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혜준의 슬리퍼 발등을 경고하듯 누르니, 그가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그제야 눈길을 거두어들였다.
이 새끼가 지금 나를 꼬시려는 것인지 의심할 뻔하려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보이는 바 그대로라는 사실이 떠올라 엄마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생 놈까지 돌아오자, 이혜준은 작정하고 유도신문을 통해 나에 관한 잡다한 정보를 수집하려 들었다. 그것도 답변인의 주관에 좌지우지하는 허황된 의견들을.
“지헌이가 칭찬을 받으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굉장히 쑥스러워하더라고요. 어릴 때도 그랬어요?”
무슨 칭찬? 내가 너보다 더 예쁘다는 눈깔 삔 소리?
강이헌이 나서서 대답했다.
“아녜요, 형. 강지헌 저거 쑥스러움을 알 정도로 감수성이 대단찮아요. 그냥 성격이 삭막하고 싸가지가 없는 거죠. 유치원 다닐 때도 칭찬 스티커 받으면 ‘쓰레기 왜 주세요. 어차피 버릴 거.’ 하면서 선생님 울리고 그랬다니까요. 저 좋다는 여자애들한테도 가차 없었어요.”
“오오, 상상이 간다?”
“살갑게 받아 주는 성격도 아닌데 여자애들이 줄기차게 연락하고 선물하고 하는 거 보면 나도 참 신기하거든.”
“저기서 한 끗만 비끗해도 바람둥이가 되는 거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잘 감시하셔야겠어요, 어머니.”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을 주고받았다.
칭찬 스티커 거부 건은, 어린 마음에도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자 실천한 건데 셋이서 편 먹고서 나를 몹쓸 인간으로 몰고 갔다.
여기서부턴 이혜준의 개소리.
“아, 김재원 후배님이 머무는 기숙사에 고교 동문이 많았던 거군요. 어쩐지 지헌이가 중식은 거의 그쪽에서 해결한다더라고요.”
“뭐, 지헌이가 저보다 잘생기고 착하고 키 큰 남자한테 콤플렉스가 있어서 남동생을 질투한다고? 어쩐지 날 쳐다보는 눈초리가 심상찮더라니.”
“그러게요. 지헌이가 사람 볼 때 정말로 인물은 아예 안 보는 것 같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뽈라구처럼 생긴 앨…….”
그만! 그만, 그만!
방문 목적이 의심되는 대사를 한마디씩 꺼낼 때마다 선배고 뭐고 그의 발등을 밟아 대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 내 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대번에 호빵이 유시호가 떠오르는 걸 보면 이혜준이 말하는 ‘뽈라구’란 볼락의 방언이 아닌 건 분명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하세요? 성심성의껏 알려 드릴 테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시라구요.”
책상 아래에서 의자를 빼 주며 앉으라고 권했다.
“알았어. 내가 제일 궁금한 건, 너 입대 전에 F 수두룩하게 떠서 재수강할 강의가 흘러넘친다는 거 사실이야?”
이혜준이 불공정하게도 거실에서 나누지도 않은 화제를 꺼냈다.
어디서 캐낸 정보람. 시험 기간에 결석이 잦았기에 다들 짐작했을 테고, 비밀에 묻힌 성적은 아니었지만 새삼스럽게 쪽팔렸다.
“…….”
“여보세요? 본인 뭐 하시죠?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라며.”
“함부로 남의 성적을 캐묻다니 매너가 없으시네요. 전공만 재수강할 거라 그렇게 많진 않아요. 흘러넘칠 정도는 아니거든요?”
솔직히 다시 들어야 하는 강의가 흘러넘쳐서 성적표를 보면 눈앞이 캄캄했지만 애써 의연한 척을 했다. 내 과오도 축소했고.
“이번 1학년 애들이랑 같이 듣겠네. 유시호하고 한참 붙어 다니겠다?”
뭐 하며 논다고 학점이 그 모양이냐고 놀릴 줄 알았건만 불쑥 호빵이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의 관심사를 돌리려고 황급히 데리고 들어온 건데 얘기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무구하고 착하고 귀여운 아이를 견제하려 들까. 같이 오구구 해 주진 못할망정 말이야. 이해가 안 되네.
“모르죠. 붙어 다닐 생각 안 해 봤어요.”
그런데 일단 생각해 봤더니 호빵이 덕에 이번 학기가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슬며시 기대심이 피어올랐다.
“정말?”
왜 내가 추궁당하는 기분이 들죠? 나는 볼때기 빵빵한 애 좀 귀여워하면 안 되나? ―이렇게 따지고 싶었지만 여기서 대들면 자칫 심각해질 듯한 분위기였다. 결국 내가 한 선택은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나 유시호한테 별로 관심 없어요. 어제는 치킨 사 준다고 약속한 게 있어서 만난 것뿐이라고요.”
“속일 일을 속여라. 강지 너하고 김재원 후배님은 유시호한테 말을 건넬 때면 목소리 톤부터 완전 달라지거든? 옥타브가 훅 올라가. 관심이 없기는. 어떻게 둘이 취향까지 똑같지?”
존나 눈치 빠른 인간. 앞으로 더 주의를 기울이며 호빵일 예뻐해야겠다.
가만 보니 이 남자는 김재원마저 게이인 걸 알아챈 눈치였다. 우리가 아무리 커플 분위기를 풀풀 날리고 다녀도 다들 장난인 줄 알던데, 어느 지점에서 들통이 났을까.
“유시호는 그저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장난치고 어울리는 거니까 쓸데없이 의미 부여하지 마세요.”
“됐어. 네 뻔한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고요. 이젠 내 취향을 물어볼 차례잖아. 얼른 물어봐.”
“저도 됐습니다. 선배님 취향은 하나도 안 궁금하고요. 우리 집 어때요? 귀기 같은 거 읽히세요? 심령 스폿 같아?”
내 취향은 강지헌이라느니 하는 개수작이 튀어나올까 봐 단호하게 차단했다.
“이혜준한테만 다정한 강-지-.”
이 다정한 강아지 새끼야.
“…….”
나직이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와 키득키득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이 남자는 내게 욕을 퍼붓고 싶을 때면 상황에 맞지 않는 칭찬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시발’ 거릴 때마다 더했다.
“내 느낌으론 너희 집 밝고 깔끔하기만 한데?”
영적으론 나보다 더 둔감한 이혜준이 감상을 전했다. 그럼에도 충분히 희망적인 대사였다. ‘우리 집은 흉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눈앞이 캄캄했던 내게는 동아줄과도 같은.
“넌 전역하고도 줄곧 방 비웠다면서 어떻게 책상 위에 먼지 한 톨 없지? 동생이 청소해 주는 거야?”
이혜준이 손가락 두 개로 길게 선을 그으며 책상 표면을 훑었다. 며칠 전 옷을 가지러 왔을 때 닦아 둔 보람을 느끼며 그의 손을 따라 흡족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책상 끄트머리에서 걸리적거리는 봉투를 발견하고는 인상을 팍 구겼다. 서창경의 본가에 돌려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왜 자꾸만 이런 걸 보내시는 거니? 결혼 예물도 아니고 보석 장신구가 다 뭐람. 지헌아, 엄마 정말 부담스럽거든?」
봉투에는 천만 원 상당의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차근히 살피니 책상 아래에는 뜯지 않은 선물 꾸러미도 보였다. 올해 초, 그러니까 내가 전역하기 전부터 시작된 저쪽 집안의 물량 공세가 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원래도 고용주의 부모는 내게 친절한 편이었다. 내 경우엔 고용주와 닮은꼴을 보면 싸한 기분도 들고 해서 특별나게 정을 주지는 않았지만.
식사 초대며 선물이며 용돈이며 부담스러워서 줄곧 거절했더니, 그들은 아예 목적지를 변경해서 물건을 우리 집으로 보냈다. 병원에 신세 진 바도 있고, 응하지 않으면 실례인 듯해 몇 번 받아들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오늘따라 내 앞으로 도착한 저 물건들이 단순한 호의로는 보이지가 않았고, 저주를 품은 함정의 일종이 아닌지 의심스럽기마저 했다.
“강이헌이요? 저 자식은 돼지우리 같은 자기 방도 못 치우고 살거든요? 가끔 집에 들를 때마다 내가 청소해 둬요. ……선배님, 정화는 어떤 식으로 하는 거예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리며 봉투를 내밀었다. 아래쪽의 쇼핑백도 눈짓했다.
“그렇게 싫은 얼굴 할 정도의 물건이야? 누구. 개천사가 준 거?”
“서창경 씨 부모님이요.”
“알고 지내는 사이였어?”
“예.”
“흠-……. 그래. 이런 허튼짓은 꿈도 꾸지 못하게끔 지하실 전기세도 내기 어려운 형편으로 만들어 드려야겠네.”
이혜준이 봉투를 받아 들며 뜻 모를 소릴 했다.
“네? 무슨 지하실?”
“너 지금 지내는 건물에 지하실 있잖아. 쓰레기 말로는 거기서 비상용 발전기까지 설치해 두고 장난질을 하고 있다더라고. 우선 거기 전력 공급부터 차단하려고.”
“안 돼요!”
미쳤나 봐, 진짜.
“뭐가?”
“큰일 나. 그 건물에 사는 나도 지하실엔 출입 금지거든요? 고용주한테 들키면 뒷감당은 어떡하려고요.”
이분이 아직 서창경을 만난 적이 없다 보니 겁이 없었다. 공숙선에게 전해 들은 말이 있을 텐데도 대응이 어수룩했다. 애초에 타인을 돕는 천사처럼 서창경을 미화하지 말걸.
“당연히 너는 출입 금지겠지. 나 같아도 강지헌은 지하실에 들여보내지 않아.”
이혜준이 발을 뻗어 쇼핑백을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들고 있던 상품권 봉투를 쇼핑백 안에다 처박듯이 툭 던져 넣었다. 어째 억지 선물을 받은 나보다 더 마땅찮은 기색이다.
“그건 또 왜죠?”
“왜긴. 강지헌 심장마비로 스물셋에 요절시킬 순 없으니까?”
“……! 와, 서창경. 뭐 또 수상한 거 갖다 놓았나 봐. 나는 거기 지하가 시체 보관실이라고 해도 놀랍지가 않거든요.”
개놈의 취미 중 한 가지가 병원 영안실에 혼백 거두러 가는 거였다.
“강지, 사람 시체는 무섭지 않고?”
“전혀요. 껍데기가 뭐가 무서워. 귀신이 무섭지.”
“흐음-…….”
이혜준이 방금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곤란해 보이는 기색으로 날 물끄러미 올려다보더니 그도 곧 일어섰다.
“오늘은 이쯤 하고 돌아갈까?”
“부적은? 정화는요?”
“내가 봤어. 오늘은 이만하면 돼.”
그렇게 간단히?
“언제요.”
“아까. 어머님께 ‘부적 대신 지금 찍는 우리 사진을 붙여 두시겠어요? 액자는 제가 맞춰 드릴게요.’라고 여쭈니까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시더라고. 위치 알려 주셔서 여섯 군데 전부 확인했어.”
와. 울 엄마와는 벌써 얘기가 됐다고? 사진 덕분에 부적을 떼어 놓게 생겼네.
이혜준에게 이런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아까의 셀카 촬영회를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봤던 사실을 반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