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러려고 서창경을 성채 바깥으로 끌어낸 거야. 제 영역에서 숨어들 작정을 하면 나라도 찾기가 어렵거든.”
“이제 어떡할 거래?”
이혜준의 의도를 물었다. 물론 이따가 본인에게도 물어볼 테지만 이 눈치 없는 놈에게서만큼은 솔직한 대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내가 겁먹지 않게끔 굉장히 신경 써 주는 말이나 꾸며 대겠지.
그간 귀신을 대할 때마다 태연하게 ‘있으면 있는 거지.’라는 자세가 되지 못해 신뢰를 잃은 내 탓도 크겠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되겠느냐고. 귀신을 보고 기절하지 않는 것만도 대견할 지경인데.
지금만 해도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는 내 상태가 비정상 같았다.
내가 여태 죽은 서창경하고 부대끼며 지냈다니.
내게 접근했던 첫 만남부터 귀신에게 홀렸던 걸까? 어떻게 모르고 살았지?
대경실색할 노릇이건만 놀라긴 잠시 후 놀라기로 하고 이 상황에서는 앞으로의 대책을 궁리하는 게 먼저라고 우선순위를 정했다. 외부 자극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 유독 무신과 관련해서는 먹히지 않았는데 지금은 점차 냉정해져 가는 자신이 느껴졌다. 무신을 극복했다기보다는 절실함 때문인 듯했다.
벗어나야 한다는 욕구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미래를 포기한 채 바라는 것도 없이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던 인형은 더 이상 없었다. 복종심과 두려움보다는 이 지긋지긋한 상태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을 만치 자라나 있었다.
어쩌겠어. 무서워도 해내야지.
“기반을 잃었으니 새로운 터를 찾으려 할 거잖아. 그래서 새집을 구해 줬다더라고.”
“오늘 아침에 거기?”
“맞아. 서창경의 본가. 함정을 파 놓았다고 들었는데 놈이 눈치채고 탈주한 걸까. 왜 이리로 왔지.”
“무슨 함정? 거기 사람 사는 데야. 빈집 아니라고. 설마 산 사람을 미끼로 서창경을 유인한 거야?”
달팽이에게도 생명수를 부어 주는 이혜준이 그럴 리가 없는데?
윤 의원 일가와 마찬가지로 서창경 일가도 내 목숨을 앗으려 했다는 정황을 엿보았다.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를 끼치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포용력으로 날 죽이려는 원수마저 용서해야지.’라는 대처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살상을 저지를 정도로 미쳐 돌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내가 아는 선배라면 무고한 제삼자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방법 말고 다른 계책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무신하고는 관계없지만 인간이 만든 법하고도 거리가 먼 어느 지점의, 상대방이 몹시 좆같아질 법한 훌륭한 해결책 말이다.
“유인은 무슨. 이혜준 원래 신을 대할 땐 예의고 뭐고 일 처리를 무식하게 하잖아. 보니까, 소극장에 있던 시체를 강제로 싣고 가 버리던데?”
‘시체? 서창경 시체? 아니, 시체를 왜 그런 곳에다 둬.’
개놈은 평소에 해괴한 짓거리가 잦았고, 사령으로 쓸 만한 넋을 건지고자 영안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의 소유인 소극장 건물 지하에 시체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로 새삼스레 기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서창경 본인의 시체였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태 시신이 남아 있다는 건 장례를 치르기 전이란 말이잖아.
「산 사람 위패는 아니었을 텐데 누구 거였어요?」
「그 건물 터주의 위패이지 싶어. 적힌 날짜를 보니까 죽은 지 그렇게 오래된 신령은 아니었거든.」
진실을 내포한 이혜준의 거짓말을 되새겨 봤다. 어쩐지 요 얼마간 연락도 없고 낌새도 수상쩍더라니 서창경의 사망은 극히 최근 일인 듯했다.
그렇다면 다행히도 내가 줄곧 귀신하고 살아왔던 건 아닌 모양이다. 다시 의문으로 돌아가서, 무슨 이유로 시신을 그 건물에다가 놓아뒀을까?
부모가 어디 사이비 종교에 물든 광신도들인가? 사람이 죽었으면 장례나 치러 줄 일이지 왜 그런 해괴한 짓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그 건물에서 지내는 내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 찜찜했다.
그 사이비 종교에서 나를 제물로 삼아 서창경을 되살리는 주술을 거행해 주겠다는 사기라도 친 걸까. 아니면,
“이거 다 공숙선이 꾸민 짓거리지? 도대체 서창경의 가족한테 무슨 소릴 했기에 여태 장례도 치르지 않고 있어.”
살아 있을 때도 흉신급이던 인간을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려고 시신을 내돌리고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너 함부로 우리 숙선이 의심하지 마. 애가 착ㅎ…….”
“착하긴 지랄. 바탕 더러운 걸로 따지면 서창경하고 동급이거든?”
“그, 그건 그렇지. 그런데 뒤에서 계략을 꾸밀 만큼 음흉하지는….”
“음흉한 놈인 것도 맞지. 수 틀어지면 제일 먼저 네 뒤통수부터 칠걸? 넌 도대체 뭘 믿고 그 인간 편을 들어 주는 거야?”
공숙선은 틈만 나면 이혜준의 본가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유물 정령들의 존재를 언급했다. 누가 생전에 살인광이어서 신력이 셀 것 같다느니, 사람 죽인 업적으론 전쟁광을 못 따라갈 거라니, 하며 모조리 건드려 보고 싶은 눈치였다. 처음엔 돌칼 정령과 함께 제물 타령을 하며 장단을 맞추더니 슬슬 다른 몸주로 갈아타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나는 지금이 좋다. 유적에 파묻혀 있을 때보다, 이혜준의 집 결계에 갇혀 있을 때보다 숙선의 몸에 깃든 쪽이 훨씬 자유롭고 편안해. 숙선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온전히 날 받아들여 주거든.”
돌칼 정령과 의식을 치르기 전부터 거부감 수치가 하늘을 찌르는 나더러 들으라는 소리 같았다. 영감님 귀신이든 어린애 귀신이든 귀신은 다 싫은데 어쩌라고.
“그건 공숙선 씨가 제사장이나 신관 체질이라서 그런 거라며.”
나 같은 일반인에게 안락함을 기대하는 건 지나친 욕심 아닌가? 쓰레기통이 아늑하다는 네 취향도 눈뜨고는 못 봐 주겠다만.
“체질 말고 마음가짐!”
“아, 마으음~.”
재깍 이해했다. 영력이 있는 개놈과 지리교육조차 제 몸에다 직접 귀신을 들여 몸주로 떠받드는 건 그토록 질색했으니.
무속인 중에는 본인은 거부하고 싶었지만 몸이 아프거나 가정에 우환이 닥쳐 어쩔 수 없이 신령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협박을 통해 반강제로 맺어진 몸주를 성심을 다해 모신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무속인이 아닌 나로선 모르겠다.
그저 신령과 제 몸을 공유하는 걸 즐기는 공숙선이 신기해 보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 계약이 끝나더라도 숙선의 몸에 머물고 싶다고. 앞으로도 쭉.”
“그건 당사자 둘이서 합의할 문제지. 이놈 들여라, 저놈 들여라, 하며 신어미도 아닌 제삼자가 몸주 삼을 신령을 골라 줄 순 없는 노릇이잖아.”
나한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숙선의 안위를 보장해 달라는 얘기다.”
“공숙선 씨가 왜? 어디서 협박이라도 당한대?”
자췻집 합숙 후 신경 써서 밥상을 차려 줬더니 혈색이 더욱 좋아지고 반질반질해진 공숙선 본체의 낯짝을 훑으며 물었다.
“이혜준이 소개한 종교 단체 말이다. 본가에다 유물을 대 주고 관리하는 자들이 속한 곳이라지? 분명 거기에도 제사장이 있어. 한 사람이 그 많은 정령을 건사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긴 어려우니까 다수일 가능성이 크지.”
“그럴듯한 추론인데?”
“그렇지? 숙선 같은 그릇이 여럿 되는데 순순히 우두머리 자리를 내줄 리가 없잖아. 낌새가 이상해. 네가 숙선을 지켜봐 줘.”
영력도 없는 이혜준이 무슨 수로 유물 정령들을 가두었나 했더니 뒤에 그런 조력 단체가 있었던 거다.
아무렴. 귀신은 함부로 나돌아 다니게 두면 안 되지.
정화까지 해서 가두고, 생각보다 일 처리가 깔끔한 쓰레기장이었다. 구마에 특화된 몇몇 종교인을 보아 온 까닭에 그곳에 제사장급 그릇이 있다는 돌칼 정령의 고자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는 소각한다는 이혜준의 말이 떠올랐지만, 설마 살아 있는 공숙선을 불태울까 싶어서 괜한 망상을 접었다.
그보다는 공숙선 같은 신기한 미친놈을 애지중지하는 돌칼 정령 소년에게 어디 인성 훌륭한 무당이 있다면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그 이전에 이승에 머물겠다는 생각 자체를 바꾸었으면 했지만.
“그냥 영계로 떠날 생각은 없어? 너흰 뭐 정령계 같은 거 있다며. 너 계속 남아서 뭐 하려고. 여긴 네가 있을 곳 아냐.”
“숙선이 우리 같은 존재를 꼴 보기 싫어하는 너라면 이런 식으로 날 설득하려 들 거라고 언급했다. 공간을 나눠 쓰면 될 일을, 오직 살아 있는 인간만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나를 밀어낼 거라고 말이야.”
“대예언자 납셨다?”
“인간이 이토록 이기적이라 오늘날 대자연이 훼손되고 지구가 파멸의 위기에 처했다고 했어. 공유할 줄 모르는 너희가 이 행성을 제 것처럼 함부로 사용해서!”
‘귀신과 더불어 사는 지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쓰레기를 향한 절절한 애정과 신뢰가 묻어나는 개소리였다. 귀신이 듣고 싶어 하는 달콤한 말만 해 주는 공숙선은 죽은 자들에겐 인기 절정의 아이돌인 모양이다.
보통은 귀신이 인간을 꼬시려고 감언이설을 남발하는데, 어찌 된 게 공숙선은 그 반대였다.
“시발 공숙선, 제 손으론 분리수거도 안 하는 주제에 지구를 되게 생각해 주는 척이네? 남고 싶다는 찬 씨의 바람은 잘 들었는데 산 사람 몸에서 연명하는 건 아니지 싶어.”
“숙선이 괜찮다는데 네가 왜? 나는 숙선의 몸을 빌려서 매일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지금이 신나고 재미있거든? 숙선의 생명이 다하면 계속해서 다른 그릇으로 옮겨 다니며 지내고 싶어.”
생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절절 끓어 넘치는 대사였다. 이러니 유물에 깃들어서라도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 온 건가.
때때로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고 생각하고, 죽음으로 내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길 바라며, 환생도 윤회도 없길 바라는 나와는 정반대되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