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확인차 흘끔 돌아보니 이혜준이 눈웃음을 살살 치며 천사처럼 웃고 있었다. 원래 학부 사람들 앞에선 영혼이 이탈하거나 먼 산 쳐다보는 표정이 나와야 하는데, 이러니까 더 수상쩍었다.
“안 돼. 그 카페 할인 혜택은 유시호 한정이지 아마?”
말은 이렇게 해도 부모님끼리 친하다 보니 한국 지점을 열기 전부터 파나마 농장에서 원두를 직송 받고 있었다. 게다가 김재원의 카페에 친구들을 데려가서 잔뜩 팔아 주라며 어머니한테 두둑하게 용돈까지 받아 뒀기에 할인 구매는 안 될 말씀이었다.
“지금 학교 밖으로 나가면 강의 시간에 못 맞춰. 다음 강의 전에 너희 인원수대로 들고 올 테니까 오늘은 편의점에서 마시고 싶은 거 골라 봐.”
사람들이 붐비는 큰 빌딩이지만 정문에서 가까운 이 구역엔 카페가 없었다. 말은 내가 하는데, 반걸음 뒤에 서 있는 이혜준이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내밀었다. 무심결에 언제나처럼 받아 들다가 보는 눈들을 의식하고 아차 했다.
“강지 형, 저 선배님한테 형 지갑 맡겨 놓으셨어요?”
“아냐. 혜준 선배가 주시기에 얼결에 받은 거거든?”
“이제부터 나를 ‘강지헌 지갑’이라고 불러 줘.”
부정하는 내 대답 뒤로 이혜준의 개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가 지은 별명도 꼭 저처럼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후배들에게 커피 사 주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왜 나까지 엮어요? 그렇게 부끄러워요?”
편의점 커피 한턱냈다고 무너질 경제력이 아니기에 지갑을 돌려주려다가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닌 테헤란로에 소재한 빌딩의 소유자분이시다.
IT 기업 방문은 처음이라 기대하고 따라갔더니 건물이 텅텅 비어 있었다. 초고층 빌딩은 아니었지만 열 명도 되지 않는다는 직원이 전체 공간을 사용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다.
「보통 사용하지 않는 층은 임대 놓지 않아요? 이렇게 빈집처럼 방치하면 내부 자재 다 삭아 내릴 텐데요.」
「보안 문제도 있고 다른 회사 사람까지 들락거리면 내가 일에 집중을 못 해. 세놓는 건 처음부터 고려하지도 않았어.」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는 주제에 지껄이는 변명이었다.
「와, 그럼 건물 전체를 귀사의 직원들로 채우시게요? 사업 확장! 선배 보기보다 야망이 있었구나.」
「아닌데? 여기서 더 인구 밀도 높아질 것 같으면 차라리 회사 문을 닫는 편이 정신 건강에 낫지. 인간 얼굴 보지 않아도 되는 쾌적한 사무 환경을 조성하는 건 나를 위한 복지거든.」
이 아웃사이더는 ‘인류 혐오증’ 이런 병에 걸렸나 싶었다. 호령도에서도 지구 사랑을 실천하는 바이러스가 인류 멸종에 실패했다고 안타까워하더니.
달팽이한테만 친절하고 말이야.
하여간에 임대료를 고려하지 않고 노른자 땅의 건물을 놀려도 될 만큼 돈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경제 관념 없이 인생 막살 거면서 경영학과엔 왜 들어왔나 모르겠다.
학부 전공 건물에 들어오니 당연하게도 대부분이 우리 학부 학생들이었다. 나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아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지만, 이혜준의 인기는 압도적이어서 내가 후배들을 데리고 편의점을 다녀오는 동안 접근이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슨 연예인 구경하듯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런 눈에 띄는 현상 덕분에 요리조리 방상시 눈깔을 잘 피해 다녔던 과거 생각이 났다. 이제는 나도 당당한 구경꾼의 일원으로서 이혜준의 인기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지금부턴 근처에 이혜준이 있어도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는 쾌적한 캠퍼스 라이프가 펼쳐지는 것이다.
‘강지! 강지야, 나 살려 줘!’
중앙에 우뚝 솟은 이혜준이 입 모양으로 구조 요청을 해 왔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그를 쳐다봐 줬다.
이야아, 내 눈에만 늙다리 선배지 미인은 미인인가 보다. 몇 년쯤 삭아서 복학해도 인기는 여전하시네요? 으흐흐.
사실 얼굴보다는 이혜준 특유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분위기 때문에 저토록 주목을 받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간에 기둥처럼 박아 두고 감상하면 너도나도 안정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게. 토템 신앙이 괜히 발생한 게 아니라니까.
∞ ∞ ∞
“지헌아, 나 너무 치여서 기력이 달려.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아.”
이혜준이 안색까지 파리해져서 비틀거렸다. 사람 많은 데에 가면 기가 빨린다는 소릴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과연 아싸!
주변에 이렇게까지 낯가림이 심하고 사회생활 하기 어려운 체질이 없어서인지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진짜 체력 뭐야. 운동 좀 해요.”
“업어 줘.”
“어딜! 저리 가. 저리 가요.”
동생 놈이었으면 발로 걷어차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을 텐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하는 수 없이 잡혀 줬다. 아무리 계약 조건이 업어 주기였다지만 그걸 공개적인 장소에서 들이밀 줄은 몰랐다.
매달리는 이혜준을 질질 끌고서 사물함까지 다녀왔다. 무수한 시선이 쏟아졌고 이혜준과 친하다는 소문이 학부에 쫙 깔리게 생겼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일일이 눈 맞춰 주며 상대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유체 이탈하지 않은 이유를 물어봤다.
“귀신 달라붙지 못하게끔 한 번씩 눈인사해 봤어. 예방 차원에서.”
“선배랑 미리 눈 마주치면 귀신 쫓아낼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시야가 환기되고 주술이 통하지 않는 효과는 알았지만.
“확신은 못 하겠고 홀릴 확률이 떨어지길 바라는 거지. 개천사 소굴 안으로 너 들여보낼 때마다 난 내 눈을 너한테 떼어 준다고 생각했거든. 비슷한 효과가 나지 않을까?”
매일같이 내 눈과 내 귀를 씻어 주던 그가 말했다.
덕분인지 스스로 무서워서 움츠러든 것 말고는 딱히 의심스러운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학부생들한텐 왜요? 공숙선 씨가 나 때문에 이 건물도 터가 흉흉하게 변했대?”
“아, 강지헌 또 땅 파기 시작한다. 뭐가 너 때문이야. 건물도 아무 상관 없어. 개천사가 보내는 것이 사람한테 옮겨 붙어서 너한테 해코지할까 봐 염려하는 거지.”
“빙의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건 서창경 방식이 아니라니까요. 사령을 살아 있는 사람 몸에다 집어넣는 건 본 적도 없고요. 원거리로 살 날리는 게 특기예요. 그 인간은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날 해칠 수 있거든요.”
강지헌 사주, 강지헌 혈액, 강지헌을 대체할 주술 도구, 저주에 필요한 모든 걸 완비한 상태였다.
“지금부턴 방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개천사 손발이 돼서 전국 곳곳에 파견 나가 작업해 주던 알바생이 사라졌잖아. 공숙선 씨도 개천사를 거드는 척하며 헛짓거릴 하고 있고.”
의외였던 건 공숙선이 서창경의 부모와도 안면을 트고 지내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식이 무슨 짓을 하며 지내는지 모른 채 무턱대고 자금을 대 준 것이 아니었던 거다.
공숙선을 불러 대놓고 강지헌의 조력자가 누구냐고 캐물었다고 한다. 사람을 붙여 보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발된다고.
귀신의 힘을 통하지 않고 이혜준을 찾는 건데도 여태 그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경찰청에서 깔아 둔 교통 CCTV까지 제어하는 인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창경의 부모가 접촉하는 용역 업체가 어디인지, 어떤 거래가 오가는지, 자금 이동을 비롯한 모든 정보가 우리 손안에 들어왔다.
내가 서창경의 소굴을 빠져나온 오늘부터는 이쪽도 반격에 들어간다는데, 사람보다 귀신을 더욱 겁내는 나일지라도 이혜준이 내 아군이다 보니 은근히 기대가 됐다.
무신과 인간의 대결처럼도 여겨졌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내가 무신으로부터 좀 더 빨리 헤어날 계기가 될 듯도 했고.
“그래서 산공 뒤풀이에도 따라온다고 했던 거예요? 사람들 눈 확인하려고?”
“응. 예전의 너처럼 수상쩍게 굴 테니까 표가 날 거야. 내 근처로 오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 줘.”
내 주변에 귀신 든 사람이 있을 거라는 말에 경각심이 싹텄다. 그런 이유로 이혜준이 강의실까지 동행했고,
“저것 봐. 귀신 붙은 인간은 바로 표시 나잖아. 쟤 누구야?”
이혜준이 복도 모퉁이를 돌아 황급히 사라지는 뒤통수를 가리켰다.
“……. ……쟤요?”
쟤 호빵이잖아. 님이 세운 빙의 가설이 참 개떡 같아질 위기인데요?
경각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구심이 들어찼다. 남의 집에다 지박령을 배달하는 무식한 선무당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혜준에게로 넘어갔던 신뢰의 감정이 19.2% 정도 증발했다.
“어, 혜준 선배님! 선배님도 오실 줄 알았으면 커피 하나 더 받아 오는 건데. 그건 그렇고 여기 내 자리니까 비켜 주세요.”
화장실에 다녀온 호빵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상시와 눈을 마주했다.
이혜준 진짜, 멀쩡한 애한테 귀신이나 씌우고 말이야. 조마조마했잖아.
“싫어! 너는 저기 빈자리에 가서 앉아.”
대학원생에게도 선배라고 불리는 이혜준이 대선배가 돼서는 1학년생을 상대로 반성의 기미도 없었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착 끼며 배짱을 부렸다.
뭘 잘했다고 이리 당당하시지? 님, 너무 늙어서 노망듦?
“뭐래, 이 아저씨가. 싫긴 뭐가 싫어. 곧 수업 시작하는데 후배 자릴 빼앗아 앉아서 뭐 하려고요? 얘들아! 끌어내자.”
장난칠 타이밍이란 걸 알아챈 후배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뻗대려던 이혜준이 질질 끌려 나갔다.
“강지, 니가 나한테 어떻게!”
“살려 줘어-!”
“복수할 거야!”
이혜준이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우와, 경영 남신은 인외 존재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 인간미가 철철 넘치네요?”
“그러게. 점잖게 생기셔서는 되게 웃기시네.”
“호령도에선 말씀 거의 안 하시고 완전 근엄 진지 캐였는데 전부 콘셉트였나 봐.”
이혜준의 참모습―개그 캐릭터―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늘어난 듯해서 나도 흐뭇했다.
“그래. 너희 이제 얼굴만 보지 말고 저분의 능력도 좀 봐 줘. 개그 얼마나 잘 치신다고. 암것도 안 하고 드러누워서 숨만 쉬어도 웃길 줄 아는 선배님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