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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51)화 (51/96)

51화

“응. 그래도 네가 설정우 같은 자식에게 이용당하는 건 보기가 싫지. 차라리 네가 학생회장에 출마했으면 좋겠다. 너 리더십이 있어서 잘해 낼 텐데.”

“그런 귀찮은 자리는 하고 싶다고 설치는 사람한테 양보할게요. 저는 기력이 달려서 사양하렵니다.”

“바로 그거야. 의욕이 바닥에 깔리는 그 느낌! 조금만 더 분발하면 나랑 같이 방구석을 굴러다닐 수 있겠는걸? 우리 점점 동지 의식이 싹트는 것 같아서 좋다, 그치.”

뭐래, 진짜. 너랑 나랑 무슨 공통점이 있다고 게으름 동지 타령이야? 혹시 지금 이 인간이 날 세뇌 중인 건가? 턱도 없이.

“좋긴 뭐가 좋아요. 선배님이나 다음 생에 판다로 태어나서 실컷 굴러다니세요.”

저랑 같이 바닥을 뒹굴며 대나무를 뜯어 먹자고 할까 봐 무서웠다.

더 찜찜한 사실은 저주를 퍼부었더니 이혜준이 “내세를 축복해 주는 거야? 고마워!”라며 기꺼워했다는 점이다. 어떠한 인신공격도 먹히지 않는 강적이었다.

요리가 차례차례 도착해 내가 먼저 이혜준의 개인 접시에다 샌드위치며 샐러드를 덜어 줬다. 그사이 이혜준은 파스타를 포크로 동글동글 예쁘게 말아서 내 접시에다 놓아 주었고.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지 데커레이션 솜씨가 훌륭했다.

“가만 계세요. 시중들어 달라며.”

“이런 건 내가 잘하니까 넌 힘쓰는 거 대신 해 주라.”

“힘쓰는 거 뭐요.”

“나 업고 다니거나 내가 들어 달라는 물건 대신 들어 주기 같은 거 있잖아.”

댁이 보디가드 해 주신다며? 그거 뭐 하는 직업인지 몰라?

“알았어요.”

역할이 바뀐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별거라고.

나는 나보다 15kg은 더 나가는 동생 놈도 거뜬히 옮겼다. 그 녀석이 술에 취해서 들어와 쓰러지는 날이면 부모님은 냄새난다며 놈을 분리수거장에 갖다 버리라고 하셨다. 그럼 나는 놈을 짊어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쓰레기장에 던져두……려고 했는데, 차마 혈육한테 비정하게 굴지 못해 놀이터의 모래사장에다 고이 파묻어 놓고 오곤 했다. 체온 보호 효과가 있길 바라며.

이 인간도 취해서 정신 못 차리면 모래사장에 한 번 담갔다가 집에 데려다줘야지.

“진짜? 약속했다?”

이혜준이 눈이 접힐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저토록 흔연해하는 이유를 몰라 연애고자는 한순간 겁을 집어먹었다.

뭔데. 나 뭐 실수한 거야? 나 뭐 또 놓치는 거 있나?

조금 불안했지만 저리 좋아하는데 게름뱅이 소원 하나 들어주자 싶어 “예.” 하고 깔끔하게 약속했다.

엊저녁의 과식에 여태 배가 부른 느낌이라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 없었는데, 없었건만, 이혜준이 

“에이, 조금씩만 더 먹어 봐.”

“이것도 먹어 봐.”

“배불러? 그럼 마지막으로 이거 조금 맛만 보자.”

“이건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이라며 자꾸만 음식을 담아 주고 권하는 바람에 또 평소보다 초과해서 먹고 말았다.

수소문해서 찾았다는 브런치 카페여서인지 맛은 대체로 평균 이상이었지만, 이혜준의 태도가 문제였다.

떠먹이면서 사람 못살게 구는 스타일인가?

“사육당하는 기분이 들잖아요.”

결국엔 도저히 먹히지 않아 한마디 했더니, “눈치챘어?”라며 부정하지도 않고 또 예쁘게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이제 일어나면 흉가가 다 된 장소로 가야 하는데도 인간이 참 걱정 없이 해맑다 싶었다. 나는 우리 집에 가는 건데도 떨려서 죽겠는데.

하긴. 방상시 체질인 저 선배가 겁날 게 뭐가 있어서 긴장을 하겠어.

“혹시 방상시 아세요?”

“어, 알아. 종로면 여기서 가깝잖아. 방상시장에 들렀다 갈까? 뭐 필요한데?”

찔러 봤는데 역시 몰랐다. 이 남자는 눈이 네 개 달린 진짜 방상시도 아니고 귀신을 쫓는 호박색 눈 말고는 비슷한 구석도 없었다. 더 파고들어서 뭐 하나 싶어 방산시장 철자가 틀린 것도 고쳐 주지 않았다.

“없어요.”

“에이, 쑥스러워하지 말고 가지고 싶은 거 있음 뭐든 말해 봐. 형이 다 사 줄게.”

이혜준이 놀리듯 권했다.

“진짜 없습니다. 말 잘못 나온 거니까 걸고넘어지지 마요.”

일부러 사납게 대꾸해 봤지만 그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우는 덴 실패했다. 이쯤 되니 어떤 공격을 퍼부어야 그의 정신력에 대미지를 입힐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오늘도 이혜준은 말끔히 접시를 비웠다. 꾸역꾸역 삼키는 억지스러움이 없어, 음식을 남길까 봐 미리 적은 양을 부탁했던 것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은데 담부턴 그냥 제 양껏 주문하게끔 내버려 둘까 싶었다.

다음부터라니.

줄곧 함께 식사할 사이라는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라서 당황스러웠다.

“강지, 나 짐 들어 줘.”

계산하려고 먼저 일어서는 내게 이혜준이 시중을 요구했다. 빈손으로 들어온 주제에 무슨 짐이냐고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그가 내미는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카드 아무거나 꺼내 써.”

“…….”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기에 잔말 않고 받아 들었다.

서창경이 준 카드를 사용하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어 나는 타인의 신용카드엔 손대지 않는 주의였다.

그 개놈이 출장 비용으로 쓰라고 줘 놓고선 일하는 게 시원찮다며 절도죄로 나를 경찰에 신고했다. 초기에 날 길들이려고 한 짓거리였다. 내가 만만할 땐 사과도 하지 않다가 올해 들어 뜬금없이 그때 일을 들춰내며 반성하는 척하기에 더욱 빡쳤다.

새끼가, 기껏 덮어 주려고 했더니.

속으로 시발시발 고용주 욕을 하며 내 지갑을 꺼내려는데, 바로 귓전에서 이혜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야, 깜찍한 짓 하면 너희 집에 가 주지 않을 거다?”

억. 깜짝이야!

움찔거리는 사이 뒷주머니로 들어온 손가락이 먼저 들어가 있는 내 손을 걷어치우더니 지갑을 훅 빼냈다. 당당하게 출구로 걸어가는 소매치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는 수 없이 이혜준의 지갑을 펼쳤다. 이 인간은 비상용 현금조차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맨 앞의 카드를 꺼냈더니 런던에 본사가 있는 은행에서 발행된 것이었다. 도로 집어넣었다.

그 뒤로도 이것저것 모두 외국계 금융 기관 발행 카드라서 다른 걸 찾다가 결국은 학생증을 꺼내 들고 말았다. 학생증은 국내 은행과 연계된 현금카드로 쓰이기도 했다.

저 선배님 한국에 온 지 6~7년은 됐을 텐데 여태 뭘 한 거야? 계좌 만들려고 은행을 방문하는 것이 그렇게도 귀찮았을까. 아니면 국적 탓에 자격이 안 됐나?

학생증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영국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국적은 대한민국인지 내가 아는 이름 그대로였다. 어쩌면 영어 이름 역시 ‘혜준’일 수도 있겠지만, 처음 그가 내 인생에 등장한 해에 한국군 전역 후 복학이라는 얘길 전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도 뭐 저렇게 생긴 사람이 다 있느냐며 난리도 아니었던 터라 이 선배에 관련한 소문이 무성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까지 귀에 들어왔고 심지어 ‘혜준 선배님 화요일 3교시 신관 4층에 있음’ 이런 정보까지 나돌았다. 그의 유명세 덕택에 내가 제대로 피해 다니긴 했다.

계산을 맡은 직원이 이혜준의 학생증 사진에 시선을 꽂은 채 한참 시간을 끌었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반응처럼 보였다. 잘생긴 남자 보면서 멍 때리기.

학교며 학부 이름이 다 나와 있는데 괜히 신분증을 건넸다는 후회가 들었다. 하 씨, 나 왜 이렇게 멍청하지. 그까짓 해외 결제 수수료가 뭐라고.

오래전, 무단으로 찍은 이혜준의 사진들이 교내 커뮤니티에 돈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체크카드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잔금 없습니까.”

“엇. 아니요. 아닙니다. 와……. 저 오늘 계 탄 날인가 봐요. 하하. 현실감 없는 미남자를 만났다고 친구들한테 자랑해야겠어요.”

직원이 학생증을 돌려주며 현실감 없는 미남자의 자취를 따라 출구를 돌아봤다. 너 아닌 네 동행에게 보내는 찬사라고 행동으로 증명했다.

이혜준이 사람 많은 장소를 피곤해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이런 열렬한 시선 때문인가 싶기도 했다. 익숙해진 듯 누가 저를 넋 놓고 쳐다봐도 일일이 의식하진 않는 눈치긴 했지만.

“…….”

“저런 분은 애당초 올려다보지도 못할 나무 같아서 용기 내서 교제 신청하는 사람이 드물 것 같아요.”

내가 입대하기 전에는 <인류 유산 공공재를 건드리면 죽음뿐>이라는 어이없는 표어가 떠돌기는 했다.

“잘 먹었습니다.”

직원은 제 추측이 맞는지 내게 확인을 바라는 눈치였지만 무시하고 영수증만 챙겼다.

연애 상대가 저보다 더한 미인이어야 한다는 아득한 조건을 제시하자 감히 소개팅이 들어오지 않더라는 얘길 떠올리면 맞아떨어지는 추측이었다.

그렇지. 어중간하게 잘생기지 말고 아예 초월해 버리면 번거로울 일이 없을 텐데 말이야. 그 쉬운 일을 내가 해내질 못했네.

그까짓 초월적 미모를 가지지 못해 여자 친구 있다고 연막을 쳐 놓아도 여기저기서 귀찮게 시달리는 거였다.

내친김에 가게 앞 목조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는 이혜준을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시비를 걸었다.

“선배님은 인생 너무 쉽게 사는 것처럼 보여요.”

“어, 맞아. 나 진짜로 그래. 우리 일가친척들도 다 인정하는 건데 특히 운빨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 뭘 하든지 일이 술술 풀리거든?”

느닷없는 시비에 짜증은커녕 이유도 묻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수긍해 버린다.

“참 나.”

마주 웃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부턴 나의 이 행운을 강지헌에게도 나눠 주려고 해.”

“말씀만이라도 정말 고맙습니다.”

순수한 호의가 전해져 와서 나도 솔직한 마음으로 감사했다.

“누가 말만 하는 거래. 나하고 재회한 후로 네 운도 트인다는 느낌 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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