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예상대로 어머니는 이혜준이 손수 만들었다는 플라워박스 선물에 감격하셨다. 그리고 손님의 피지컬에는 더욱 심각하게 감격하며, 만난 지 1분도 되지 않아 저녁을 먹고 편하게 놀다 가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자식 친구들을 박대하진 않았지만 (김재원 빼고) 누가 집에 오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던 분인데.
아니, 엄마? 아까 나 잠깐 다녀간다고 할 땐 예의상 붙잡지도 않았잖아요?
내겐 저녁은커녕 점심을 먹었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집 나가 사는 자식이고 뭐고 얼굴만이 개연성인가 보다.
“와-. 무슨 연예인이 방문한 것도 아닌데 같이 사진까지 찍고 호들갑이셔. 나 우리 엄마가 저러는 거 처음 본다. 남자의 미덕은 얼굴보단 인성인데 엄만 진짜 암것도 몰라!”
과일을 내가려고 주방에 따라온 동생 놈이 배신감에 찌든 눈길로 거실 방향을 째려봤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와 손님은 소파에 나란히 붙어 앉아 셀카 찍기 대회를 개최 중이었다. 황당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분간 이혜준이 집에 들락거리더라도 집주인에게 환대는 받겠다 싶어 한숨 돌리기도 했고.
“인성으로 비비면 네가 이길 거라는 근거는 있고? 야. 너는 내 밥반찬 강탈해 먹는 놈이지만, 저 선배님은 내 몫은 일절 안 건드리고 오히려 많이 먹으라고 더 챙겨 주는 대천사님이시다.”
“나 참, 밥 늦게 먹는 놈이 잘못한 걸 내 탓으로 몰고 가네. 제 몫 뺏길 짓을 왜 해? 억울하면 빨리빨리 처먹든가.”
동생 놈은 이따위 인성으로 이혜준과 맞붙으려고 하는 거다.
“쯧쯧. 얼굴도 안되는 새끼가 인간도 안되면 답이 없는데 큰일이다. 다행히 엄마가 눈이 좋으셔서 잘생기고 사람됨도 올바른 선배님을 알아보신 거지.”
말은 이렇게 해도 이혜준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고 여겼다. 저 얼굴이며 선량함을 다 갉아먹고도 남는 게으른 기질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여자 사람 친구에게 소개해 주는 자리라면 예쁜 쓰레기보단 내 동생 놈을 내보내는 게 덜 미안할 성싶었다.
우리 엄마는 육체노동에 특화된 당신 남편과 두 아들에게 익숙하다 보니 새벽같이 일어나 움직이는, 몸 탄탄하고 힘도 좋은데다 당신 손에 물 묻을까 봐 집안일도 도맡아 하는 남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혜준의 외모가 범상치 않기에 오늘의 충격과 경탄을 이해는 했지만. 그럼에도 배신의 쓴맛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엄만 진짜 암것도 몰라!’
동생 놈과 똑같은 소리를 속으로 내질렀다.
“됐고. 아빠한테 다 일러 줄 거야.”
동생 놈이 씩씩거리며 부부싸움의 빌미를 제공하려 들었다.
“하지 마라. 저 얼굴하고 경쟁시키면 아버지 우셔.”
냉장고를 열어 주스 팩을 꺼내 들며 동생의 고자질을 말렸다.
“저 정도로 얼굴을 밝힐 거면 엄만 울 아빠하고는 결혼해선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저런 외모가 흔한 것도 아니고 얘기가 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아버지는 뭐가 돼?”
“우리 유전자가 자칫 위험해질 뻔했었다는 거지. 강지 너랑 나랑은 아빠 안 닮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아슬아슬했다, 그치.”
맙소사. 우리 집에 이혜준 못지않은 호래자식이 살고 있었네?
동생 놈은 고작 한 해 차이라며 나를 형 취급하지 않았고 ‘너’라든지 내 별명으로 불러 댔다.
호래동생 새끼. 네가 나한테 얻어터지며 사는 이유가 다 있는 거다.
“너하고 나는 뭐 특출하게 잘난 줄로 알아? 함부로 저 선배님 가까이 가지 마라. 나 실수로 사진 한번 찍었다가 오징어 증명해 버렸잖아. 일반인과는 종족이 달라서 어마무시하게 비교되거든?”
동생이 이혜준과 친해지면 숨기려는 정보가 새어 나갈까 봐 미리 겁을 줬다.
“강지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지금 저 형 옆에 앉아서 사진 찍고 있는 울 엄마는 뭐가 돼?”
“무슨 걱정인데. 울 엄마 정도면 상위 0.001%지. 백만 송이 장미에 파묻혀 있어도 울 엄마의 빛나는 미모는 감춰지지가 않아.”
어려서부터 친구들 어머님 중에서도 우리 엄마의 용모는 독보적으로 눈에 띈다고 생각해 왔다. 남다른 피부색 탓에 흰 파우더 잘못 바른 사람처럼 늘 얼굴이 허옇게 떠 있어서 어디서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과거를 떠올리면서도 이게 미모를 칭송하는 추억인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엄마를 디스하는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강지 너 또라이세요? 손발 오그라드는 그런 개소리는 어디서 주워 배운 거야?”
오늘 손님으로 온 상또라이한테서.
“이 불효자식이, 너희 어머니 예쁘다는 얘기에 그렇게 질색할 건 또 뭐냐. 아, 강이헌, 작작 주워 먹어 진짜!”
복숭아를 한 개 깎으면 절반 이상이 동생 놈의 입으로 흡수됐다. 블랙홀 같은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갔다. 이러니 손님에게 내갈 과일을 장만할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나는 얘가 식탐 부리는 꼴만 봐도 식욕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이 자식한테 치여서 성장기에 얼마나 많은 영양소를 빼앗겼던가.
내 비위가 약하다는 약점을 이용해 일부러 제 침이 묻은 수저로 내 몫을 건드려 놓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포기해 버린 무수한 반찬과 간식 등을 떠올리면 살심이 생기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동생 놈의 종아리를 한번 걷어차 준 뒤 음료가 든 쟁반을 들고 먼저 거실로 나왔다. 돌아앉아 있던 이혜준이 기척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나 쟁반을 받아 주었다. 바지런한 동작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답지 않게.
“왜, 소파에 드러누워 계시지?”
슬쩍 비꼬아 봤더니, 이혜준이 정색하고 맞받아쳤다.
“아니, 지헌아, 그게 무슨 말이니. 소파는 앉으라고 만든 의자인데 드러누우면 어떡해.”
선배님 콘셉트 바꾸셨어요? 이 구역에선 정상인 흉내 내기로 한 거야?
앞서 쟁반을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충격받고 음료를 쏟을 뻔했다.
“이헌인 뭐 한다고 여태 꾸물거리니?”
“강이헌 지금 복숭아 (주워 먹으면서), 참외, 수박 썰고 있어요.”
엄마의 질문에 반쯤의 진실로 대꾸했다.
“우리 둘째가 과일도 잘 깎고 요리도 곧잘 해요.”
둘째의 숨은 먹방을 모르는 엄마가 녀석을 치켜세웠다. 나도 집에서 나가 살고, 어떡하다 보니 강이헌이 가사 노동을 전담하게 돼 요즘 녀석의 주가가 쭉 올라간 상태였다.
거기에다 이혜준이 머쓱한 칭찬을 끼얹었다.
“지헌이가 해 준 요리도 굉장히 맛있던데요?”
아, 진짜 창피하게. 내가 뭐 대단한 만찬이라도 대접해 준 줄로 알겠네.
“작정하고 만들면 지헌이도 잘하지. 근데 얘가 원체 입이 짧은 데다가 후각이 예민해서 제가 만든 요리는 먹기 전에 물려 버려요. 지가 임신부도 아니면서 쿠킹포일에 담긴 음식은 쇠 맛 난다며 안 먹고, 밥솥에 쌀 익는 냄새마저 질색한다니까. 일회용 종이컵에다 뜨거운 음료수 부으면 종이 냄새 나서 못 마시겠다고도 하고, 하여간에 저 혼자 유난을 떤다니까요.”
내게는 요리로 보상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인데, 어머니는 도움 안 되는 정보만 늘어놓았다.
“아. 그래서 여행 가서도 음식만 내어놓고선 정작 저는 잘 먹지를 못했던 거네요.”
이혜준이 대단한 정보를 얻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여다보였다.
호령도에서는 음식 냄새에 물려서가 아니라 거사를 앞둔 긴장 탓에 물 한 모금 넘기기가 어려웠던 건데 혼자 착각하고 앉았다.
“그러니까 우리 첫째는 청소 담당이지. 약간 결벽증 있거든. 정리 정돈도 말끔하게 잘해요. 데려가서 하나는 이삿짐 정리시키고, 하나는 요릴 시키면 되겠다.”
친어머니가 나서서 두 아들을 노예로 알선했다. 내 고민을 해결해 줄 의도는 없었겠지만 정화에 대한 보답으로(?) 둘밖에 없는 자식을 전부 이혜준에게 내주는 모양새가 됐다.
“그럴까요? ……너 그럴래?”
이혜준이 고개를 돌려 내게 물었다.
‘무슨 이삿짐?’
입 모양으로만 물었다.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우리 작전에 그런 거 없었잖아요? 우리 바퀴벌레약 치러 왔잖아.
“…….”
이혜준이 의미를 읽어 내지 못한 것처럼 불퉁하게 내밀어진 내 입술 부근만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대신에 엄마가 설명했다.
“왜. 지헌이 너 오후에 약속 있어? 그래도 친한 학교 선배가 한 동네에 이사 왔다는데 한 손 거들어야지.”
이사?
뭐 하러 그런 말까지 지어냈을까. 집이 멀다고 하면 울 엄마가 자고 가라고 붙잡을까 봐서?
“요즘에는 이삿짐센터에서 다 알아서 해 준다던데, 그러면 연약한 제 노동력을 보탤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비즈니스를 위해 우리 형제가 모은 상패며 트로피는 태권도장 사무실에다 진열해 뒀기에 안심하고 나의 쓸모없음을 어필했다.
또, 무술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두 번이나 도장을 말아먹은 사람을 배우자로 둔 엄마는 ‘직업 스포츠 = 고생’이라고 여기는 분이라 자식의 힘든 면만을 봤다. 심지어 금메달을 따 와도 “운동은 취미로만 하면 안 되겠니.”라고 권하는 엄마가 나서서 내 연약함에 대한 오류를 정정할 리 없었다.
“옷가지 말고는 옮길 만한 물건이 없어서 이사 서비스는 이용하지 않았어. 큰 가구 몇 개만 주문해 둔 상태야. 지헌아, 나 이따 생필품 사러 갈 때 같이 가 줄 거지?”
농담 한마디를 던졌더니, 구체적이고 진지한 답변이 돌아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어어…… 어, 그럴게요.”
눈치껏 대답했지만, 이혜준의 시선은 여전히 내 입술 위에 붙박여 있었다. 어색해서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 마. 시발, 진짜 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