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나는 이걸 해내지 못하면 마지막 소생의 기회를 잃는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이 절실함은 축귀 굿을 할 셈으로 무당을 찾았던 스무 살 당시와 다르지 않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곁에 ‘우리’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것은 수천 년 묵은 유물보다 더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언제 할까요?”
각오와는 달리 남의 결혼식 날짜를 묻는 듯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이사 기념으로 오늘 밤 어때.”
“아. 오늘은 산공 개총 뒤풀이에 가기로 했구요.”
떳떳한 답변은 아니기에 목소리가 약간 움츠러들었다.
“그럼 내일은?”
“내일 저녁엔 김재원 기숙사 동아리에서 개강 파티가 있어요.”
목소리가 좀 더 기어들어 갔다.
“이야아, 이분이 뭘 믿고 이다지도 여유가 넘치지? 네가 지금 남의 학과며 남의 동아리 모임에 가서 정신 놓고 술 퍼마실 때야?”
세상에. 내가 이 게름뱅이한테서 한심해하는 눈길을 받아 볼 줄이야. 지내다 보니 별 신기한 일을 다 겪는다.
그런데 이혜준이 하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한가하게 놀러 다닐 때가 아니다.
“전부 취소하겠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너도 스트레스 쌓이고 답답할 텐데 속 풀 데라도 있어야지.”
이혜준이 바가지를 긁다 말고 느닷없이 태세를 전환하며 이해심 넓은 척을 했다.
“……?”
“나도 같이 가자. 개천사가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수작 못 부리게끔 막아야지.”
“살 날리거나 사령을 보내서 나를 죽이면 죽였지 직접 찾아오진 않을걸요? 서창경 자존심 엄청 세요.”
“품위 잃고 질척대면서 자존심은 무슨.”
이혜준이 코웃음을 쳤다.
“…….”
개놈에겐 원래 품위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잃을 품위가 없었고, 과연 나한테 질척대는 걸까. 사귀어 주지 않는다고 협박하는 것도 질척거림으로 치는지 모르겠다.
고백 당한 당일엔 황당하고 불안해서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좀 찌질해 보이긴 했다.
한동안 고용주 얼굴을 보지 않았더니 그토록 무서워하던 서창경을 낮잡아 보는 소리까지 나오고 내 간덩이가 붓긴 부었나 보다.
“강지야, 나도 알고 보면 자존심 엄청 강해.”
이혜준이 별안간 심각한 얼굴을 했다.
“……?”
갑자기?
예의상 분위기를 맞춰 주려는 순간, 어젯밤 자췻집 주방에서 이혜준이 내 동생 놈과 더불어 야식 재료를 장만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분명 함께 장을 볼 땐 고구마가 있었는데 고구마튀김이 보이지 않았다. 삶은 달걀도 튀김옷을 입혀 조리해 준다더니 결과적으론, 없었습니다.
이 새끼들이 재료 장만하다가 식욕이 동해서 생고구마와 삶은 달걀을 모조리 먹어 치운 거였다.
경영 대표 미남 이혜준 선배님, 멀리서만 볼 적엔 고아하고 품위 넘치는 귀족남인 줄로 알았는데…….
나도 자존심 강하다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 주려고 했지만 머릿속으로 ‘겁나 자존심 센’ 이혜준이 생으로 고구마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 장면이 끊임없이 재생됐다.
오늘따라 그의 등신미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왜 웃어. 왜 자꾸 웃냐고. 난 자존심도 없는 놈처럼 보여?”
“아, 아파요. 꼬집지 마-.”
크크큽.
∞ ∞ ∞
시간이 흐르자 점차 등 뒤의 인골 무리가 의식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가져온 책을 꺼내어 읽었고, 이혜준은 노트북으로 프로그래밍 작업을 했다. 이런 구도도 이혜준이 밥 먹고 바로 소파에 엎드리려는 걸 내가 성질을 부려서 겨우 앉혀 놓은 거였다.
배가 부른데 왜 뒹굴고 싶을까. 배를 꺼뜨리고자 미친 듯이 움직이고 싶지 않나?
하여간에 나와는 다른 종족이었다.
집중해서 일하는 남자는 멋있어 보인다던데, 척추가 사라진 듯 흐물흐물 몸이 자꾸만 아래로 깔리는 이혜준의 자세를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드러눕고 싶다는 징징거림에 발차기를 날려 닥치게 한 것 외에는 별 마찰 없이 평온한 한때였다.
여느 때와는 다른 시간에 알람이 울렸다.
“이번엔 뭔데요?”
점심 먹고 후식 먹는 시간?
학습 효과로 말미암아 알람이 울리면 자동으로 어떤 메뉴인지 궁금해졌다. 이혜준다운 이유를 떠올렸지만 이번엔 내가 잘못 넘겨짚은 거였다.
“너 수업 시간 20분 전. 같이 나가자.”
“선배 나, 신입생 아니에요. 우리 전공 학부 건물 어디에 있는지 기억한다고요. 2년 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잖아.”
“너 전공 책 무거운데 혼자 어떻게 들고 가려고 그래?”
“잘? 내가 여기까지는 무슨 수로 들고 왔겠어요?”
“안 돼. 이번 학기 내 목표는 너 턱 두 개 만드는 거라고. 먹은 거 아깝게 힘쓰지 말고 편하게 차 타고 가.”
날 살찌워서 어쩔 셈인지는 모르겠어도 마음만은 감사했다.
전역 이후에 수상쩍을 정도로 몸무게가 쭉쭉 빠지고 살이 내려서 가족들도 병원에 한번 가 보라고 권할 정도였으니까.
당뇨가 왔는지 의심하기도 했다.
“편하게? 오늘은 선배가 운전해 주려고요?”
“뭐어-? 너 있는데 내가 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세상 다 산 표정을 짓는 게 너무 웃겼다. 이혜준은 나 운전시키는 데 진심인 인간이라 보유한 차량 세 대 전부에 보험 계약까지 들어 주기도 했다.
“아니이, 혹시나 해서 한번 물어봤을 뿐이니까 진정하세요. 내가 운전할게요.”
“가는 길에 내 사물함 위치도 찾아보자. 나도 오랜만에 복학해서 헷갈려. 나는 그냥 네가 이 연구실에다 책이며 개인용품 전부 놔두고 다녔으면 좋겠는데.”
입대하며 개인 사물함을 반납한 나와는 다르게 이혜준은 휴학 중에도 사물함 사용 기간을 계속 연장해 가며 유지 중이었다. 내 사물함을 배정받을 동안 그의 것을 잠시 나눠 쓰기로 했다.
“싫어요. 나 혼자선 무서워서 여기 못 들어와.”
이 방엔 혼자 있을 자신이 없어서 이혜준이 화장실 갈 때는 따라 나갈까 고민까지 했었다.
“에이, 안 되겠다. 내가 매일 학교에 나와서 여기 죽치고 있어야겠네.”
님 주제에 그게 가능함? 님 아버지하고 그분 제자들은 님이 일주일에 이틀 등교하는 것도 성공할지 말지 점심값 내기 걸고 계시더만.
진심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화제를 돌렸다.
“가는 길에 커피 마셔요. 나 수업 중에 졸릴 것 같아.”
그때 마침 호빵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호빵이: [강지형 재원이형 카페에서 형 몫의 커피도 내려서 받아왔어요]
호빵이: [공짜야 히히♡]
같이 보낸 사진에는 양 볼때기에다 테이크아웃 컵을 하나씩 갖다 댄 호빵이가 눈을 접은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헉. 미친! 귀, 귀여워!
아직 날이 더운데 뜨거운 커피라니 센스가 의심스럽지만 빵떡 같은 느낌이 더해져 하여간에 귀여웠다. 이거 찍어 준 김재원의 심장도 무사하진 못할 듯했다.
호빵이: [아아메보다 드립이 두 배 넘게 비싸대서 이걸로 부탁했어요]
호빵이: [진짜진짜 맛있어! 얼른 와요!]
나: [어 그랰ㅋㅋ]
정줄 놓고 헤실헤실 웃다가 지척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져 움칠했다.
“강지, 설마 그 사진 저장해 두려는 건 아니겠지?”
“어…… 설마요? 아하하.”
‘외안되이미친노마?!’라고 튀어 나가려는 반발을 가까스로 붙들어 맸다.
“지워.”
님이 뭔데요. 우리가 사진을 지워라 마라 할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러나 나는 여기서 싸가지 없이 선을 긋기가 어려웠다.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 주려는 것도, 사이가 불편해지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울릴까 봐 무서웠다.
윤상현만 해도, 새끼가 예고도 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당황해서 얼떨결에 결혼하겠단 약속까지 해 버렸는데 이혜준이 울면 나도 내가 무슨 등신짓을 할지 몰랐다.
나는 내 줏대가 미덥지 못했다.
“선배, 유시호 얘를 사람 아니고 그냥 애니 캐릭터라고 봐 주시면 안 될까요? 동글동글하고 머리통 큰 애들 있잖아요, 왜. 도라에몽이나 호빵맨 같은 거요. 선배도 나하고 합심해서 얘를 귀여워해 주면 되잖아요? 네? 네에?”
“되도 않는 애교 떨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그거 지워라.”
애교라고 한번 부려 봤건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이 새끼 나한테 반한 거 맞아?
∞ ∞ ∞
경영관 앞에는 1박 2일 여행을 통해 낯이 익은 조무래기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재수강하는 전공 과목을 함께 들을 후배 녀석들이었다.
쪽팔려. 다음부터 학고 뜨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
뒤늦게 결의를 다지기엔 재수강할 과목이 첩첩이 쌓여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 줄기차게 이놈들과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한다.
“우와, 벤츠! 강지 형 차 뽑았어요?”
운전석에서 내리는 나를 본 한 후배가 물었다.
“아냐. 이혜준 선배님 차야. 너희 강의실로 올라가지 않고 여기서 뭐 해?”
“강지 선배 기다렸죠!”
“형 온다고 해서 가방 놔두고 내려왔어요!”
1학년 애들이 내 주위를 방방 뛰며 환영 인사를 했다. 정신이 사나워서 기다린 이유를 물을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왜.”
질문은 등 뒤로 다가온 이혜준에게서 나왔다. 툭 내뱉는 듯한 말이 어째 평소보다 무뚝뚝하게 들렸다.
후배들이 주춤주춤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강지 선배한테 커피 사 달라고 하려고요.”
“우리도 유시호가 가져온 비싼 커피 마시고 싶어요!”
“카페 사장님이 형 절친이라던데 할인 안 돼요?”
녀석들이 내 뒤쪽의 기색을 살피면서도 꿋꿋하게 용건을 밝혔다. 내가 그때 섬에서 밥 사 주고 치킨 쏜다고 약속해 둔 터라 눈치 볼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이혜준, 무슨 악귀 같은 표정을 짓고 계시기에 이 녀석들 반응이 이러지? 지금 이 늙은이가 작년까지 고등학생이었던 애기들 협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