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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69)화 (69/96)

69화

「생수에다 환각제도 타 보고 영이 보이게끔 단련시키고는 있지만 쉽진 않네요. 애초에 이쪽으로 감이 발달한 인물은 아니니까요. 소질이라면 오히려 우리 터주님 꿈을 자주 꾸시는 사모님한테 있을 듯한데 시험 삼아 한번 아드님을 만나 보러 오시겠어요?」

「어, 어딜요? 나더러 거길?」

들어가는 족족 사람이 죽어 나가는 그 건물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라고?

공숙선의 권유에 어째서 육친이 아닌 강지헌의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지, 자식에게 서운하던 감정이 쏙 기어들어 갔다.

「왜요. 아드님을 못 믿으시겠어요?」

공숙선이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임원주를 키들거리며 조롱했다.

「그, 그건 아닌데……. 믿죠. 우리 창경이 믿고말고요.」

「그런데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이에요. 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땐 누가 그 앨 챙기나요. 앞으로 누가 그 건물 유지비며 사람 쓰는 비용을 대겠느냐고. 남편은 이제 슬슬 버거워진다네?」

「병원장님이 힘드시다고?」

「예. 병원을 물려받을 자식이라면 창경이 동생들이며 빈자리를 대신 채울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아쉬움이 옅어진 거죠.」

서창경에게 전해질까 봐 겁을 집어먹고 늘어놓던 변명은 점차 협박으로 바뀌었다.

네가 어미한테마저 해코지를 한다면 널 도울 조력자는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남편을 방패 삼아 앞세웠다. 부모가 지닌 생기마저 탐이 난다면 네 아버지부터 잡아먹으라고.

삼대째 유명한 종합 병원을 경영해 왔다기에 대단한 집안인 줄 알았더니만 병원장 자리나 물려받는 월급쟁이였다. 대를 이어 원내 사업이며 이것저것 해먹은 건 많아서 재산은 풍족했지만 병원 재단 소유주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여기까진 그저 불만이 있는 정도였고, 정작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임원주 부부의 불화가 시작된 계기는 재단 소유주 집안의 막내딸이 오랜 해외 생활을 접고 귀국하면서부터였다. 위의 형제들이 그룹 계열사를 나눠 가지듯 두세 자리씩 겸직하던 것과는 다르게 그 집 막냇자식은 핵심 사업에서 벗어나 복지 재단 이사장직만을 맡게 됐다.

임원주의 남편이 근무하는 병원이 그 관할 아래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오빠 동생 하며 알고 지내던 사이야.」

「그 집안 사람들이 설립 초창기부터 우리 병원을 이용했다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네.」

남편은 집안끼리 가깝게 지낸다는 뉘앙스를 주고 싶은 모양이나 임원주도 그동안 지켜본 바가 있었다. 선대에는 끈끈한 친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고용 관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따로 경영 수업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일반 사업체하고는 달라서인지 재단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더라고. 나한테 많이 의존해.」

「그건 잘됐네. 여태까지처럼 우리가 전부 좌지우지할 수 있단 말이잖아.」

「어. ……남편은 교포 출신 고고학자라는데, 회장님이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고 욕하는 걸 들었어. 결혼할 때도 심하게 반대했다더라고. 이번에 둘이 이혼시키려고 한국으로 불러들였다는 얘기가 들리더라. 건강 검진할 때도 남편하고 자식은 데려오지 않은 걸 보면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

이때부터 기미가 수상쩍더라니 얼마 후 남편은 임원주더러 헤어져 달라고 요구했다. 그가 재벌가의 일원이 되려면 임원주의 존재가 방해가 된다는 황당무계한 소리가 이어졌다.

대를 이어 하수인 노릇을 해 온 가정사 탓에 남편이 그 집안에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를 임원주도 이해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배우자에게서 내 앞길 막는 저년이 어서 뒈져 줬으면 좋겠다는 눈길을 받고 살면 이쪽도 악만 남을 수밖에.

임원주도 남편이 그보다 먼저 죽어 줬으면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사장은 재단 산하 병원장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었고, 귀국한 지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그 가정의 이혼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회주의자 등신 새끼가 헛물을 켜는 바람에 부부 사이의 골만 깊어진 해프닝이었다.

얼마 후 전역한 강지헌이 소극장 건물에 정착하면서 산 사람을 끌어들여 먹이로 삼던 서창경의 만행은 멈추었다. 목표물에게 의심받을 짓을 하지 않으려는 듯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그것만으로도 부담이 덜고 감사할 일인데, 제상에 올라갈 최종 제물은 제 손으로 제사상을 차렸다. 스스로 죽을 무덤을 파 주었다.

강지헌은 만신 조상희에게 대적할 법사며 도인들과 접촉하며 준비물을 모았고, 호령도에 가서는 제 몸에 붙은 귀신마저 떼어 놓고 돌아왔다. 이렇듯 능력 있는 제물이 성실하게 움직여 주니 서창경은 그저 터를 지키며 지시만 내리면 됐다.

이즈음엔 공숙선이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잘해 주었고, 서창경도 더 이상 굶주린 아귀의 모습으로 임원주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올해 안으로 무사히 강지헌을 제상에 진상하며 마침내 서창경의 혼백을 걷어치울 수 있을 듯 보였다.

임원주 부부는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 매달리는 성품들이 아니었다. 큰아들이 사망할 당시엔 감정에 북받치고 자식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뭐든 해 줄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러나 지난 몇 개월간 무슨 일이 벌어졌나. 사람 수십이 죽어 나가고, 비용은 들 대로 들고, 소득은 하나도 없었다. 주고받는 거래가 아니라 이쪽이 무조건 갈취당하는 방식이었다.

무엇보다 그들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는 재앙이었다. 뒷바라지가 감당되지 않았다.

이미 두 사람의 머릿속엔 서창경이 자식이라기보다는 악귀로 각인돼 있었다. 시키는 대로 섬기지 않으면 해악을 끼칠 존재.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르니 이제 와서 손을 떼기도 두려웠다. 천도든 뭐든 하루빨리 서창경을 보내고, 그의 사후에 일어난 사건을 모조리 덮어 버리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서창경이 말했던 ‘그날’을, 제물이 죽는 날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제대로 덫을 쳐 두었기에 제물이 도망칠 염려는 하지 않았다. 제물은 서창경을 제 생명의 은인이며 저를 지켜 줄 구원자라고 착각하면서 고마워했으니까.

그런데 2주일 전쯤부터 이상한 조짐이 하나둘 보였다.

강지헌은 여전히 해가 저물면 꼬박꼬박 소극장 건물로 돌아오긴 했다. 하지만 더는 서창경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마치 서창경이 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공숙선을 불러 무엇이 잘못됐는지 추궁했다.

「쟤 왜 정상처럼 행동하죠? 정신 돌아온 건가? 저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잘 망가져 가다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물어봤다.

「터주의 영향력이 조금 약해진 것뿐입니다. 사모님 부부가 전처럼 사람을 들여보내서 공양하지 않으시니까요. 정성이 부족해요.」

공숙선이 서창경의 넋두리를 전하며 제물을 더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지헌이가 있잖아요? 저 아이 생기를 빨아먹으면서 지낸다며.」

그 증거는 전역 후 급격히 안색이 나빠지고 비쩍비쩍 말라 가는 강지헌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식욕도 없이 계속 물만 찾는 것도 아들이 죽기 전 보이던 행동과 유사했다.

둘이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그럼에도 강지헌의 의식을 교란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귀안을 틔우고 반귀신으로 만들고자 소극장에 들여보내는 생수병에 주사기로 LSD를 주입했다. 환각을 보도록 말이다.

제상에 올리기 전에 강지헌이 죽어 버리면 낭패이므로 주의를 기울여 왔는데, 지금부턴 투여량을 더 늘려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서창경은 그와 강지헌의 혼례에 앞서, 중간에 제물을 하나 더 끼워 넣어야 한다고 했다. 강지헌의 두 번째 영결식 상대였다. 현재 그 제물을 물색 중이었다.

공숙선의 입에서도 임원주의 고민과 비슷한 맥락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아직은 살려 둬야 하니까 생명엔 지장이 없게끔 살살 다룹니다만 우리 터주님에겐 강지헌의 생기 하나론 모자랍니다. 요즘 건물에 들여보내는 사람들을 바치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웃돈 주며 간신히 계약한 회사라고요. 예전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주긴 어려워요.」

소극장을 맡았던 용역 업체마다 직원 전원이 사망하며 차례차례 문을 닫다 보니 입단속을 해도 수상쩍어하는 눈길이 쏠렸다.

건물 내부가 부적으로 뒤덮였고 지하실에는 관도 놓여 있더라, 냉동 장치까지 해 둔 걸 보면 관 안에 진짜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소문도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강지헌의 문제가 아니라 서창경의 영향력이 줄어든 거라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효를 아는 자식이라면 죽어 귀신이 돼서라도 부모에게 이득을 주어야 마땅한 것을, 쓸모없이 공포심만 자극하는 그 힘은 거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임원주를 원망하듯이 꿈자리가 다시 사나워졌다. 이번엔 강지헌도 함께 꿈에 등장했다. 장소는 매번 소극장 건물로, 서창경의 영역.

얌전히 건물에 붙박여 있겠다는 서창경의 요구를 들어준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지금도 끔찍해 죽겠는데 저게 돌아다니는 귀신이라면, 제 부모가 사는 집까지 들락거리는 귀신이 됐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

건물 정문 유리를 사이에 두고 강지헌은 바깥에, 서창경은 안쪽에 서 있었다. 서창경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꼬박꼬박 제 무덤으로 돌아오는 제물을 대견해한다는 얘길 전해 들었건만, 그 말이 거짓인 양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원수를 쳐다보듯 핏발이 서린 눈으로 강지헌을 노려보고 있었다.

꿈을 통해서 본 강지헌은 언제나와는 다른 행동을 취했다. 로비 현관에서 꾸물거리는 법이 없었는데 한자리에서 길게 시간을 보냈다. 감시 카메라 속의 서창경과 대화를 나누던 때처럼 강지헌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상대했다.

인형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가 생소하게 다가왔다. 순종하는 제 주인 앞에서도 짓지 않던 환한 웃음이었다. 온전히 마음을 터놓은 사람에게나 지을 법한 자연스러운 표정에선 경계심 한 톨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저렇게 신뢰 가득한 얼굴로 웃을 줄도 아는 아이였네. ……상대는 누굴까? 창경이는 왜 이런 꿈을 지어내서 보여 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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