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온종일 귀신 생각만 하니까 귀신에게서 헤어나기 어렵다던 이혜준의 말을 떠올렸다. 그땐 누가 그걸 모르냐고, 입바른 소리만 해 댄다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는데.
“네 눈, 네 귀, 만지게 해 줄래? 닿기 전에 손 깨끗하게 씻고 소독도 할 테니까.”
부적도 무효화시키는 남자가 말하니 효과가 있을 것처럼 들렸다.
“그거면 돼요?”
“응. 나 진짜 아무 사심 없이 그저 만지기만 할 거니까 의심 안 해도 돼.”
뭔데. 내용이 되게 수상쩍잖아.
“예? 나 하나도 의심 안 했는데 별안간 막 의심이 생기려고 하거든요?”
“그 새끼 완전 사심 덩어리야. 절대 믿지 마!”
공숙선 본체가 내 의심을 뒷받침해 줬다.
“쓰레기, 안대 찢어발기기 전에 입 다물어!”
이혜준이 버럭 하며 길쭉한 다리를 뻗어 공숙선을 걷어찼다. 그가 이토록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기에 내 의심은 굳어져 갔다.
이 인간이 찔리지 않고서야!
눈동자에 칼을 세우고 째려보다가 표정 관리에 실패해 입술 사이로 삐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혜준의 하얀 얼굴에 발갛게 홍조가 피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도 어쩐지 볼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 ∞ ∞
꿈틀이처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던 이혜준은 곧 잠이 들었다. 저질 체력은 자면서도 춥다고 끙끙 앓으며 기다란 몸을 궁상맞게 옹그렸다. 실내 온도를 조절해 주고 싶었지만 리모컨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설치된 장치를 보니 중앙 냉방인 듯도 싶고.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붙박이장을 뒤져 봐도 이불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이사 선물로 이불을 주기로 했다.
중문을 나서니 소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부분이 돌아가고 하 비서와 젊은 남자 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혹시 이불 있어요?”
“예. 준비됐습니다. 지금 세탁실에서 건조 중인데 당장 필요하십니까?”
하 비서에게 물었는데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아, 이불도 있구나. 그럼 난 뭘 사 주지?
어머니가 화분이라도 선물하라고 했지만, 꽃을 다루는 이혜준의 솜씨로 볼 때 내 선택은 그의 안목에 미치지 못할 듯했다. 집에 화원까지 있다는 사람에게 식물을 선물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닌 듯싶고.
하여간에 다 가진 이혜준. 이불까지 가지고 있어. 내가 해 줄 게 없네.
“선배님이 춥다고 하셔서요. 세탁실은 어느 쪽이에요?”
낮잠을 잔다는 것까진 밝히지 않았다.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요.”
또 다른 비서인지 가사 도우미인지 모를 남자를 따라갔다. 세탁실 문을 열자 세탁기와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커튼을 전부 열어젖힌 너른 공간은 여름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였다. 자연 건조로도 빨래가 잘 마를 듯한 날씨였다.
동생 놈이 부러워할 만한 세탁 건조실이었다. 건조기를 구입하던 날, 어머니 아버지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빨래 당번 동생 놈 혼자 감격해서 눈물까지 글썽였단 얘길 전해 들었다.
집에 청소기를 바꿔도 그 녀석이 가장 좋아했다.
건조대에 널린 두 채의 이불과 수건을 차례대로 만져 봤다.
“이쪽은 다 말랐네요. 안으로 가져가도 될까요?”
“제가 옮겨다 드리겠습니다.”
“아뇨, 제가 할게요. 안 무거워요.”
옮기기 편하게끔 이불을 걷어 접으며 사양했다. 한여름에 무슨 차렵이불인가 싶었지만 서늘한 이 집 내부 온도를 떠올리면 저질 체력 누구에겐 필요할 것 같긴 했다. 나는 체질상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아서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럼 나머지는 건조되는 대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말투 왜 저러지? 며칠 전에 전역한 병장 김재원보다 더하시네.
불편한 마음이 들어 고맙다고 인사한 후 얼른 내실로 돌아왔다.
공숙선 본체가 이혜준과는 한 이불을 덮기 싫다며 생떼를 부렸다. 둘이 나란히 누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주제에 좀 웃겼다.
“아니, 같이 밤도 지샌 사이라면서 갑자기 왜 내외하세요?”
“모르면 가만히 있어! 어젯밤 내가 이 새끼한테 얼마나 시달린 줄이나 알아?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냐고! 나 눈 잔뜩 부은 거 안 보여?”
“아! ……그러셨구나?”
크크크크큭.
얘기로만 들었을 때는 이혜준과 공숙선의 조합이 물과 기름처럼 여겨져 상상이 가지 않았는데, 막상 내 눈으로 접하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이혜준 착하고 순해 빠져서 이 악랄한 놈에게 당하며 지낼 줄로 알았건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보였다.
두 분의 우정? 애정? 애증? 뭐든 하여간에 응원합니다. 큽.
“싫으면 다른 방에서 자요. 다른 데도 침대 놓여 있더라.”
“여기가 내 방이라고! 내가 먼저 찜했어!”
이 방이야말로 집주인이 사용할 안방으로 보이는데 역시 공숙선 본체, 염치를 말아먹었다.
하는 수 없이 퀸 사이즈 이불 두 채를 두 남자에게 각각 덮어 주었다. 대형 침대가 큼지막한 솜이불로 가득 들어찼다. 이런 소란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곯아떨어진 잠만보 집주인에게 경의를 보냈다.
이불을 찾으러 둘러보다가 발견한 서재로 갔다. 책은 꽂혀 있지 않았지만 텅 빈 책장이 삼면을 메우고 있어 이 공간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짐작이 되었다. 이혜준도 학생이고 공부를 해야 하니 공부방으로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는데, 본격적인 이사를 한 것처럼 보여 영 부담스러웠다. 임시로 머물 거처처럼은 여겨지지가 않아서.
서재 중앙에는 도서관에서나 볼 법한 다인용 책상이 있었고, 그 위에 [강지 거]라고 정결한 글씨체로 메모해 둔 물건이 놓여 있었다. 내 몫으로 빌려줄 거라던 태블릿 PC며 전공 서적이며 노트 등이었다.
정말로 챙겨 줄 셈이었네?
제 입으로 국어 문해력이 부족하다기에 만만하게 봤다. 그러나 별 기대 없이 넘겨 본 노트는 필기에 까다로운 내가 봐도 만족스러웠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강의 내용도 좋았고 글씨도 마음에 들어 학부 선배님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사이 여러 군데에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어머니는 여태 감격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이혜준을 두고 지금까지 만난 미인 중에서 최고라는 표현과 비슷한 문장들을 약 10분에 한 번씩 올리는 중이었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시지.
그래도 가족 채팅방이라 캡처해서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수고는 덜었다.
산공 과대에게서는 개강 총회 뒤풀이에 놀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산공 과잠까지 보유한 내게는 이제 와서 너희 과 아니라고 주장하는 행위가 무색하기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김재원이 오거나 말거나 내 본연의 전공 학과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무리였다.
김재원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리병에 든 액상 커피 사진을 보냈다.
산공김재원: [강지님 어서 와서 님의 콜드브루 챙겨가세요^^]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덫이었다.
나: [응 안 속아]
카페에 도착하는 순간 커피 한 병에 팔리는 알바 노예의 운명이 기다릴 것이 자명했다. 개점 직전이라 힘써야 할 일이 장난 아니게 많을 터였다.
산공김재원: [호빵이도 들러서 한병 받아갔어 친구야 안심하고 놀러오렴^^]
코웃음 치며 읽고 씹었다.
이혜준이 이 정도로만 야비했어도 염려할 일이 없을 텐데. 역시 사람들이 말도 붙이기 어려워하는 매서운 고용주를 상대하기에 그는 지나치게 느슨하고 순둥순둥한 감이 있었다.
김재원은 다른 종류의 커피 사진을 번갈아 보내며 테러를 저질렀고, 온종일 커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나는 깊은 우울감에 시달려야 했다. 선수를 교체해서 이 잔악한 놈을 고용주와 맞붙이고 싶었다.
당장 커피를 사러 뛰쳐나가고픈 욕구를 누르며 집주인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우리 동네에다 제 자췻집을 구하는 적극성과 성의를 보여 주신 분께 인사는 드리고 돌아가야 예의일 것 같으니깐.
간간이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책을 읽었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거실 너머 방에서 익숙한 알람이 울렸다. 저 알람 러버가 알람을 맞춰 놓고 때가 되면 일어날 거라 예상은 했다. 지금이 무슨 때인지는 모르겠다만.
“강지헌? 강지?”
일어나자마자 튀어나온 이혜준이 거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선배님, 나 이쪽 방이요!”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에 내 목소리가 웅웅 진동했다.
“여긴 뭐 하는 데야?”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집주인이 손님에게 자기 집 방의 용도를 물었다.
“아마도, 공부방?”
서재라고 하려다가 임시 거주자에게 책을 들여놓으라는 부담을 줄 듯해서 말을 바꾸었다.
“공부? 난 책상 필요 없으니까 네가 사용하면 되겠다.”
“선배님은 공부도 드러누워서 해요?”
“응. 엎드려서. 앉아서 공부하면 허리 아프잖아.”
뭔데? 농담 한번 던져 봤더니 진지하고도 무서운 대답이 돌아왔다.
오래 엎드리면 아픈 데에 그치지 않고 허리가 빠개질 것 같지 않나? 이 사람은 척추가 보통 사람 것과는 다르게 생겨 먹었나 보다.
“허리 안 좋으시면 서서 공부하는 작업대도 있던데요.”
“서 있으면 다리가 아파서 책 오래 들여다보기 어려워.”
“눕는 게 최고예요?”
이혜준이 ‘강지, 국제금융관리 좀 가져다줘! 침대 밖은 위험해!’라고 외치면, 내가 책을 찾아 나르는 가까운 미래가 그려졌다. 우스운 상황이지만 그 정도 시중이라면 충분히 들어 줄 의향이 있었다. 그 이상이라도.
“놀리지 마. 내가 그렇게까지 게으르진 않아. 움직여야 할 땐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거든?”
“잘 알죠. 하룻밤 새에 이 동네로 이사 온 행동력을 보면…….”
너 진짜 서창경과는 다른 의미로 미친놈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