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층마다 승강기가 설치돼 있다곤 해도 저 저질 체력으로 얼마나 낑낑대고 있을까 상상하니 안쓰러웠다. 모아 둔 책은 도서관에 기증할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 한들 바깥으로 물건을 빼놓는 작업은 이혜준의 몫일 테지만.
나: [무리해서 한꺼번에 옮기지 마시고요.]
나: [허리 다치니까 하체 힘으로 들어 올리세요.]
이렇게 설명한다고 알아들을까. 짐을 드는 요령도 없을 텐데 걱정이었다.
“강지 형, 그렇게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뭘 들여다보세요. 전에 말씀하신 여자 친구예요?”
“아니다.”
“오. 그럼 여친 놔두고 바람피우는 중?”
“유시호 학생이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구나? 경영대에 있기엔 아까운 인재신데요?”
우리 전공 필수 강의도 아니고 공과대의 ‘초급 스페인어 1’ 교양 수업에 얘가 왜 나타났는지 어리둥절했더니,
“그러면 상상력이 풍부한 인재가 모이는 산업공학과로 오세요!”
양심 없는 김재원이 이런 식으로 약을 팔았던 거다. 개별 과제, 개별 시험인 강의에서 어떡하려고 버스 태워 준다며 순진한 애를 꼬드겼는지.
게다가 지금 이 강의실 안에는 김재원과 나를 비롯해 외고 스페인어 전공 출신 동문이 쫙 깔려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학점도 거저먹을 겸 복학 후 두뇌 워밍업 차원에서 듣는 수업인 거지.
특히나 김재원은 전 가족이 스페인어 문화권에 터를 잡았고, 졸업 후에는 그 지역에 있는 국제기구 산하 대학원에 진학할 목표로 꾸준히 실력을 닦아 왔기에 원어민에 가까운 스페인어를 구사했다.
호빵이 얘는 상대 평가라는 사실을 알고나 들어왔을까?
“김재원, 님 인성 쓰레기임? 네가 뭔데 우리 학부 어린 새싹의 미래를 짓밟으려고 들어요?”
여러 가지 원인이 뒤섞인 복합적인 비난이었다.
“엇? 산공이 순한 맛 공대라는 얘긴 들었는데 거기로 전과하면 안 되는 거예요?”
김재원에게 속아서 수강 신청을 한 호빵이가 물었다.
“유시호야, 먼 미래는 둘째 치고라도 당장 이번 학기 네 성적이 걱정돼서 하는 소리거든.”
“헉, 왜요? 재원이 형이 나 캐리해 준다고 그랬는데!”
“캐리는 무슨. 그저 밑에 깔릴 깔판이 필요해서 널 부른 게 아닐까?”
“아니 이런, 벌써 밝혀지면 안 되는데! 수강 정정 기간 전에 나의 큰 그림이 들통나 버렸잖아?”
김재원이 내 고발에 호응해 아쉬운 표정을 연기했다.
이러려고 치킨 사 주고 밥 사 주며 저를 꼬드겼느냐며 울고불고 난리인 호빵이를 구경하며 우린 배를 움켜쥐고 낄낄댔다. 잠시나마 이혜준을 잊고 호빵이의 어수룩한 매력에 빠져 있을 때 그분에게서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혜준선배: [강지야 나는 네가 더 걱정이 돼]
혜준선배: [설마 내가 땀 뻘뻘 흘리며 짐 나르는 이 와중에]
혜준선배: [재원이하고 양쪽에서 유시호 끼고 앉아 재미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
헙!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심장이 쫄깃해졌다.
이 인간은 왜 이리도 감이 좋지? 천리안을 단 건 개놈이 아니라 이혜준이 아닐까?
무슨 벌 받을 행동을 한 것도 아니건만 배은망덕을 저지른 기분과 바람피우다가 들킨 듯한 뜨끔함이 뒤섞여 내 양심을 짓눌렀다.
이혜준이 정보 보안, 감시, 이런 데에 능한 IT계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엔 방심하기가 어려웠다.
한 번은 그가 남이 띄운 드론을 GPS 조작으로 가로채서 제가 사용하다가 도로 돌려놓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 주제에 “나보다는 야간 비행 하는 놈이 더 미심쩍은 거야. 국내에선 불법일걸?” 하며 기어이 그 드론 주인이 여성을 표적으로 삼는 사생활 불법 촬영 범죄자라는 증거를 확보했다. 자료는 전부 익명으로 경찰에 넘겼고.
지금도 이혜준이 어디에선가 지켜보는 중일 것 같아서 엄청 찜찜해졌다.
“어, 나, 멍구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저쪽으로 자리 옮길게.”
주섬주섬 필기구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구는 술을 마시면 사람 깨무는 버릇이 있는 고교 동창이다. 친구놈들은 술에 취했다고 녀석의 변태 행위를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멍구가 깨물면 개새끼 버릇 고친다며 그 수십 배로 응징해 줬다. 똑같은 방식으로.
나는 찝찝해서 다른 사람 피부에 입을 못 대겠던데 녀석들은 거부감도 없이 잘도 서로를 물고 빨았다.
그만 상상하도록 하자. 속이 안 좋다.
“님 애인 눈치 보는 거면서 불쌍한 우리 멍구 핑계 대지 마세요! 저는 강지 씨가 설마 공처가 재질일 줄은 상상조차 못 했네요. 큽-.”
사정을 파악한 김재원이 멍구를 편들어 주는 척하며 나를 약 올렸다.
이 자식아, 그렇게 너희 멍구가 불쌍하다면 멍구 별명 지어 붙인 너부터 반성해라.
“닥쳐, 김재원. 내가 분명 그런 사이 아니라고 했다.”
“에이, 다 넘어가 놓곤 왜 빼시죠?”
“…….”
흥.
능글거리는 김재원의 면상에다 코웃음을 돌려줬다.
“우와! 강지 형을 넘어뜨린 능력자가 있어요? 저 형 우리 학부 최강 철벽이라던데 어떻게 꼬신 거래요? 소개팅이 쏟아져도 끝까지 방어하면서 여태 그걸 한 번도 안 했대.”
“강지 저거 보기보다 허들이 낮아. 유시호 네 조건이라면 더 간단히 넘어오게 할 수도 있거든?”
“진짜요?”
“응. 겨울 다가오면 편의점에서 호빵 팔기 시작하잖아? 그럼 그때…….”
“아이 씨,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좀!”
등 뒤에서 호빵이가 열 받아서 김재원을 두들겨 패는 소리와 숨넘어갈 듯 낄낄대는 김재원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재밌게 노네. 부럽다.
나도 저들 사이에 끼어들어 호빵이의 폭주를 부추기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양심에 찔려서였다. 방금 그분에게 받은 메시지가 강력한 족쇄가 돼 작용했다.
“멍구야, 우리 전역 및 개강 기념 셀카나 한 장 찍을까?”
멍구 옆에 자리를 잡으며 증거(를 조작할) 사진을 찍자고 권해 보았다.
“님의 오랜 여보는 어떡하고 나를 붙잡고 그러셈? ……아하! 일루 와, 일루 와! 언젠가는 너희 커플도 깨질 날이 올 줄 알았다만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구나. 형이 위로해 줄게.”
내 어깨 너머 광경을 본 멍구가 제멋대로 로맨스 시나리오 한 편을 써 내려갔다. 자진해서 내 휴대전화를 가져가더니 셀카를 찍어 줬다. 결과물을 보곤 곧바로 후회하며 날뛰었지만.
“웩. 뭐야 이거! 블랙 앤 화이트도 아니고 네 카메라 화질 왜케 구려?”
화질은 멀쩡했고, 개강 날짜에 맞추어 아슬아슬하게 전역한 멍구의 얼굴은 볕에 그을려 시커멨다. 스포츠형 헤어스타일을 한 녀석은 어딜 봐도 전직 군인이라, 여러모로 발랑 까졌던 장발 병장 김재원과 비교가 됐다.
“워워, 삭제하지 마. 원래 불볕 아래선 사람 피부가 타는 게 정상이지. 바깥에 나온 지 석 달이 다 돼 가는 내 피부색하고 비교하면 안 되는 거잖아.”
멍구의 손에서 전화기를 낚아챈 다음 이혜준에게 사진과 함께 메시지를 보냈다.
나: [아닙니다. 지금 내 옆에는 이놈, 김멍구.]
혜준선배: [오 이름부터 완전 신뢰가 가는데? 얼굴도 안심이 되고 합격!]
역시 사람 보는 기준이 수상쩍은 인간이었다. 이 얼굴 어디가 어떻게 안심이 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물어보기가 망설여졌고, 그저 멍구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수업 마치고 밥이나 사 줘야지.
이혜준이 베푸는 수많은 고마운 부분들 중 한 가지가 내게 감정적 을의 기분이 들지 않게끔 해 준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동등한 동료의 느낌은 아니고, 나한테는 약간 저자세? 지금 같은 상황을 보면 진심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건 아니며 그가 저자세를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선 진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그 부분이 유시호라는 점에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누구나 잘생겼다고 인정하는 김재원과 엮으면 이해라도 될 텐데.
내가 호빵이 쟤하고 연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날 바람둥이 취급하지? 나 너무 억울하다고 진짜.
교수님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됐다.
“이 중에서 스페인어 배워 본 학생 있습니까?”
교수님의 질문에 몇몇이 손을 들었지만, 나를 비롯한 오랜 지기들은 결코 나대지 않았다. ‘아베쎄데’도 처음 들어 보는 척하며 열심히 초심자를 연기했다. 단체로 사기 치며 호빵이를 놀려 먹어야 더 재미있으니까.
첫 스페인어 강의는 두 시간 연강을 중간 휴식 없이 한 시간 조금 넘겨서 마쳤다. 휴대전화를 꺼내어 보니 예상대로 이혜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건 그 안에 든 내용일 뿐.
혜준선배: [점심 같이 먹어 내가 학교로 갈게]
뭐? 수업도 없는데 학교에 온다고? 미친 건가?
이 나태한 작자가 자꾸만 자아 정체성을 상실한 행동을 하려 들었다. 메시지를 보낸 건 한 시간도 더 전이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출발하셨어요?”
―도착했지. 너 약속 있으면 얼른 취소하고 와.
“뭐래 진짜? 인성이 참말로 훌륭하시네요.”
핀잔을 줘 봤지만 평소처럼 어떤 대미지도 들어가지 않았다.
―동감하고, 너한텐 이혜준하고 밥 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거 알지?
마지막 문장은 어느새 세뇌가 돼 버렸는지 크게 반발심이 생기지 않았다. 게으른 주제에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으려 드는 이혜준의 성실성만은 신비로워 보였지만.
덕분에 그와 줄곧 붙어 다니는 나마저 삼식이로 각성할 지경이다.
“내가 오늘 우리 멍구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점심 약속이 잡힌 바람에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
“어디로 가는데? 비싼 데 가면 나도 초대받는다.”
주체적인 김멍구가 함부로 자기 자신을 초대하며 끼어들었다.
“그분께선 시크릿 아싸님이라 처음 보는 사람하곤 겸상을 안 하셔. 인원수가 늘어나면 입이 달라붙어서 밥술을 못 뜨시지. 오늘은 참아 주라.”
짐작했던 사실이지만 이혜준은 낯을 가렸다. 우리 집 어른들 앞에서 기를 쓰고 사교적인 척하다가 돌아서면 탈진해서 끙끙 앓으며 드러누울 정도였다.
그 꼴을 볼 때마다 한심하고 웃기고 가엽고, 그의 100평짜리 자취방을 한시바삐 빼 줘야겠구나, 하는 생각만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 멀어져야 그 인간이 마음 편히 지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