 말이었다.
이분이 얼굴 믿고 아무 데에나 자신감을 갖다 붙이네. 그래도 기력 달려서 못 하겠다는 거절이 나오지 않는 게 어디야.
“동네 어디. 런던에 살았어요?”
“아니, 맨체스터. 런던 근교에 비해선 한국인 교민이 드문 지역이야. 나 있을 땐 한인 학교 전교생이 초중고 합해서 열세 명이라는 얘길 들었어.”
“저는 맨체스터 하면 박지성 선수 이름밖에 떠오르지 않거든요.”
축구단 외엔 아는 게 없는 도시라고 솔직히 밝혔다.
“어. 지역 교민들이 예전에 그 선수 응원하는 것 같더라.”
축구 얘기를 좀 더 하려고 했더니 영 시큰둥한 기색이다.
“선배님은요? 축구 안 좋아해요?”
“나? 난 내가 직접 뛰지 않고 다른 사람이 공 차는 모습만 봐도 기력이 쭉쭉 빨려. 어쨌거나 내 태권도 경력으로 너희 집 보디가드 합격한 거다?”
착각도 유분수지. 말은 똑바로 하자?
“그럼요. 선배님 스펙이 워낙에 대단하셔서 우리 집으로 모시기가 황송할 정도죠.”
우리 식구들의 격투기 종목 합이 30단에 가깝다는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몸빵도 안 될 보디가드 씨, 겁먹고 도망갈라.
허망하게도 몸싸움을 잘해 봤자 귀신을 상대로는 무력했다. 마음은 진작에 무너졌어도 그나마 몸이라도 튼튼해서 아직 목숨줄을 이어 가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 또한 나 좋을 대로 착각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손님방 내드릴게요.”
내게 결정권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부모님의 실책 이후 엄격하던 아버지조차 내 눈치를 보며 하자는 대로 따르는 편이었다. 내가 집에서 나가 살든 말든, 학교 성적이 개판이든 말든 누구도 터치하지 않았다.
“잠깐씩 들르기만 할 거니까 손님방은 따로 준비해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집 선배님 집에서 멀어요. 학교 가는 방향도 아닌데?”
성실과는 거리가 먼 이혜준이기에 고생스럽다며 금세 포기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
“괜찮아.”
“그럼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내가 운전할 것도 아닌데, 뭘.”
“…….”
그러게. 내가 그 중요한 정보를 몰랐네.
이혜준을 모시러 그의 귀신 집에 자주 들러야 한다면 나야말로 각오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다 해도 선배님이 훨씬 손해 보는 거래예요. 선배님이 이용당하는 기분 들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나 자꾸 죄책감 느끼게 하지 마요.”
당신이 내게 어떠한 감정을 가졌든지 간에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모양새가 싫다고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최선인 현재는 그의 감정에 응해 줄 수 없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절박한 환경에서 싹트는 진정한 사랑 어쩌고 하던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숨 부지하기도 급급한데 다른 데 눈을 돌릴 여지가 있나? 아무리 절세미인이 유혹한다고 해도 말이야.
어쨌거나 고용주에게서 벗어나기도 벅찬 마당에 누굴 좋아하거나 사귈 여분의 감정을 쥐어짜 내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고용주에게 일생 묶여 있을 작정이었던 어제가 정신적으로는 더 여유로웠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아예 손을 놓아 버린 상태였으니까.
인생을 포기하다 보니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일단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한 이상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 새에 사람이 달라진 듯 보이는 건 이혜준도 마찬가지였다. 연애 쪽으론 눈새라고 평가받는 내가 눈치챌 정도로 부담스럽게 밀어붙이던 그의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너야말로 내 죄책감 자극하지 마. 나는 네가 서창경 같은 악질에게 걸린 줄도 모르고 그저 오랜만에 널 만난 것이 반가워서 장난치고 놀리기만 했잖아.”
“…….”
“우리 당장은 누가 더 손해 보는지 따지지 말고 너희 집에 닥친 일에만 몰두하면 안 될까? 서창경이 걸어 둔 주술은 귀신뿐만이 아니고 병마까지 부른다고 들었어.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를 빼앗아서 제 원동력으로 이용한다더라.”
내게 보이는 호감은 그대로였지만 나름의 우선순위를 다진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정상적인 반응이 아닐까 했다.
개놈 같은 인간이나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고백을 빙자해 협박하는 거다. 심지어 날 궁지로 내몬 건 개놈 본인이고.
“지가 무슨 흡혈귀래요? 귀신도 아니면서 생기는 왜 빨고 그걸 왜 자기 힘으로 돌려?”
개놈 새끼가 못된 짓만 공부해서는 몸주신을 받아들여 섬기지 않는 대신에 영력을 키울 다른 방도를 찾아낸 듯했다.
“오래 끌수록 더 위험해진다니까 서둘러 끝내자. 나 너한테 이용당한다는 생각 추호도 안 해. 내가 나서야 할 일인 걸 알아서 이러는 거야.”
내게 닥친 문제를 줄곧 미미하게 취급해 온 그가 장난기를 거두었다. 이혜준이 심각한 얼굴을 하자, 여느 때처럼 그의 가벼운 듯 따듯한 말로 내 심적 고통을 덜고자 바랐던 나는 더럭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대가로 줄 것이 없어 저울추가 심하게 기우는 이 거래가 못마땅하기도 했다.
내가 어떡하면, 내가 무얼 건네면 수평을 이루게 될까.
“강지헌, 그래도 돼.”
“……고맙습니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시늉은 했지만 썩 내키진 않았다.
“그렇게 고마우면 오이냉국 메밀국수 또 만들어 줘. 그날 저녁에 먹은 해물탕이랑 꼬막무침도 되게 맛있었어. 전부 네 솜씨라며. 나는 레스토랑에서도 그렇게 감탄하면서 먹어 본 기억이 없거든.”
아니, 그까짓 국수가 뭐라고. 정말 그런 걸로 보답해도 되는 거야?
“다 해 드릴게요. 근데 제가 대용량 요리에만 소질이 있어서 양을 적게 계량하면 맛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어요. 똑같은 맛은 안 날 거야, 아마.”
아버지 동문 연합 합숙 훈련 숙수 노릇에 이골이 나다 보니 50인분 이상 계란찜, 50인분 이상 라면, 50인분 이상 육개장, 이런 걸 잘했다. 전부 만들고 나면 음식 냄새에 질려서 내 입맛은 뚝 떨어져 나갔지만.
“너 어떻게 봐도 조교 타입인데 취사병이었던 거야?”
뭐야. 내가 조교였던 건 어떻게 알았지?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무술 단증도 모조리 감추었는데 훈련 기간에 잘못 찍혀서 조교로 뽑히고 말았다.
예상대로 겨루기 시합, 전투대회, 이딴 걸 우승해서 휴가를 나와 봤자 고용주에게 불려 갈 뿐이라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맞아요. 나 조교로 복무했어요. 우리 학부 애들은 모르는 사실인데 김재원한테 들은 거예요?”
다른 산공 놈들하고 친분이 있을 리는 없고.
“아니. 걔는 후문 쪽에 무슨 카페를 연다며 놀러 오란 메시지밖에 안 보냈어.”
“놀러는 무슨! 절대 가지 마요. 가면 잡혀서 꼼짝없이 일해야 해.”
이건 두 사람 사이에 낀 내가 해 줄 수 있는 선의의 충고, 그러니까 고자질이다.
“그래? 나한테 노동력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기분은 좋다. 하하.”
“…….”
저렇게 기꺼울 일인가?
“낳아 주신 우리 어머니조차 속 터져서 미칠 것 같다며 포기한 나를 높이 쳐 주다니 네 친구가 인류애 다량 보유자네.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돕고 싶은데, 사람 북적이는 데서 일했다간 나 몸져누워. 이혜준 폭삭 시들어 버려. 이 꽃 같은 미모를 싱싱하게 유지하려고 나는 내 회사에도 출근 안 하잖아.”
아이 씨, 네가 그럼 그렇지.
아웃사이더의 3초를 못 가는 정상인 플레이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람 헷갈리게 좀 하지 말자. 무슨 강약중강약도 아니고 믿음직스럽든지 한심스럽든지 둘 중에 한 가지만 하세요, 제발.
전 같으면 외모로 꿀 빠는 이런 나태하고 이상한 사람을 질색했을 텐데 이제는 웃어넘기게 된다. 이혜준의 유별남을 수용했다고 할지 어쨌거나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토록 무섭다.
“그래요. 한동안은 김재원 피해 다니세요. ……근데 나 얼굴에 ‘조교’라고 써 놨어요? 어디가 그렇게 조교 티가 나요?”
태권도 사범으로서 지도하고 구령 붙이는 습관이 일상생활에서도 드러나나 해서 뜨끔했다.
“너 아직 물이 덜 빠져서 말투 완전 분대장이야. 말끝에 ‘요’ 자만 붙인다고 해서 숨겨질 진실이 아니거든.”
“어, 진짜요?”
“196번 훈련병,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이런 거 매일 했지?”
“……예.”
“강지, 나도 너한테 군기 잡히고 싶다아-.”
변태 새끼 아니야, 이거. 보직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누군 좋아서 애들 굴린 줄 아나.
“선배님도 나하고 원수지고 싶으세요? 저 군대에서 철천지원수 수천 명 만들어 놓고 왔거든요?”
“그래. 분대장들 보니까 욕을 하도 많이 들어서 하나같이 장수하겠더라. 넌 분대장보단 교관 쪽에 더 가깝지만 일반 병사는 해당 사항이 없으니까. 강지헌 다른 사람한테 명령하고 지시 내리는 거 되게 잘해.”
“내가요?”
우리 학부 애들한텐 태권도 가르친 적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