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81)화 (81/96)

81화

“야. 징그러우니까 숙주 찾아 헤매는 기생충처럼 굴지 마. 그거 네 몫 아니다. 그릇 주인 몫의 삶이야. 너는 아주 오래전에 끝났어.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난 거지.”

얘가 산 사람 같았으면 어디서 뭘 해 먹고 살든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든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원체 다른 사람이 뭘 하든 신경 안 쓰고 사니까.

그런데 귀신이라서 문제가 되는 거였다. 누구는 산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해도, 내겐 죽은 서창경이 산 서창경보다 더 무섭고, 죽은 챤 발름 요팟이 쓰레기 공숙선 본체보다 더 끔찍했다.

하다못해 내 주변만이라도 귀신 없는 청정 구역이면 좋겠는데, 정령 귀신이 득실거리는 본가를 둔 이혜준부터가 큰 걸림돌이었다. 청정 구역 만들겠다며 내 인생에서 그 선배를 떼어 놓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챤 발름 요팟이 어린 나이에 정치·종교적으로 희생된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 사람을 그릇 삼아 옮겨 다니며 거짓 영생을 누릴 자격을 얻은 건 아니라고 봤다.

“이게 진짜! 합의에 따른 정당한 계약인데 누굴 기생충 취급이야? 네가 우리 존재를 무시하는 이혜준보다 더 잔인한 놈이다! 쓸모가 다하면 버릴 셈이지!”

붙여 놓으니까 공숙선에게 단단히 세뇌당해서는 얘 정신 상태도 큰일이네.

슬쩍 중심을 비틀어 달려드는 돌칼 정령의 돌격을 피했다. 이놈에게 실체가 생긴 이상 호락호락 져 주기는 어려웠다.

등 뒤로 양팔을 꺾어 제압한 뒤, 손가락을 튕겨 이마에다 딱밤을 한 대 갈겼다. 내 동생 놈 나이만 됐어도 밟아 버리는 건데 애새끼라서 봐준다.

빡-.

그러나 봐주는 것치고는 듣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 강렬한 효과음이 울렸다.

“야. 먼저 네 쓸모나 증명하고 나서 쓰다 버리니 마니 억울한 척을 해라.”

“이거 안 놔? 놔! 놔! 강지헌 너 가만 안 둬!”

이마가 퉁퉁 부어오르는 돌칼 정령이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본체가 오래 무용한 사람답게 체력이 괜찮은 편이지만 속박 기술이 걸린 상태에선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쳇. 졸지에 두 놈 다 짊어지게 생겼네.”

혹여 여전히 홀린 채 고고학이 깨어난다면 내가 곧장 손을 쓸 수 있게끔 공숙선 본체더러 그를 업으라고 할 셈이었다. 내 손이 묶인 동안에 이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미덥지 않기도 했고.

별안간 저항하던 돌칼 정령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평소 이놈이 말 잘 듣고 얌전해지는 원인은 하나밖에 없는데 역시나 잠시 후 그 원인 제공자가 등장했다.

“강지야, 지지. 쓰레기 처리반이 따로 있으니까 그 아저씨 만지지 마. 괜히 네 손만 더러워져.”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드론이라도 띄웠나 해서 이혜준을 쳐다보는 대신에 하늘을 확인했다. 결계가 깨어진 공간엔 가로등 불빛으로 모여드는 날개 달린 벌레들만 보였다. 그새 날이 컴컴해져서 드론 비행 금지 시간대에 접어들었다.

“쓰레기가 오다 말고 이쪽으로 방향을 틀기에 널 만났나 했지.”

이혜준이 내게서 공숙선 본체를 떼어 내며 대꾸했다. 눈이 마주치랴 고개를 푹 숙인 돌칼 정령이 얌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나 역시 본능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랜만에 방상시 눈을 피해 보네.

그래도 예전처럼 막 도망치고 싶고 전신의 피가 바짝 마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회충이 없는 데다, 그저 지금의 상태 이상―보는 눈―을 지속하고자 하는 바람뿐이니 당연한 일인지도.

“혹시 내 위치도 추적했어요? 선배한테 건네받은 와이파이 단말기에 위치 추적기 같은 거 내장된 건가?”

“나 기계치잖아. 그런 하드웨어는 좀 어려워.”

이분은 정말로 그랬다. 설명서를 쥐여 줘도 거의 모든 가전제품 사용에 헤맸다. 컴퓨터 언어가 아니고 인간 언어로 된 문서라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나?

「IT·기계 융합 기술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저 형은 프로그래머라는 사람이 왜 최신식 밥솥으로 수비드 수육도 못 만들지? 간단히 버튼만 몇 개 누르면 되는데 말이야.」

IT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동생 놈은 이혜준의 (요리) 실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알았어요. 선배의 무식함을 믿을게요.”

“어. 고맙…다?”

결백을 믿어 준다는데도 떠름한 반응을 보인 이혜준이 어떻게 공숙선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덧붙였다.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AI가 공숙선의 안면을 인식했어. 이 캠퍼스만 해도 곳곳에 영상 정보 처리기기가 5천 대 넘게 깔려 있거든. 일단 등록만 하면 모자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더라도 3초 안에 찾아내. 쓰레기가 자긴 감시당하는 거 너무 좋아한다며 무릎 꿇고 애원해서 등록해 둔 거야.”

하이고. 잘도 그랬겠다.

“그러면 나는요? 내 얼굴은 등록 안 해 줘요?”

“왜. 너도 감시당하고 싶어? 나는 너한테 혼날까 봐 말도 못 꺼냈는데 진작에 물어볼 걸 그랬나?”

“혼나긴 뭘 혼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선밸 혼낼 학번이야?”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걱정돼서 미치겠는데 차단당해서 연락도 안 되는 상태가 몇 날 며칠 이어지면 벌 받는 기분이 들지. 이제부턴 말 잘 듣겠습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고.”

그러고 보니 그 후로는 내 눈치 좀 살피는 것 같기도 하고?

호령도에서처럼 막무가내로 방상시 눈깔을 들이대는 짓도 하지 않는다.

“고작 일주일 가지고 엄살은.”

“열흘이었어!”

열흘이나 이혜준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니, 그땐 내가 참말로 무식하고 용감했구나.

지금은 정체 모를 물건만 받아도 바들바들 떨면서 이혜준부터 찾고 보는 나는 겁이 없었던 과거를 떠올리며 짧게 반성했다. 그러면서도 향낭 부적인지 저주용 주술 도구인지를 들킬세라 슬그머니 가방 속에 감추는 겁 없는 짓을 했다.

“그때 차단당했어도 나 어디에 있는지는 알았을 거 아녜요.”

“몰랐어. 아예 찾아볼 생각도 안 했거든? 너 그렇게 화내고 뛰쳐나갔는데 내가 어떻게 또 미움받을 짓을 해.”

“솔직히 말해 봐요. 선배, 나 스토킹한 적 있지.”

함부로 남의 건물 출입문을 따거나 위치를 추적하는 사람이 아니란 건 알았다. 그런 행동이 불법이라는 인식 탓이기보단, 타인에게 그 정도로 관심이 있지도 않고 관심이 있다고 한들 행동으로 옮길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아서였다.

가진 기술로 이혜준이 머리를 굴리는 방향은 오로지 ‘어떡하면 내 몸 편하게 뒹굴 수 있을까, 기계나 로봇에게 할 일을 떠넘기며 게으름을 피울 방도는 없나.’ 이런 쪽뿐이었다.

한 날은 이혜준이 건넌방에 있는 나를 애타게 불렀다. 그는 침대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해파리처럼 퍼져 있었다.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기가 귀찮으니까 나더러 이북 리더기의 물리 키를 대신 눌러 달라는 거다. 원래는 페이지 넘기는 리모컨을 사용하는데 본가에 놓아두고 왔단다.

그런 용도의 아이템이 상용화되어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세상에는 이혜준 같은 놈들이 많은 모양이다. 여태 내 주변에는 없었던, 신비한 동물 같은 새끼들.

「…….」

이게 인간인가 싶어 우두커니 쳐다만 봤다. 남들은 이놈이 멋있어서 죽겠다는데, 난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어디가 어떻게 멋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시중들어 준다며!」

아, 그랬지. 일단 약속은 지키자.

계약을 떠올리며 애써 당혹감을 가라앉혔다. 옆에 앉아서 내 책을 읽으며 이혜준의 독서도 도왔다.

그를 지켜보노라면 과학 기술 문명은 인간의 호기심이 아니라 게으름 때문에 발전하는 건 아닌지 고찰하게 된다.

“…….”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진짜로 나 추적한 적 있구나?”

“두 번 있는데……. 따라다닌 건 아니고 너 입대했다는 소식 듣고 그저 어디로 배속됐는지 알아본 거야. 군대에서 수월하게 지내라고 손 좀 보탰어. 나 복무하는 동안에 대한민국 육해공군 정보는 기밀 등급까지 다 뽑아 뒀거든.”

이런 놈이 빅 데이터 분석병이었다니 고양이에게 츄르 공장을 맡긴 격이었다.

이혜준이 고고학을 훌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 걸음을 옮겼다. 가만 보면 반사 신경도 둔하고 균형 감각도 별로인 게 몸치에 가까운 반면 힘은 셌다. 여력이 남는지 목재 덱 한쪽에 치워 둔 부피 큰 포장 봉지까지 집어 들었다.

평소라면 얼른 달려가 거들었을 테지만 군대에서 고생한 과거가 눈앞에 어른거리자 깊은 빡침이 몰려오면서 선배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정보 조작해서 나 조교로 뽑았다고 자백하시는 거?”

군기 잡는 분대장은 더욱 군기가 잡혀 있어야 해서, 조교끼리의 서열도 장난이 아니었다. 부대 안의 또 다른 부대라고 보면 됐다. 얼마나 빡셌는데.

“아냐. 그쪽으로 빠진 건 네가 원체 눈에 띄는 녀석이라 그런 거고. 건수 만들어서 위에 평판 더러운 장교 너덧 명 다른 데로 발령했거든? 윗대가리부터 날렸는데 부대 분위기 괜찮지 않았어?”

하늘의 스타들이 별자리를 이동했다고 해서 나 같은 밑바닥 일반병이 알 게 뭐람.

김멍구는 썩은 장군 새끼한테 걸려서 주말도 없이 관사로 불려 가 손자들 공짜 과외 시켜 줬다는데, 우리 부대는 전반적으로 갑질하는 높으신 분이 없긴 했다. 별 시답잖은 이유를 들어 휴가도 잘 줬고.

휴가를 너무 자주 나와서 서창경도 너무너무 자주 만났고, 시발…… 욕이 나오려 했다. 그치만 서창경 얘긴 이따가.

말을 꺼냈다간 이 자리에서 향낭을 빼앗길 우려가 있다. 나는 지금부터 이 남자의 등 뒤로 몸을 숨길 것이 아니라, 밝은 눈으로 서창경과 윤상현을 마주 보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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