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79)화 (79/96)

79화

다정을 가장하던 말투가 점차 살벌하게 변했다.

창백한 손 하나가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연못 가장자리를 짚었다. 뼈대가 볼가진 크고 앙상한 손이었다. 서창경이 저렇게까지 곯은 몸은 아니었는데 저건 사람의 손이 아닌 듯이 기괴하게만 보였다. 손톱이 점점 길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도 일어났다. 겁을 주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귀신 흉내를 내는 건지, 진짜 귀신인지……. 윽. 뭐야.

물속에 잠겼던 시커먼 머리통까지 솟아오르자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익숙한 감각이, 공포가 전신을 내달렸다. 뒤이어 나머지 손도 연못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고학의 물속 그림자였던 서창경은 마치 빨판을 바닥에 대고 기는 문어처럼 진득하게 움직이며 뭍으로 기어 올라왔다.

차라리 저게 살인 문어였다면 내 손으로 처리해 버릴 텐데.

발아래에 깔린 짐 덩이를 굽어보며 이놈을 업고 갈지 메고 갈지 찰나에 궁리했다. 이대로 두면 서창경의 제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기에 반드시 고고학을 데려가야만 했다. 나 혼자서만 내뺀다고 해서 이 주술에서 벗어날 거라는 보장도 없고.

고고학을 둘러업고자 몸을 수그릴 때였다.

『왜 불렀어. 사람 죽여 놓고 뒤처리하라고 부른 거?』

갓 변성기를 지난 듯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음성임에도 어째서인지 낯선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서창경이 쳐 둔 결계 속으로 침범했다는 사실이 의외롭지 않은 인물들이 보였다. 공숙선과 그 옆에 그림자처럼 붙은 사람이 한 명 더 서 있었다. 시선이 그쪽으로 가서 못 박혔다.

귓불에 주렁주렁 늘어뜨린, 박물관에서나 본 듯한 예스러운 황금 장신구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키는 훌쩍하니 컸지만 얼굴이 앳되고 피부를 가볍게 태닝한 듯한 서양인 소년이 한심해하는 기색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너 챤 발름 요팟이야?”

쭈그려 앉은 채 물었다. 사실 대답을 듣기 전에도 직감했다.

상상하던 멕시코 원주민 영감님이 아닌데?

돌칼 정령, 소년 왕이었구나. 다행히도 의복을 갖춘 채라 사망할 당시의 장기를 적출당한 끔찍한 몰골은 아니었다. 두개골도 훼손 없이 무사한 듯하고.

야. 이거 살인 현장 아니거든? 너는 정령이나 돼서 산 사람 죽은 사람도 구분 못 하면 어떡하냐.

서창경의 혼백이 빠져나간 고고학은 죽은 듯 움직임을 멎은 채였다.

『…….』

“너, 지금 우리 신령님이 보인다고? 갑자기?”

공숙선 본체가 돌칼 정령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눈을 했다.

“어, 나, 이거 가지고 있어서 귀신 보이나 봐.”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손에 든 향낭을 내보였다. 아마추어가 엉성하게 만든 조잡한 물건인 줄로 알았더니만 부적이 효력을 발휘했다.

지리교육 새끼, 의외로 소질이 있었네. 의식을 치르기도 전에 돌칼 정령의 얼굴을 구경할 줄이야.

“귀신 무서워한다는 놈이 귀신 불러들이는 호부는 왜 들고 있어. 덕분에 내가 이리로 질질 끌려왔다만. 주차장에 차 댄 것까진 기억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네.”

공숙선이 어이없어하는 기색으로 피식거렸다.

“뭐? 이거 귀안 틔우는 부적 아니야? 그래서 지금 내 눈에 챤 씨가 보이는 거잖아.”

“아닌데. 너 약 빨아서 보이는 거잖아. 환각제를 호부에다 푹 절여 놨네. 큭큭. 서창경 만났어? 네 주인님이 개 줄 끊고 도망친 개 찾아서 기어이 여기까지 온 모양이네. 예상보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걸 보니 제 발등에 불 떨어진 걸 알아챘나 보다야.”

향낭에다 코를 대어 본 공숙선 역시 익숙한 냄새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추리력을 발휘했다. 목적한 정보에 다다르는 중요한 키워드를 흘렸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죽은 사람을 보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놀라지도 않는다.

평소에 자주 봤다, 이거지.

“나, 약발 들어? 소극장에선 이 향을 방향제처럼 달고 살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며. 나 LSD 중독 안 됐다며?”

“어, 내가 그랬던가? 아니, 뭐, 약발이 들을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지금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네?”

“……. ……공숙선 씨 옛 동료가 방금 전까지 저기 있었거든. 물속에.”

무책임하게 둘러대는 공숙선을 잠자코 새겨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여태 날 속여 온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걸 이혜준 따까리에게 따져 봤자 이혜준 귀에나 흘러들어 가지.

내가 가리킨 곳에 있던 서창경, 연못에서 기어 나오려던 그 문어 새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부재의 기색을 느꼈는지 돌칼 정령도, 공숙선 본체도 연못 방향으론 무성의하게 흘끔 눈길을 주고 말 뿐이었다.

대신에 돌칼 정령이 기진맥진해 의식이 멀어진 고고학을 눈짓했다.

『여기 이 인간에게 제물 표식이 새겨져 있어. 서창경이 씌었네.』

“나도 봤어. 알아.”

공숙선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리곤 끝이다. 그의 눈빛이 ‘씌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 개쓰레기 같은 인성 하곤.

익히 아는 인성이라 이혜준이 그의 외가에서 대대로 지지해 온 종교 단체에다 교주 꿈나무인 공숙선을 꽂아 주기로 했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신도들에게 영생을 주겠다며 집단 자살을 유도한 몇몇 사이비 종교 교주가 뇌리를 스쳤다. 공숙선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죽은 신도들의 혼백을 가지고 놀 수도 있는 작자였다. 그러잖아도 이 세상에 저승 못(안) 간 귀신이 우글거렸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이코인데.

「거기 사람들 잘못되면 어떡하려고 저런 인간을 함부로 소개해 주셨어요?」

「쓰레기는 쓰레기장에다 버리라고 배웠어. 재활용도 안 되는 거는 소각해야지.」

「……!」

어! 그랬구나.

쓰레기장 한마디에 여러 의문이 해소됐다. 전부터 이혜준이 저는 세경 그룹 직계들 이름도 모르고, 그 일가 소속이 아니라며 선을 긋더니만 뜻깊은 이유가 있었던 거다.

“뭐라도 좀 해 봐. 표식이 새겨졌다면 완전히 찍혔단 말이잖아. 저러다 서창경한테 또 불려 가면 어떡해.”

“어떻게 될지 궁금해? 너처럼 잔뜩 생기를 빨리다가 결국엔 말라 뒈지지 않을까?”

공숙선이 제 알 바 아니라는 낯짝으로 대꾸했다.

우연찮게 오다가다 얻어걸린 놈이라지만 이 새끼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이혜준의 도덕성과 판단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안 되겠다. 이 쓸모없는 쓰레기부터 재우자.”

『그럴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돌칼 정령이 약간 제정신이 아니고 현대 상식이 부족할지라도 산 사람에게 부러 해를 끼치는 악령은 아니라는 거다. 정의감에 찌들진 않았지만 정화가 완료된 만큼은 행동했다.

“야. 남 좋은 일을 왜 해? 난 이제 나만을 위해서 살기로 했다니깐? 안 바꿔 줄 거야. 안 바꿔 ㅈ……!”

개소리하지 마. 님은 원래 님밖에 몰랐어요.

“…….”

공숙선 본체가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돌칼 정령은 쉽사리 그의 몸을 장악했다. 옆에 서 있던 소년의 혼백이 실체가 있는 인간의 몸속으로 스몄다. 빙의되는 과정이라면 귀안을 통해 몇 번이고 보아 온 터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돌칼 정령이 고고학을 옆으로 돌려 눕힌 뒤 손바닥으로 어깨와 등짝을 툭툭 내리쳤다. 내 눈에 지워지는 표식이나 떨어져 나가는 사기까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러면 서창경이 다신 이놈 못 건드리는 거지?”

“그럴 리가. 이혜준하고 붙어 다니다시피 하는 너도 건드리는데 이 인간이 뭐라고 못 건드리겠어. 이건 그저 단발성 처치일 뿐이야. 주술사가 또다시 표식을 새기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끌려다닐 거다.”

“그러게. 서창경이 튀기 전에 이놈을 끌고 가서 혜준 선배님한테 보여야 했어. 다신 들러붙지 못하는 평생 A/S를 받을 기회였는데 아쉽네.”

슬그머니 덫을 놓고 귀를 활짝 열었다.

공숙선 본체를 들어가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 말보다 신령이 하는 말을 더 귀담아듣는 내 습성 탓도 있지만, 지금은 긴히 확인할 정보가 있어서였다. 공숙선 본체는 믿지 못해도 돌칼 정령의 눈치 없음만큼은 믿었으니까.

“어려워. 내 경우엔 유물에 봉인된 상태라서 꼼짝없이 이혜준의 손아귀로 들어갔지, 보통은 정신이 나가지 않는 이상 그의 근처로 접근하지 않아. 소멸의 위험을 감지하는 건 우리의 본능이다. 너도 예전에 윤상현이 씌었을 땐 이혜준 그림자만 봐도 정신없이 내뺐다며.”

눈치 없는 게 남의 흑역사를 함부로 끄집어냈다.

분명 ‘우리’라고 했다. 저와 서창경을 한데 묶어 ‘우리’라고.

“그럼 서창경의 봉인은 무슨 목적으로 풀어 줬대? 이 경우에도 봉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소극장 건물에 가둬 둔 채였다면 그놈을 붙잡기가 더 수월했을 거잖아.”

“모르는 소리. 서창경이 자리 잡은 덴 물건이 아니라 영역이다. 눈도 깜깜한 이혜준이 무슨 수로 그 건물 안에서 집주인을 찾아. 눈 어두운 그자는 수백의 혼백이 저를 둘러싸고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걸.”

서창경이 부동산 법률과 다른 의미로도 그 소극장 건물 터의 주인임을 알려 주는 단서였다. 미심쩍다는 의구심이 조금씩 들 때부터, 서창경과 윤상현의 공통점을 하나씩 찾을 때부터 단계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여서인지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어떡해도 귀신 못 보는 혜준 선배 대신에 챤 씨가 눈이 돼 주면 되지.”

호령도의 토지신은 내가 위치를 가리켜서 이혜준이 없앴다.

이번에도, 과연 이번에도 내가 그의 곁에서 소멸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

방금은 챤 발름 요팟에게 미루는 소리를 했지만 내가 나서야 한다고 여겼다. 이건 결국 내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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