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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82)화 (82/96)

82화

“나 조교라서 부대 분위기를 즐길 형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래. 너는 애들 땅바닥에 뒹구는 거 감상하면서 구령만 붙이면 되고, 몸은 편했겠네.”

내막을 모르는 이들이 착각하는,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사이코패스형 조교론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조교 가면 뒤에 사람 있다고!

‘시범도 보여야 하고, 훈련 끝났다고 해서 쉴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따로 또 훈련받고 교육받거든요? 너도 다 큰 성인 남자들 보모 노릇 해 볼래?’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신병교육대 분대장의 고충을 대변해 줄 상황이 아니라 속으로만 꾹꾹 눌러 삼켰다.

“뭐래. 직접 피를 봐야 알겠어요? 조교로 또 입대시켜 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요.”

“선배님 군대 한 번 더 보내 주려고 용쓰는 것 좀 봐라? 나 진짜 강지헌처럼 마음이 비단결 같고 날 위해 주는 사람 처음이야. 울 어머니보다 더해.”

자식더러 ‘너 허구한 날 뒹구는 꼴 보면 속 뒤집어지니까 제발 내 눈에 띄지 마라.’고 하신다는 그의 어머니보다 내가 한 수 위란다. 그럴 리가.

나는 타인이라서 이런 인간이라도 이따금씩은 웃기고 귀엽기라도 하지. 이혜준의 아버지는 항상 ‘아이고. 저 한심한 새끼, 오늘은 용케 바깥으로 기어 나왔네.’ 이런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뵌 적은 없지만 그의 모친도 다를 바 없는 듯했고, 충분히 공감이 갔다.

만약 내 동생 놈이 ‘손가락 움직이기 귀찮으니까 나 대신 리더기 물리 키 좀 눌러 줄래?’ ―이랬다간, 열 손가락을 분질러 줬을 테니까.

“잘 아시네요. 내가 평균 이상으로 친절하니까 여태 선배 목숨이 붙어 있는 거예요. 고마워하세요.”

“이제는 강지헌도 뻔뻔해져서는 내 칭찬에 눈도 깜빡 안 해.”

이혜준이 놀림거리가 떨어져 아쉬운 기색을 내보였다.

“그래서, 두 번째 스토킹은 언제였는데. 최근 일이에요?”

“…….”

또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내가 웃으면서 물어볼 때 이실직고하세요. 들어 보고 합당하면 용서해 줄 테니까.”

웃음기 한 점 없이 살벌하게 을렀다.

첫 번째 스토킹이 나쁜 의도가 아니었단 사실은 납득했다. 고마움과는 별도로 찜찜함이 남았지만.

원래 내 성격대로라면 ‘내가 먼저 도와 달란 부탁도 안 했는데 왜 선배 혼자 설치셨어요?’라는 싸가지 없는 반응이 튀어나올 법도 한데, 위기에 몰린 처지이다 보니 지푸라기 도움이라도 달가웠다. 달팽이도 살려 주는 이 남자라면 어떡하든 날 건져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안면 인식 시스템에 내 얼굴도 등록해 달란 얘긴 농담이 아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된다면 서창경이 내 넋을 건드릴 새도 없이 시신이라도 서둘러 찾으러 와 줬으면 했다. 죽어도 꼭두각시로 이용당하지 않게끔 내 영혼마저 말살해 주길 바랐다.

그 인식 시스템이 생체 기반 기술이라면 죽은 사람 시신 찾는 덴 소용이 없겠지만.

“학교에 들렀는데 설정우가 ‘호령도 당구 시합 원정대’를 꾸린다는 거야. 처음엔 관심 없어서 지나치려고 했거든? 그런데 불쑥 네 이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자체적으로 조금, 아주 조금만 조사해 봤어.”

전공 학부 모임에는 일절 참가하지 않던 분께서 어쩐 일로 다른 지방까지 먼 길 행차를 하셨는가 했더니.

“그럴 땐 스토킹을 하실 게 아니라 거기 있던 애들한테 몇 마디만 물어보면 되잖아요?”

정보를 얻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이혜준과 대화를 나눌 기회라고 여기며 너도나도 호응해 줬을 텐데.

“아니, 잘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부적응자가 질색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혜준한테 내적 친밀감 오달지게 느끼는 네 팬분들이라고! 다 큰 어른이 타인에게 말 한마디를 못 붙여서 통신망을 파고드냐? 범죄가 더 쉬웠니, 이 등신아?

설정우가 날 이용한다는 얘길 꺼냈을 때 저도 정보망을 가지고 있다며 큰소리를 치기에 아는 동기나 후배를 통해 들었다고 여겼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인간관계와는 무관한 경로였다.

“호령도에선 친하지도 않은 나한테 잘만 말 걸었잖아요?”

“그 섬 안동네 입구에서 너 기다리는 동안 시뮬레이션 한 백 번은 돌렸거든? 첫마디를 뭐로 할까 엄청 고민했어. 심장 벌렁거려서 죽는 줄 알았다고.”

“…….”

차원이 다른 찌질함에 웃기면서도 가련한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이혜준은 재벌가 능력남과 은둔형 외톨이 도태남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이놈을 어떡하면 좋을까.

“이제 안 그럴 테니까 한 번만 봐줘. 연애에 환장해서 어떻게 해 보려고 거기까지 너 쫓아간 거 아니야. 그저…… 이유가 궁금했어. 아니, 어렴풋이 알긴 했는데 나로선 확신이 필요했던 거지.”

“무슨 이유요.”

무슨 확신?

“너 휴학해서 없는 거 아는데도 멀리서 누가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 보면 강지헌인가 싶고……. 어딘가에서 네 이름이 들리면 설레서 견딜 수가 없고, 말 한마디 못 붙여 본 게 두고두고 후회스럽고, 또 온라인으로 해도 되는 복학 신청을 하러 굳이 학교까지 찾아갔던 이유들 말이야.”

“…….”

“너만 보고 싶었어.”

“…….”

스토킹을 추궁하려다가 느닷없이 고백 타임을 맞이해 버렸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는 이혜준의 하얀 피부에서 유독 귓바퀴 주변만 발갛게 익은 것이 보였다. 음습하게 계략이나 세우는 서창경을 보다가 성격에 꼬인 데가 없는 이 남자를 보니 상대하기 쉬운 듯 더 어려운 느낌이 있었다.

망했네.

나마저 귀가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치고 들어오세요? 다 해결될 때까진 페어플레이하겠다며.”

진짜 이러기 있냐.

“널 왜 찾았느냐고 물어보니까 이유를 설명한 거야. 미안해.”

“아니, 뭐…… 사과하실 필요까진 없고요. ……제가 더 미안하죠.”

사람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연애에 신경 쓸 감수성이 끓어오르지 않았고, 그게 미안했다. 지금의 내게 연애란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문제였다. 솔직히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상황에서 연애 챙기는 인간은 뭐 하는 놈들인가도 싶고.

그쪽에서 보면 또 내가 감정이 결여된 놈인가?

서창경도 윤상현도 날 좋아한다면서 한다는 짓거리가 하도 상식 밖이라, 이제는 사랑이 뭔지도 헷갈렸다.

사랑 그거 안 하고 살면 안 될까?

“너는 사과할 필요 없어. 내 쪽에서 전하는 일방적인 감정인데 네 잘못은 아니잖아.”

누구들처럼 동기를 유발한 건 강지헌이라고, 내가 처한 이 시궁창이 매정한 내 성정 탓에서 비롯됐다는 말은 없었다.

“어…… 음…….”

“…….”

“선배, 어색해 죽겠는데 화제를 바꾸죠?”

내가 무슨 대꾸를 해도 이 멋쩍은 분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할 듯해서 비겁하게 회피 스킬을 썼다.

“그럴까? 강지 너 왜 갑자기 내 눈 피해. 똑바로 못 쳐다보겠어? 여기서 쓰레기하고 무슨 작당을 했기에 그래?”

와. 눈치챈 줄은 알았지만 바꾸랬다고 곧바로 정곡을 찌를 일이야?

“이거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설명해 드릴게요. 다른 얘기도 곁들여야 해서요. 그거 음식 포장해 온 거죠? 저 주세요.”

“무거워.”

이혜준이 내 반대편으로 팔을 뻗자, 멀찌감치 피해 있던 돌칼 정령이 쪼르르 달려와 짐을 건네받았다. 거리를 두면서도 이혜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나 보다. 참된 노비 정신이다.

“챤 씨 너무 부려 먹지 마요. 귀하게 자란 신분인데.”

서창경이 공숙선이 등장했다고 도망치진 않았을 테고, 수천 년 묵은 정령 귀신이 세긴 센 모양이다. 줄곧 길들여 오던 사령과는 체급이 다르다고 판단했겠지. 최고 직위인 임금님이셨잖아.

그것도 개놈이 바라마지 않던 살아 있는 인간 제물로 갈고 닦은 신력의 소유자였다.

이래서 공숙선 본체도 소극장에 드나들 땐 돌칼 정령을 떼어 놓고 자취를 지웠던 거다.

“수상한데. 챤 씨하고도 뭐 있었어? 둘이 안 친했잖아?”

“예. 안 친해요.”

누가 귀신이랑 친해. 나 그런 사람 아니야.

“흠-. 그래? ……쏟아지지 않게 똑바로 들어요. 쓰레기 밤눈이 어두워서 걱정되네. 자빠져서 코 깨지는 거 아냐?”

내가 무신에 의지하는 걸 경계하는 이혜준은 공숙선 본체를 까는 척하며 평소 있는 듯 없는 듯 외면하던 돌칼 정령을 공격했다. 저 녀석도 이혜준더러 눈이 깜깜하다며 뒷소리를 하던데, 둘이 정신적으로 통하는 사이였나 보다.

그러니까 너희 둘이나 좀 사이좋게 지내지?

돌칼 정령이 이혜준을 피하는 건 두려움 탓이라지만, 이혜준은 돌칼 정령에게 이렇게까지 무관심할 일인가 싶었다. 영결식 도와 달라며 손님을 초대해 놓고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과도 같았다. 없는 신령 취급했다.

저런 태도가 정답인 걸까?

는 인간의 취약한 부분을 공격한다는데 이혜준처럼 행동한다면 파고들 틈을 엿보기 어려울 듯도 했다. 빈틈이 없기에 신령은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가 없는 건지도.

“엇……!”

말이 씨가 됐는지, 아니면 방상시의 강력한 저주 탓인지 돌부리 하나 없는 평지에서 돌칼 정령이 나자빠질 듯 휘청거렸다. 귀안을 틔운 눈에 녀석이 공숙선 본체로부터 튀어나올 뻔하다가 도로 합체하는 현상이 잡혔다.

저 정도 흔들림에 분리될 리가 없는데 가까이에 이혜준이 있어서 결합이 허술해진 게 아닐까 했다.

“…….”

공숙선 본체였다면 쌍욕부터 갈겼을 테지만 소란 없이 혼자 민망해하는 꼴이 딱 챤 발름 요팟이었다. 애새끼라고 여기니 아주 조금 귀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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