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돌려보낸 선물도 떠오르고, 무슨 생각으로 묻는지 뻔하니까 부담스럽기만 했다. 폭풍 전야 같은 고요에 계획에 없는 소동을 불러일으키기 싫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지만.
─지헌아, 너 요즘 소극장에 붙어 있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지. 너무 잠만 자다 가는 것 같던데 그렇게 바깥으로만 나돌지 말구.
이혜준이 권장하는 특별한 행동 지침은 특별하게 굴지 말라는 거였다. 그래서 소극장 안에서는 가능한 한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소극장에 들어가기가 꺼려져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그걸 지적당했다.
CCTV라도 돌려보나? 내 귀가 시간을 어떻게 알고서.
「저야 늘 똑같은데요.」
일단 우기고 봤다.
─늦게 다니면서 우리 창경이 외롭게 하지 마, 얘.
자기 자식은 아예 소극장에 찾아오지도 않는데, 그 사실은 모르는 눈치였다.
「예? 사장님 같은 성격도 외로움을 타요?」
오래 함께 일한 조수에게조차 감추는 게 많은 그 지독한 비밀주의자가?
스스로 사람과의 교류를 차단하며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작자였다.
─얘가, 사장님이 다 뭐니. 너희 사이에 이제 형이라고 부를 때도 됐잖아.
형한테 일당 받고 알바 하는 취미 없는데?
「그 정도는 아닌데……. 서로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다르고요.」
─사고방식 같은 건 살 붙이고 살다 보면 금세 극복하거든.
「사장님하고 살을 왜 붙이고 살아요. 징그럽게.」
─하하. 말이 잘못 나왔네. 내 말은 둘이 정을 붙이고 살라고. 우리 창경이가 너만 보고 있는 거 알지? 잘하자?
「…….」
이 집안은 대놓고 응원하면서 자리 깔아 주는 거야?
황당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이토록 적극적으로 지지할 일인가도 싶었다.
─어쨌거나 달리 만나는 사람은 없다는 거지?
서창경도 그렇게 안 봤건만 서른 넘은 남자가 쪼르르 제 엄마 아빠한테 달려가 고자질을 한 모양이었다. 강지헌이 다른 놈하고 어울리지 말게 해 주세요, 라면서.
진짜 애도 아니고.
「사람 만나는 덴 관심 없고요. 혹시 대학로에 있는 건물이 신경 쓰여서 연락 주신 건가요? 그러잖아도 요즘엔 사장님도 거의 들르지 않고, 그 큰 건물을 저 혼자서만 사용하는 듯해서 굉장히 죄송하고 부담스러웠거든요. 나가 드릴게요.」
고의로 화제를 돌렸더니, 고용주의 부모는 깜짝 놀라며 아니라고 부인했다. 원한다면 그 건물을 내 명의로 돌려 주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우리가 남도 아니고 한 식구인데 뭐가 어떠냐며.
이 양반들이 돌았나.
나보다 이혜준이 더 기분 나빠하며 저도 제 자췻집을 내게 양도하겠다며 나댔다.
주긴 뭘 주세요? 엇, 뭐야. 이거 세 들어 사는 집 아니었어?
「투자할 가치도 없는 이딴 집을 왜 구입했어요? 돈이 썩어나?」
「가치는 개천사의 관심을 돌릴 거점 역할만으로도 충분하지. 개천사가 해코지하려고 사령을 보낸다면 목적지가 어머니 집보다는 네가 온종일 머무는 이 집일 거 아냐. 위험한 장소가 될 가능성이 큰데 임대했다가 내 볼일 끝났다고 손을 뗄 수는 없잖아. 어쩌겠어. 안전이 보장될 때까진 내가 책임지고 이 집 소유권을 쥐고 있어야지.」
내게 살을 날리고도 남을 개놈이라 이혜준의 말이 더욱 신빙성 있게 들렸다. 다음에 들어올 입주자까지 염려하는 그의 마음 씀씀이에도 조금 감동했다.
이틀 전에는 바비큐 파티를 핑계로 우리 집 식구들을 이혜준의 자췻집으로 빼돌린 뒤, 돌칼 정령을 본가로 보냈다.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긴 해도 이혜준이나 나나 둘 다 영감 제로이다 보니 집 안을 둘러싼 음기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어서였다.
요즘 어머니의 혈색이 유난히 맑아 보이는 건 음기가 옅어져서가 아니라 이혜준이 잘생긴 까닭인 듯했고.
혼자 감상하기 아깝다며 온 일가친척을 부르려고 해서 식겁한 적도 있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불러들여요. 엄마, 우리 집 흉가야!
다행히도 본가에 다녀온 돌칼 정령은 일단 우리 집이 귀신 출몰 심령 스폿 상태에서는 벗어났다고 말해 주었다. 감히 손대지 못했던 서창경의 부적도 그가 전부 회수해 주었다.
「음기가 빠져나간 공간에 희미하게 이혜준의 기운이 감돌긴 해. 어지간한 잡귀는 침범하지 못할 테지만 어둠의 신을 상대하기엔 그 정도 방어진으로는 부족하지.」
아무래도 돌칼 정령에겐 서창경이 어둠의 신쯤에 해당하는 존재인가 보다. 그냥 개놈 같은 사악한 인간을 통틀어 어둠으로 칭하는 듯했다.
서울 시장도 왕으로 부르는 돌칼 정령이기에 서창경을 신급으로 올려 쳐도 그러려니 했다.
「매일같이 방문했는데도 희미할 뿐이라고? 그럼 지금 이 집엔 혜준 선배님 기운이 얼마큼이나 깃들어 있어?」
자췻집이라며 구입한 건물에 대해 물었다.
「여기는 안전지대지. 이혜준이 둥지를 튼 터잖아.」
돌칼 정령이 이혜준을 무슨 영역을 가진 짐승 신처럼 비유했다.
「그럼 원래 선배님 집보다 더 안전한 거야?」
「그곳엔 나 같은 존재가 수두룩하게 도사리고 있으니 굳이 이혜준의 기운을 빌려서 집을 가호할 필요가 없지.」
합계 연식이 수만 년이나 되는 쟁쟁한 터줏대감들이 버티고 있어 서창경이 부리는 사령 따위가 함부로 드나들 만한 장소가 아니라는 거다. 알고 보면 거기도 찜찜한 귀신 집이라는 건데, 내 입장에선 차라리 사람 힘으로 지키는 이 자췻집이 거부감이 덜했다.
「그래서 처음에 선배가 날 그 집에다 데려다 놓으려고 했었구나.」
그때 얌전히 따라갔더라면 이혜준이 자췻집을 구하는 수고를 덜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돌칼 정령과 조금 친해지고 났더니 이런 성격의 귀신 무리라면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크게 무섭지도 않은데 같이 지내도 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했고.
「무신에 빠진 강지헌을 안심시키려고 한 소리겠지, 설마 평소 우릴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자가 진심으로 우리 힘을 믿고 널 맡기려 했겠어?」
「그게 무슨 뜻이야?」
「저승혼사굿이니 뭐니 하는 요식 행위 같은 건 믿지 않는 남자다. 그런데도 굳이 나와 엮어서 돌칼을 네 손에 쥐여 주려는 의도가 뭘까. 네 머릿속이 온통 귀신 생각으로만 굴러가다 보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그를 의지하고 따라 주지 않아서겠지. 이혜준에겐 따로 생각해 둔 저만의 방식이 있을걸?」
돌칼 정령이 말했다. 그 고자질을 증명하듯이 서로 추구하는 방식이 다름이 곧 드러났다.
나는 우리 집을 지킬 방어책을 마련하고자 공숙선의 본체를 불러내어 새롭게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이번에야말로 불침부로 집을 도배할 필요성을 느꼈으니까. 이천 살 가까이 묵은 고대 왕의 힘을 빌려 쓰는 부적이 서창경의 부적에 질쏘냐 싶었던 거다.
그런데 여기서 이혜준과 의견이 엇갈렸다.
「너는 부적을 막는 데에 또 다른 부적을 사용하고 싶어? 집에다 이런 걸 붙여 두고 의지하면 일생 무신에서 벗어나지 못해, 지헌아.」
그는 재앙의 근원을 없애면 된다고 우겼지만 서창경의 만행을 뭘 어떻게 저지하겠다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서창경이 취미 생활을 순탄하게 하지 못하게끔 자본만 앗으면 된다고 여길 정도로 순진하진 않을 테고, 이혜준이 생각해 둔 방식이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미덥지 않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어쨌거나 서창경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의 코빼기도 보지 못한 채 개학을 맞았다.
오늘은 소극장 지하실의 전원을 차단하는 날이기도 했다. 선전 포고였다. 우리 집이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젠 나의 탈출에만 전념할 시간이 도래했다.
서창경의 주술을 희석하는 덴 굿을 하거나 무속인을 끌어들여 야단법석을 피울 필요가 없었다.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해충 박멸 전문 업체에 방역을 맡긴 셈으로 매일같이 바퀴 약을 놓듯 이혜준을 데려간 것뿐이었다.
방어막을 공고히 하고자 당분간은 이혜준의 신세를 더 져야겠지만 일단은 정화 작업이란 걸 마쳤다.
나는 공숙선과 돌칼 정령이 직접 집에 방문해서 보증해 준 다음에야 겨우 시름을 거두었다. 이혜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신앙이 된 무신을 하루아침에 끊어 내긴 어려웠기에.
계획대로 아침엔 학교에 갈 채비만 하고 가볍게 건물을 나섰다. 내가 떠나려는 낌새를 터주 신에게 눈치 채이면 곤란했던 탓이다. 이삿짐은 오늘 수업이 없는 이혜준이 대신 옮겨 주기로 했다.
부적으로 뒤덮인 철옹성은 귀신을 막아 주는 안전 가옥이 아니었다. 이혜준이 내 눈을 씻어 주고 나서야 창과 문과 벽에 다닥다닥 붙은 수천 장의 부적으로부터 음산하고 흉흉한 기운을 전해 받았다.
그제야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속임하고자 넌 평소 하던 대로 지내라는 이혜준의 제안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혼자 지내기 끔찍한 하루하루였다. 전등을 환하게 밝힌 채로도 누가 지켜보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잠이 드는 데에 한참이나 걸렸다.
사정을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건물 안 풍경은 흉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여전히 청소 업체 직원은 들락거렸는데, 불길한 건물의 특색 탓에 그들은 상당액의 웃돈을 받고 계약했다. 부적을 비롯한 내부의 해괴한 상황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걸린 일자리라고 했다.
그 웃돈에다 웃돈을 더 얹어 주고서 이혜준이 캐낸 정보였다.
이혜준은 그들이 매수된 사실을 모른 척하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그 사람들을 보호하는 방도라기에 마주치면 언제나처럼 인사만 나누고 말았다. 어차피 오늘 이후론 안전을 위해 청소 업체 역시 작업하는 척만 하고 건물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 예정이었다.
결론은 오늘 이혜준은 혼자서 모든 짐을 날라야 한다는 거다. 옷가지는 주기적으로 교체해 왔지만 책은 그렇지가 않았다. 눈치 보며 전자책을 구입해야 할지 갈등하던 우리 집에서와는 다르게 거의 나 혼자 독식하는 소극장 건물은 공간의 제약이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책장에도 꽂히지 않은 종이책이 여기저기 바닥에, 내 키 높이보다 더 높게 탑처럼 쌓여 있었다.
게으르신 그분껜 그의 아이덴티티에 반하는 중노동을 부탁해서 미안하다고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다.
혜준선배: [강지야 나는 열심히 짐을 나르고 있어]
묻지도 않았건만 그분께서는 눈물 뚝뚝 이모지와 함께 메시지를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