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53)화 (53/96)

53화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지하 3층을 누르고, 그가 내 얼굴을 구경하지 못하게끔 등을 돌렸다. 벽에 붙은 거울에 이혜준이 히죽거리며 제 지갑을 여는 모습이 잡혔다.

아, 맞다.

“학생증 썼어요.”

“상관없지만 다른 카드도 많은데 굳이?”

그러게 굳이 선배님의 신분을 밝혀 버렸네요, 제가. 죄송합니다.

“국내 은행 게 없어서.”

“아……. 형 외화 벌어서 먹고 사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 쓰고 싶은 대로 써.”

무슨 회사를 창업했기에 외국 돈을 번다는 거야?

“뭐 하는 회사예요? ……뭐야. 왜 그걸 거기에다 집어넣는 건데!”

제 신용카드를 내 지갑으로 옮겨 꽂아 넣는 광경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이제야 내가 하는 일이 궁금해지는 모양이네. 내일 나랑 같이 회사에 놀러 갈까?”

“말 돌리지 마요. 여기. 나 예전에 도둑으로 내몰린 적 있어서 남의 명의로 된 카드 갖고 다니지 않거든요. 주차 할인받아야 하니까 영수증이나 꺼내 주세요. 내 휴대폰도 돌려줘요.”

담담하게 이유를 설명하며 지갑에서 이혜준의 신용카드를 도로 꺼내 내밀었다. 마침 승강기 문이 열려, 억지로 손에 쥐여 주고는 먼저 바깥으로 나왔다. 등 뒤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개천사?”

“예. 가끔 그런 식으로 나한테 장난쳐요.”

나를 도둑으로 몬 인간이 서창경이냐는 질문에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대꾸했다.

“왜?”

“하나밖에 없는 직원 통제하려고?”

고용주에게 개 취급당하며 사는 것이 쪽팔려서 ‘강지헌 길들이려고요.’라고는 대꾸하지 못했다.

“등신 아냐? 통제는 무슨, 오히려 역효과만 발생한 것 같은데?”

“…….”

제삼자의 평가가 뭐라고, 별것도 아닌데 기분이 나아져서 입가가 실룩거렸다. 결과만 보면 여전히 고용주에게 묶인 상태지만 그 진창 속에서도 내 나름은 죽어라 뻗대고 맞서 왔다는 사실을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일 거다.

인간 대 인간의 기 싸움이었다면 일찌감치 끊어 냈겠지. 그러나 서창경이 내세우는 무기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지구 끝까지 도망가도 소용이 없고, 설사 내 목숨이 끊어져도 소용없는 싸움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잠깐이나마 도취됐던 승리감이 감쪽같이 증발했다. 이혜준까지 끌어들여 가며 수고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괜히 이 친절한 선배님만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내 주제에 무슨 정상적인 삶을 살아. 나만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서창경한테 숙이고 돌아가면 전부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발 디딜 곳 없는 막막한 감각이 또다시 엄습했을 때, 이혜준이 발밑이 무너져 곤두박질치기 직전의 나를 붙들었다.

“내가 어젯밤에 쓰레기 데리고 개천사에 대해 고찰해 봤거든. 방법이 나올 것 같으니까 너 혼자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돼.”

‘강지헌 정신 강화 연구’ 결과로 나왔다는 허망한 구호를 떠올리면 큰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이혜준도 있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불분명하지만 쓰레기도 있고.

평소 나는 마음속으로만 공숙선을 욕했는데 이혜준이 당당하게 쓰레기라고 외부에 표출하니 카타르시스마저 찾아들었다.

“선배님은 공숙선이 나쁜 놈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관리실 앞에서 손을 내밀자 이혜준이 알아서 영수증을 건넸다. 무인 결제기를 사용해도 되지만 이것 때문에 직원이 근무하는 지하 3층까지 내려와 차를 세워 둔 거였다. 이 동네는 특히 소극장과 연계돼 반값으로 할인되는 주차장이 제법 있었다.

고용주가 주는 수당이 적지 않지만 대부분 선업 포인트 쌓기 용도로 쓰였다. 그것 빼고는 강지헌 씨 개털이나 마찬가지라서 아껴 가며 살아야 한다.

“만나자마자 나한테 이상한 종을 들이대더라고.”

맞다. 그 흉물스러운 물건이 있었지.

고개를 돌려 새삼 이혜준의 낯빛을 살폈다. 초점이 엇나감 없이 반듯하게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혼백을 조종당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아침에 만났을 때보다 안색은 한결 나아 보였다. 수면 부족으로 약간 충혈됐던 눈자위도 깨끗해졌고.

언제쯤 겁먹지 않고 이 절세미인의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할 날이 올까, 라고 바란 것이 바로 하루 전날이건만 지금 내가 그러고 있다. 이처럼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가 어려우므로 암울한 미래는 그만 떠올리자고, 자꾸 생각나더라도 얼른 털어 버리자 싶었다.

“어, 그거 되게 위험한 물건인데.”

“정화돼서 지금은 그저 오래된 유물일 뿐이야. 너한테도 사용하려고 했다며. 별일 없었어?”

“…….”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마주 보며 잠깐 염려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어제 선배님이랑 만난 덕분인 것 같아요. 종에 실린 주술이 통하지가 않더라고요. 공숙선 씨도 날 보더니 불길하다며 뒷걸음질까지 치고.”

내가 방상시 된 줄 알았잖아. 효과 죽이더라.

“손도 잡고 같이 사진도 찍고 몇 시간 동안 붙어 있은 보람이 있었던 거지.”

아니라고 반박하기엔 호령도에서의 경험이 강렬했다. 이혜준에게 시신경 고문을 당한 직후 굿판에 몰려들었던 흰옷 입은 혼백들이 송두리째 내 눈앞에서 증발했더랬다. 실제로 사라진 건 아니겠지만 내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는 상태.

그러네? 말 그대로 ‘있으면 있는 거지, 나하고 무슨 상관?’인 상태를 나도 모르는 새에 겪어 봤구나!

약간 고무된 기분으로 감상을 전했다.

“선배님이 주변에 도사린 신령들한테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여요.”

“완전 좋지?”

니 체질? 아님 너?

“어, 뭐, 글쎄요.”

지능적인 유도신문에 시큰둥하게 대꾸하며 넘겼다.

“철벽왕 납셨네 진짜.”

옆에서 침음 섞인 투덜거림이 흘러나와,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우리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기력이 달리신 이혜준 님은 또다시 수면을 시도했다. 시트를 젖히고 드러누우려기에 그렇게 처먹고 역류성 식도염에 걸릴 일 있느냐며 아주 약간 지랄을 떨었더니, 서러워하는 태도가 가소로웠다.

“앉아 있으니까 속이 막 부대껴. 강지야, 내 경험상 이럴 땐 잠시 누워 있으면 만병이 치료되거든?”

놀고 있네.

“가만 앉아 계세요. 시트 또 눕히기만 해 봐.”

“나는 워낙에 소화 능력이 뛰어나서 밥 먹고 금방 드러누워도 아무렇지가 않아. 탈 난 적 한 번도 없어.”

“시끄러워요.”

“왜 사람을 직각으로 앉혀서 재우려고 해. 그거 고문이야. 이혜준 레고 아니라고.”

“아, 시끄럽다니까.”

이혜준은 잠투정을 하듯 징징대면서도 내가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자세가 불편하다며 칭얼거리다 제풀에 지쳐 잠드는 모양새가 꼭 유치원에 다니는 사촌 동생 같았다.

하린이는 귀여웠는데 이 인간은 진짜……. 등짝을 한 대 갈기고 싶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데 또 손톱만큼은 웃기고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막내 이모 부부가 하린이 데리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잖아. 설마 부정한 기운이 그쪽으로도 묻어간 건 아니겠지?

뒤늦은 대책이지만 당분간은 친척들의 방문을 뜯어말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의 병환마저 전부 내가 불러들인 화라고 여기니 벽에 머릴 처박고만 싶었다. 죽고 거기서 끝이라면 그 쉬운 해결책을 택할 일을 혼백조차 내 것이 아니게 될 결말이 두려웠다.

와 씨, 나 또 땅 파고 앉아 있네. 아예 생각이란 걸 하지 말고 살까?

다행히도 이번엔 스스로 수렁에서 기어 나왔다.

가족 채팅방에다 잠시 집에 들를 거라고 알렸다. 초등학교도 방학이라 집에는 엄마와 동생이 있을 거였다. 연년생 동생은 아버지 도장에 훈련하러 갔을 수도 있겠고.

집에선 나한테 얻어터지고 사는 강이헌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라 거의 군 면제나 마찬가지였다. 현재 예술 체육 요원으로 복무 중이나 군대는 가지 않았다. 나이 제한 탓에 단수는 내가 더 높다지만, 품새며 격투며 걔가 훨씬 나았다. 몸무게 차이로 체급도 세 단위나 더 위였고.

나: [지금 집에 친구 데려가]

이단정씨: [우리 재원이? 재원이 뭐 먹고 싶대?]

이단정씨: [이헌이더러 새로 장봐오라고 해야겠다]

어머니는 자식 친구들이 집에 몰려오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는 주의였으나 유독 김재원만은 챙겼다.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나 혼자 지내는 녀석이 안쓰러워서, 라는 핑계를 댔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얼굴 때문이지, 뭐.

외고를 다녔고 학교 앞에 기숙사가 있어 김재원뿐만이 아니라 친한 친구 대부분이 가족과 떨어져 살던 시절이었다.

이혜준 선배님 데려가면 오늘로 울 엄마 최애 순위 뒤집히는 거 아니야? 모자랑 마스크 씌울까.

나: [아냐 우리 과선배 뭐 좀 확인만 하고 금방 돌아갈 거예요]

앞으로도 이처럼 잠깐씩만 들르는 거라면 굳이 식구들에게 흉가가 다 된 우리 집에 대해서 알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괜히 겁을 집어먹게 하기는 싫었다.

우리 동네가 가까워져 오자 언제 맞춰 뒀는지 또 알람이 울렸다. 하여간에 이혜준, 타이밍 맞추는 데엔 도가 텄지.

자취할 때 이불 속에 있다가 수업을 놓치고 결국 휴학까지 간 아픔을 교훈 삼아 알람 러버가 된 듯 보였다. 이런 습관이 든 사람이라면 게으른 것치고 지각할 일은 드물지 싶은데.

“너 본가에 머물 땐 여기 역에서 지하철 타고 학교에 가는 거야?”

이혜준이 잠기운을 떨치려는지 서너 차례 눈을 깜빡이며 주변 거리를 둘러보았다. 쌍꺼풀이 약간 짙어진 걸 제외하고는 자다 깬 사람답지 않게 선명한 눈초리였다. 원래부터가 희미한 인상이 아니기도 했고.

“예.”

“나 얼른 가서 네 방 구경할래!”

이 새끼, 우리 집 기운을 바꿔 주겠다는 거 순 거짓부렁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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