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목적지를 앞두고 긴장감을 잃은 발칙한 발언에 방문 서비스를 요청한 클라이언트는 의심이 싹트려 했다.
“내 방이 좋아 보이면 거기서 며칠 주무시고 오세요.”
“너하고 같이?”
“나는 서창경 씨한테로 돌아가야죠.”
정성껏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진 못하더라도 이혜준과 함께 있느라고 외박할 순 없었다. 고용주에게 들켰다간 나는 완전 작살나는 거다.
“와, 이런 식으로도 대미지를 입네. 강지야, 너 방금 두 집 살림하는 바람남이 지껄일 만한 소릴 한 거 알아? 너 원래 애인 울리는 나쁜 남자 이미지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황이긴 한데, 어째서 내가 본처가 아니지?”
구멍이 하도 많아서 어느 부분부터 메워야 좋을지 모를 황당한 문장의 나열이었다. 그중에서도 모태 솔로인 나를 바람둥이 취급하는 점이 제일로 억울하고 거슬렸다.
“허…… 미치셨어요? 나처럼 성실한 인간이 또 어디에 있다고 터무니없는 모함을 하세요? 내 또 다른 별명이 강성실이거든요?”
“성실하니까 두 집 살림도 너끈히 할 수 있는 거잖아! 몸뚱이가 게을러 봐. 어디 그게 되나.”
“오, 말 된다?”
“게으르면 한 집 살림을 차리기는커녕 기력이 달려서 집 밖 데이트 한번 하는 것도 진짜 큰맘 먹고 도전해야 한다고.”
“푸하하하하하하.”
참신한 이론에 맞장구를 쳐 줬더니 이혜준이 제 무덤을 팠다.
아, 웃겨. 정신 빠지게 웃느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주차 중에 헛손질을 할 뻔했다.
“이혜준 데리고 사는 사람은 완전 안심되겠다, 그치? 바람피울 걱정 하나도 없잖아?”
이 인간이 시도 때도 없이 약을 파네. 어제는 모르고 당했다지만 이젠 어림도 없지!
“알 게 뭐예요. 나하고 무슨 상관?”
그에게 배운 그대로 써먹었다.
“지헌아? 너 내도록 눈치 없이 굴더니 하루 만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는데? 내가 하는 말 무슨 뜻인 줄이나 알고 뻗대는 거야?”
이혜준이 떠보듯이 물었다.
어젯밤에 이 인간의 행동이 헷갈려서 김재원에게 물어본 것이 신의 한 수였네. 내가 이유를 몰라 긴가민가하는 동안에 이 자식은 계속 나를 가지고 놀았을 거 아냐.
“모르죠.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해사하게 웃는 이혜준을 보자 앞으로 시침을 떼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애는 써 봤다.
“그래그래, 개천사 문제 해결될 때까지는 모르는 걸로 치자. 페어플레이가 아니니까 그때까진 나도 자제해 줄게.”
그 뒤론 모른 척해도 봐주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자기 감정 내세우지 않고 누른다는 것이 이런 수준이면 나중엔 어떡하겠다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님은 지금도 내 기준 엄청난 직진이신데요?
개놈을 상대하는 건 부정 탄 집을 정화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혜준은 금세 해결할 사안인 것처럼 큰소리를 치지만, 내 생각은 회의적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약 없는 기다림에 쓸데없이 열을 올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많은 자제 부탁드릴게요.”
나도 마주 웃으며 받아쳐 줬다.
“그럼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잘 판단할게요. 그러니까 강지헌 씨도 나 믿고 기운을 내주세요, 예?”
“믿어요. 선배님한텐 서창경 주술이 안 통한다며. 얼마나 다행이야.”
나 도우려다가 이혜준 잘못될까 봐 걱정이었는데 이 남자라도 안전하다니 천만다행이지.
“믿기는. 믿는다는 얼굴이 그렇게 침울해? 우리 강지, 연기력이 엉망이라 내가 걱정돼 죽겠다. 이래서야 작전을 세워 봤자 네가 개천사를 속일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
“절실하면 다 하게 돼 있거든요?”
서창경에게 세 번의 혼사 운까지 들키고 났더니 걱정은 배로 늘어나고 자신감 게이지는 반의반 쪽으로 쪼그라든 상태였지만 우는소리는 하지 않았다.
“강지헌이 절박한 상황에서 안 되는 연기를 쥐어짤 일이 없게끔 내가 미리 알아서 잘해야겠다.”
“…….”
어떻게요? 어떻게 잘할 건데?
내 입에서 재 뿌리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화제를 거뒀다. 정신세계 하나는 다부진 남자라지만 나의 부정적인 기운을 그에게 옮기기엔 미안해서.
“참, 식구들한텐 별다른 설명 없이 친한 선배님이라고만 소개하면 안 될까요? 엄마가 수술하고 좌심실 보조 장치까지 달고 계셔서 이 이상 충격받는 일이 없었으면 해서요. 지금 집 상태도, 서창경 정체도 말하고 싶지 않은데 나 그래도 돼요?”
“어머니 편찮으셨구나. 어제 쓰레기에게 그 얘기까진 듣지 못했어.”
“공숙선 씬 올해 합류해서 우리 집 사정을 자세히는 몰랐을 거예요.”
“그래. 난 괜찮아. 근데 너희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친한 사람 역할을 주고 싶으면 선배님의 ‘님’ 자라도 빼지? 이 기회에 형은 어때?”
“됐고, 여기서 더 친해지면 성도 떼고 이름으로 부를래요. 말도 놓을 거예요.”
은근슬쩍 기어올라 봤는데, 역시나 나보다 한술 더 뜨는 이혜준 씨는 “좋아. 지금 당장 연습해 보자!”라며 오히려 부추겼다.
하라면 못 할 줄 알고? 너 내가 야자 타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는구나?
“혜준아, 얼른 내려.”
“네, 알았어요. 지헌 씨, 나 가져갈 물건이 있는데 뒷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
“큭-.”
고분고분한 말투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웃음이 툭 터졌다.
웬일이야. 왤케 어울리세요?
“가져갈 거 뭐?”
“선물.”
그럴 줄 알았지.
“이번엔 무슨 술이야? 우리 어머니 아버지 술 안 드셔. 그리고 부담스러우니까 우리 집에 올 땐 아무것도 챙기지 않아도 돼.”
조수석에서 내리는 이혜준을 말렸다. 집에 술을 가져다 놓으면 술 좋아하는 동생 놈 식도로만 흘러 들어갈 게 뻔했다.
“오늘은 술이 아니고요. 아무래도 지헌 씨 댁에 인사 드리러 올 것 같아서 제가 우리 집 온실에 있는 꽃들로 꽃바구니를 한번 꾸며 봤어요.”
“초대받기도 전에?”
화물칸으로 들어간 이혜준의 등에다 대고 물었다.
오란 말도 안 했는데 그 무슨 김칫국 마시는 짓거리죠?
“거절당하면 지헌 씨께 드리려고 했어요.”
“나도 거절할 건데?”
소극장 건물에 꽃바구니를 들고 갔다간 누구한테 받았느냐고 추궁당할 게 뻔했다. ‘서창경 씨 너 주려고 가져왔어.’ 이랬다가는 프러포즈 아이템이 될 수도 있었고.
무섭다. 서창경 앞으로 꽃은 절대로 못 가져가.
“왜요, 들고 다니기가 창피해서?”
“창피까진 아니고. 내가 꽃바구니를 들면 꽃 배달 직원 각이 나오겠죠?”
“그럴 리가요. 꽃보다 더 어여쁘신 분인데 지헌 씨가 들고 계신 꽃 따위가 감히 사람들 눈에 들어찰 리가요. 백만 송이 장미에 파묻혀 있어도 당신이 가장 빛날 거예요.”
시발, 못 이기겠어.
“항복!”
더한 개소리를 듣기 전에 외쳤다.
“지헌 씨, 나 그만해?”
“응. 제발 여기까지요. 나 팔에 닭살 돋은 것 좀 봐. ……와-!”
팔뚝을 빡빡 문지르다가 이혜준이 가지고 나온 꽃을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바구니라더니 말과는 다르게 아담한 직각 상자에다가 꽃꽂이 장식을 해 왔다. 은빛 문자가 새겨진 검은색 상자에는 연푸른 수국과 흰 장미와 보라색 계열의 여러 빛깔 장미들이 어우러져 마치 정물화 속 예술품처럼 보였다.
“예쁘지.”
“우와, 진짜! 선배님 능력자세요.”
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창업했다는 데가 꽃가게였어?
“그렇게 마음에 들어?”
“…….”
끄덕끄덕.
“반했어?”
“예!”
끄덕끄덕.
“나도. 나도 그래.”
느닷없이 이혜준이 웃음기를 싹 거두고 속삭였다.
“……?”
엥?
맥락을 읽지 못해 어리둥절해 있다가 앞서 걷던 그가 방향을 물으려는 듯 뒤돌아설 때야 간신히 핀트가 잡혔다.
“저기요. 방금 그거!”
“뭐? 그거 뭐?”
이혜준이 껄렁하게 턱을 치키며 되물었다. 저러고 있으니 딱 생양아치 상이었다.
몰라서 물어?
“페어플레이하시라고요.”
“잘하고 있잖아.”
“어디가?”
“내가 너한테 뭘 요구했어. 날 좋아해 달랬어, 아님 나하고 사귀어 달랬어. 줄기차게 깜빡이를 켜도 무던히 넘기던 눈새님은 어디로 가셨기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갑자기?”
“…….”
너 뭐, 나한테 줄기차게 한 거 있나 봐?
당연히 내 기억엔 없었다.
제삼자적 입장에서 내 일 아닌 척, 남의 일인 척 듣고 넘기려고 했는데 잘 되지가 않았다. 유사 고백을 하는 인간은 겁도 없이 당당한데 어째서 듣는 내가 민망하냐고.
“어, 강지헌 씨 귓불이 빨개졌어요. 소주 세 병을 까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토록 열렬히 반응해 주시니까 보람차네요.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식으로 이벤트를 해 드릴까요?”
내가 술 마실 때 귀만 빨개지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또 헛소리 꺼내기만 해 봐요. 입 좀 다물어! 존대 쓰지 마!”
버럭 해서 일단 조용히는 시켰지만 옆에서 느물느물 웃는 것까진 말릴 순 없었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건물 내부로 들어올 때까지 얌전히, 모락모락, 음험하게 내 짜증을 북돋던 이혜준이 승강기 안에서 침묵을 깼다.
표정은 여전히 나긋했지만 짓궂은 기운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헌아, 우리 그저 몇 차례로 나눠서 해충 방역 업체를 불러 바퀴벌레약을 놓는다고 생각하자. 그리고는 박멸이야. 어렵지 않지?”
순간 복잡하던 심경이 호동가란히 교통정리 되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에겐 어떤 식으로 말을 지어내고, 뭐라고 변명하며 부적을 제거할까 등등의 상념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날아갔다.
“그러게. 선배님이 말하니까 크게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들리네요.”
“응. 나 원래 인생 쉽게 사는 인간이잖아.”
그늘 한 점 없는 해맑은 대꾸가 돌아왔다. 뭔데?
“자학하세요?”
“아니? 자찬인데?”
싱글거리는 웃음에 전염돼 어이없는 와중에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