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예전에 그에게 섭섭하게 했던 기억도 떠오르고 무심하게 대한 내가 나빴다고 반성 중이었건만, 결국 그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신을 인간의 잣대로 판단하고 말았다.
“에이, 앞으로 영결식이 두 개나 더 남았잖아요? 나! 나! 나 예전부터 그거 되게 주관해 보고 싶었거든요. 예? 나 시켜 주면 안 돼?”
지리교육이 테스트용 실험 동물을 바라보는 눈으로 달려들었다. 줄곧 서창경의 모르모트 역할을 해 왔기에 저 눈빛이 말하는 바를 모르지 않았다.
자기 오컬트 취미 활동을 즐기게끔 몸 좀 대 달라는 거지.
업보로 돌아온다며 나를 나무랐지만, 정작 업보를 두려워하는 인간이라면 저럴 수는 없었다.
“누구랑? 같은 귀신하고 두 번 더 하라고?”
혼사굿을 주재할 공숙선이 대기 중이며, 두 번째 혼인 상대 역시 정해졌다고 밝힐 생각은 없었다. 이혜준에 관련해서도.
“그렇죠. 지원자가 코앞에 있는데 애써 멀리서 찾을 필요가 있나?”
이놈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특히 윤상현은 호령도에서 이혜준과 두 번이나 눈을 마주치고 그로 인해 주술이 풀렸으면서도 여태 그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했나 보다. 이혜준으로 말미암아 떨어져 나간 신령은 두 번 다시 같은 몸에 붙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공숙선의 전 몸주였던 잡신 역시 내쫓긴 후론 소식이 없었다.
단번에 나가떨어진 공숙선의 전 몸주와는 다르게 윤상현은 두 번이나 시도해야 했다. 내가 꼬박 한나절을 실신해 있을 만큼 여파가 크기도 했고.
만신 조상희가 보조한 탓인 줄 알았더니 놈의 집착도 단단히 한 몫 한 것처럼 보인다.
개놈과 마찬가지로, 윤상현에게도 이혜준의 존재는 알 수 없는 ‘미지’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개놈과 윤상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배신을 손바닥 뒤집듯이 하고 강지헌에게 연연하는 점 말고도, 무언가 핵심적인 부분을 빠뜨리고 지나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싸구려 무당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기껏 윤상현 같은 잡귀나 몸주로 모시려고?”
지리교육을 말리고자 고의로 그의 자존심을 긁었다. 귀신이 찾아와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니 조금이라도 더 신력이 강해질까 싶어 마음이 흔들렸겠지.
“하하. 웃기지 마요. 누가 허주 잡신 따윌 몸주로 삼아. 신령을 모시는 건 내 체질상 맞지도 않거든요? 그저 장기짝으로 삼아서 내가 짜 놓은 판 위로 출전시키려는 거예요. 내 역할은, 이를테면 식신을 조종하는 현대판 네크로맨서 같은 거죠.”
지리교육의 모습 위로 개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귀신을 불러내서 사령 부리는 놀이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산 사람도 인형 취급하며 망가뜨리고 싶은 날이 올 것이다.
호령도의 토지신처럼 밟아 없앨 수도 없고, 이 새끼의 귀신 사랑을 어떡해야 사그라지게 할 수 있을까.
일단 이혜준에게 보여서 윤상현의 혼백이라도 떨어뜨려 놓을까 싶었다. 더 이상 취미용 실험 재료 취급은 사양이다.
“그러잖아도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데 나하고 같이 올라가요. 학식 아니야.”
“우리 둘이서 영결식 계획을 세우는 거예요?”
지리교육이 기대감으로 눈을 번뜩였다.
“아뇨. 한 사람 더 있어요. 선배님도 아는 사람이니까 편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난번에 기숙사에서 만난 우리 과 대표 미남 알잖아요.”
“아…… 경영 남신. 그날 좀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두 사람 먼저 돌아가고 나서 술자리 놀이 삼아 애들 재미있게 해 주려고 창혼을 했거든. 분신사바 비슷한 거 말이에요.”
기숙사 방에다 제 손으로 귀신 막는 호신부를 붙여 놓고선 귀신을 부르는 희한한 새끼였다.
무슨 방패와 창의 시합인가?
“부적 때문에 소용없는 일 아니에요?”
“에이, 부적 가지고 그렇게까지 철통 수비는 하지 않지.”
“어, 말이 다른데?”
유시호며 다른 룸메이트들을 안심시키고자 효력도 없는 부적을 귀신 불침부라고 속여 왔나 했더니,
“가끔은 가위도 눌리게 하고, 또 가끔은 헛것도 봐야지 애들이 나한테 더 의지하고 내 말을 잘 듣죠.”
이런 속셈이 있었다.
“…….”
이거 완전 개놈이네.
하도 어처구니가 없으려니까 말문이 막혔다. 불쾌한 기시감이 드는 것이, 서창경도 날 길들일 때 무지한 나를 상대로 이따위 짓을 시도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날은 뭐가 잘 안되더라고. 귀신이 우리 방엘 못 들어오더라고요. 내 뜻대로 조종되지 않았어요. 자존심 상하게 애들한테 아마추어라고 놀림이나 받고 말이야. 그래서 처음엔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공대 미남을 찍었거든요? 저 자식이 신기를 감춘 채 내 힘을 누르는구나, 나보다 더 세구나, 하면서 의심했단 말이죠.”
산공 김재원 의문의 1승.
“그러면 계속 의심하시지 지금은 왜 우리 학부 선배님 쪽으로 혐의를 두게 됐어요? 내가 알기론 그분 신기 하나도 없는데? 그쪽 방면으론 나보다 더 둔한 사람이에요.”
이혜준이 언급되자 단번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지리교육을 보면서 그가 누굴 경계하는지 짐작했기에 하는 소리였다.
“내가 잘못 짚은 걸 이 친구가 알려 주더라고. 공대가 아니라 경영 쪽이 범인이었다네? 어찌나 영력이 강한지 강지헌 씨 옆에 누가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 친구 눈으론 전혀 볼 수가 없다네요. 정체를 모르겠대. 하여간에 엄청나게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서 이 친구도 가까이 갈 수가 없으니까 나더러도 접근하지 말라더라고. 말해 봐요. 그날 경영 남신이 우리 방에다 뭐 해 놓고 갔죠?”
윤상현은 불길하다면서도 저를 내게서 떼어 놓은 인물이 이혜준이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꿈에 나타났을 때도 내가 이혜준과 팀을 이뤘다는 사실을 모른 채 혼자 싸울 나를 도울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직접 당하고도 왜 혜준 선배를 볼 수 없다는 거야?
“뭐를요. 그 선배님은 진짜 무신하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세요. 선배님 방이 여태 귀신 불침 구역은 아닐 거잖아요?”
우리 집을 정화하느라 이혜준이 방문한 횟수를 계산하면 그 기숙사 거실에 잠깐 앉아 있었던 걸로 아직까지 지속 효과를 낼 리가 없었다.
“지금은 괜찮죠. 좋아졌어요.”
지리교육의 ‘괜찮음’은 일반인의 그것과는 달라서 귀신이 잘 찾아든다는 얘기였다. 이놈을 룸메이트들과 계속 붙여 뒀다간 큰일을 치를듯한 예감이 들었다.
「선배, 이 호실엔 부적 붙여 둬서 귀신 못 들어오니까 안심하고 자고 가요.」
이 개쓰레기를 철석같이 믿고 사는 유시호가 떠올랐다. 나 역시 부적으로 뒤덮인 소극장 건물을 안전 가옥 철옹성으로 믿었던 적이 있기에 배신감이 더욱 투영됐다.
“것 보세요. 그날만 잠깐 선배님 주술이 안 통했나 보지. 컨디션 문제지 이혜준 선배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 그 이름이었지. 나 기억력이 나쁜 편이 아닌데 그 사람 이름은 시호한테서 몇 번이나 들어 놓고도 자꾸만 까먹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얼굴도! 한번 보면 절대 잊힐 리가 없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 가물가물해.”
응. 그건 네가 지금 귀신에 씌어서.
사령을 부리는 네크로맨서를 자처하며 결코 무당은 되지 않을 거라는 네가 도리어 사령에게 잡아먹힌 상황이라서 그런 거잖아. 네가 꼭두각시 인형이다, 이 멍청한 새끼야.
“빙의 조심하세요. 곧 몸도 내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내가 주인님이라니까? 이 친구는 내 사역이라고.”
지리교육이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다.
고용주가 이혜준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얘길 들었을 땐 세상에 뭐 그런 믿기지 않는 일이 다 있나 했는데, 그 기적 같은 행운이 지리교육에게도 이어지는 걸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놈처럼 서창경도 소극장 건물 터주와의 힘겨루기에서 지고 잡아먹힌 걸까.
오늘 아침 그 터주의 뿌리를 뽑아 본가로 옮겼다는데 그럼 이제 서창경은 터주의 구속에서 헤어나게 되는 것인지, 결국 이혜준의 행동이 서창경을 도운 건 아닌지, 챤 발름 요팟은 신령임에도 이혜준을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혜준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공숙선 본체의 몸을 받고 실체가 생긴 덕분인지, 이리저리 구멍 난 조각을 짜 맞추느라 머릿속이 번잡했다.
“재미있네. 한번 시험해 볼까요? 우리 선배님 이름이?”
“어, 그게……. 그게 어떻게 되느냐면…….”
지리교육의 눈빛이 몽롱해지면서 입만 벙긋벙긋했다.
생각보다 심각한데? 어서 혜준 선배에게 보이고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 내게 한 다음 정신을 차리게 해 줘야겠다.
윤상현 새끼, 흉신으로 거듭나려나? 왜 애먼 사람한테 달라붙어서 날 귀찮게 하지.
“같이 갑시다.”
“하하. 안 속아요. 윤상현 씨가 그 경영대 남자를 멀리하라고 했다고.”
내가 가진 ‘미지에 대한 공포심’을, 신령들은 이혜준을 대상으로 감지하는 것일까?
나와 마찬가지로 실체 없는 존재를 상대로는 이기기가 어렵다는 무력감도 늘 따라오는지 궁금했다.
아, 혜준 선배가 실체 없는 존재들과 굳이 이기고 지고 싸울 필요가 없다고 했지. 있으면 있는 것.
“그럼 연락처라도 교환해요. 나 도와주겠다며.”
“좋아요.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이거 가져가요. 내가 만든 향낭이야.”
지리교육이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호부예요?”
지리교육의 환심을 사고자 스스럼없이 받는 척했다. 예전 같으면 재수 없는 물건 떠넘기지 말라며 발악했을 텐데, 정화해 줄 사람이 있다 보니 그 정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받아서 곧장 버릴 수도 없는 것이 이런 물건은 함부로 버리는 게 더 위험했다. 누가 주워 갈 줄로 알고.
“예. 영가를 보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지금 강지헌 씨 주변에서 사람인 척 정체를 숨기는 귀신이 하나 있거든요? 그 귀신을 알아채고 나면 내 도움이 간절해질 겁니다. 그때 연락 주세요.”
라고, 지리교육이 장담했다. 그러나 신뢰감은 제로.
내 눈엔 네 새끼가 제일 귀신처럼 보여. 너하고 개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