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그러게. 아프다는 사람을 혼자 두고 가긴 마음이 쓰이네요. 생활관 같이 쓰는 지리교육과 선배한테 지금 어디인지 연락 한번 해 봐요. 그 선배가 기숙사에 있다면 거기로 데려다주고 아니면, 우리하고 가죠. 여기 이 선배님이 안과 의사쌤이라 눈 잘 봐 드릴 거예요.”
다시 생각해 보니 윤상현이 지리교육에서 고고학 쪽으로 옮길 우려가 있어 이놈을 기숙사에 두기도 껄끄러웠다. 돌려보내는 척하며 지리교육을 사로잡는 거라면 몰라도.
“이 사람 경영 남신으로 유명한 선배님 아니에요? 안과의는 무슨. 의대생도 아니잖아.”
고고학이 이혜준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을 확인하니 안도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당장은 서창경의 흔적을 지워서 다행이긴 한데, 그가 떠난 자리에다 사후 처리를 한 거라서 고고학의 몸에 다시 붙을지 말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표적으로 찍힌 건 그대로라 백 퍼센트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이분 복수 전공하셨어요. 고고학 선배님 눈 아프지 않게 계속 봐주실 거랍니다. 귀찮게 따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편하잖아. …요?”
너 또 괴담 지껄이다가 귀신 들리기만 해 봐라. 눈깔을 확 도려내 줄 테니까. 온 세상에다 대만 귀신 얘길 떠벌리고도 남을 새끼야!
말의 내용은 고고학을 위해 주는 척 다정스러웠지만 눈빛에는 놈을 회 떠 죽이고도 남을 만한 살기를 담았다.
“어… 음…… 예.”
기백에서 꺾인 고고학이 충혈된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유로 나한테 찍힌 건지 몰라서 억울해하는 눈치도 엿보였다.
“그럼 이제 지리교육과 선배한테 연락할 차례네요.”
“기숙사에 다른 애들도 있을 텐데 왜 하필 그 형한테만요?”
“오늘 같은 날에 부적 쓰는 오컬트 덕후 말고 누가 기숙사에 처박혀 있겠어요. 유시호도 놀러 갔어요.”
기숙사 형의 연락처를 찾는 고고학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요, 그 선배한테 우리 안과 쌤 얘긴 입도 벙긋하지 맙시다?”
“왜요.”
“아프다는 인간이 말이 많네? 후유증으로 힘들어 보이니까 내가 대신 걸어 줄게요?”
지리교육의 것으로 기억되는 이름이 보이자 손가락을 뻗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 모드로 바꾸고 대기했건만 몇 번을 걸어도 지리교육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발신자가 고고학이라 무시해도 될 연락이라고 여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고학 새끼, 이렇게 쓸모가 없을 수가! 전화번호마저 쓸모가 없어.
기습하듯이 기숙사로 찾아갔지만, 지리교육이 돌아온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혜준과 같이는 만나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내 번호로 지리교육에게 연락해 봤다. 이럴 때 놈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일이 쉬워지겠지만, 이혜준에게 위치 추적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산 사람이 하는 일은 꼬리가 밟힐 우려가 있으니까 역시 무신은 무신으로 상대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앞자리에 앉은 돌칼 정령―공숙선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저 콤비라면 가만히 앉아서 윤상현을 불러들일 수도 있지 않나? 서창경이 했던 대로 놈을 묶어 둘 수도 있을 텐데.
본심은 유용성이고 뭐고 이혜준이 나 때문에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첨단 기술도 필요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방상시 눈깔이나 빌려주면 고맙겠는데 말이다.
내 번호로 연락하자, 지리교육은 무시하지 않았다. 대뜸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였지만.
―진짜 이상하네. 못 찾겠어요.
“뭐, 자료? 지금 학교 도서관이에요?”
―아니, 친구네 집…… 근처? 건물이 열 채밖에 안 되는 타운하우스인데 이걸 못 찾고 헤매네. 부지가 넓어서 그러나?
“……!”
공숙선에게 내비를 찍으라고 신호를 넣으려는데, 위치가 학교 바깥이라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새끼가, 거긴 어떻게 알고 찾아갔을까.
“괜찮아. 오늘은 집에 박양우도 있고, 보안 잘돼 있어.”
내 안색이 어두워졌는지, 이혜준이 위로랍시고 속살거렸다.
보안이 잘되긴! 낯선 사람이 집 주변을 기웃거려도 걸리지 않았단 건 관리실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리잖아.
“박양우 씨한테 연락해서 관리실 한번 들여다봐 달라고 해 주시겠어요?”
이혜준에게 부탁한 후, 다시 지리교육과 대화를 시도했다.
“나하고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거기까지 갔대. 날아갔어요?”
―하하. 먼저 와서 친구 기다리려고 서둘렀죠. 우리 같이 해결해야 할 중차대한 의식이 있잖아요? 친구는 그저 나만 믿고 맡기면 돼요. 원래 나 같은 특별한 인물이 인류를 구원하는 거니까.
떡을 주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건만 저 정신 나간 놈은 김칫국부터 마시고 이미 영결식 준비에 들어선 상태였다. ‘다행히’ 주변에 머리에 문제 있는 놈이 하나둘이 아닌지라 지리교육의 개소리에도 큰 정신적 충격 없이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확인차 나한테 얘긴 하고 갔어야죠. 거기 우리 집도 아닌데 어떡해. 선배님은 허접한 잡신 따위는 몸주로 삼지 않겠다더니만 윤상현이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는다니까. 그게 그놈을 섬기는 거지 뭐야.”
지리교육과 윤상현 사이를 이간질했다.
―……. 시발 그런 거 아니거든. 나는 잠깐 내 힘을 얹어 주는 거라고. 굳이 기여도를 따지자면 내가 주도하는 입장이란 말이야!
분한 듯 씩씩거리는 꼴이 벌써 그가 윤상현에게 통제권을 빼앗겼음을 말해 줬다.
의식 없이 홀린 듯 낯선 동네에 도착해서 정신을 차리곤 저도 기겁하지 않았을까? 몸에 붙은 귀신을 경계하기 시작한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애쓰네. 둘 중에 누가 주도하든 내가 알 바 아니고요. ……주술이 걸려 있어서 거기 집주인 초대 없이는 넌 절대 그 집 안에 못 들어가. 못 찾는다고.”
말하다 말고 이혜준이 내미는 휴대전화에 적힌 메모를 그대로 읽었다.
뭐라고?
‘진짜요?’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럴싸한 이야기에 내 마음도 이처럼 솔깃해지는데 무신에 푹 찌든 지리교육은 더하지 싶었다.
“어, 진짜. 저놈 지금 문패 때문에 헤매는 거야. 본가에도 대문에다 내 이름 박아 둬서 정령들이 출입구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다더라고.”
“오오-!”
오오오! 신흥 종교 단체가 그 집에다 결계를 쳐서 그것들을 가둬 둔 줄 알았더니 방상시의 스킬 확장 효과였어? 오오오오!
“강지야, 너 지금 오리 주둥이 다 됐고 눈은 샛별처럼 반짝거린다? 네 귀엔 인공 지능을 무기로 감히 신령에게 개기겠다는 계획보다는 이런 내용이 더 신빙성 있게 들리는 거지?”
이혜준 진짜, 이런 순간에도 덫을 치네? 눈도 안 마주쳤는데 내 눈이 빛나는지 동태 눈깔인지 자기가 알 게 뭐람.
“에이, 아니에요. 나 이제 미신 믿지 않기로 했잖아요. 무조건 선배 방식대로 따를 겁니다.”
조신하고 순종적인 돌쇠처럼 보이게끔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래? 그럼 아까 그거 꺼내 봐.”
“뭘요. 어, 있어 봐요. 이놈부터 처리하고. 정말 거기서 기다리라고 해요? 집에 초대할 거야?”
시침을 떼며 화제를 돌렸다. 잊지도 않고 향낭을 달라는 걸 보니 곧 빼앗길 듯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혜준이 내게 태블릿 피시를 넘겨줬다. 누가 귀신을 달고 자기 집으로 찾아온다는데도 대수로워하지 않는 태도였다.
나 같으면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며 발악하거나 염주, 십자가, 마늘, 소금, 뒤집어쓸 이불 등등을 준비한다고 허둥지둥 정신없을 텐데, 이런 의연함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화면에 처음 들여다보는 실내가 나타났다. 이혜준은 자췻집에 있다는 회사 동료를 보내 확인하는 대신 네트워크 카메라에 접근한 것이다.
이 인간, 관리실을 관리하고 있었네.
그런데 계셔야 할 직원분들이 보이지 않았다. 보통은 두 명씩 짝지어 교대하며 근무하시던데.
“선배님, 관리실에다 뭐 했어요?”
지리교육에게 물었다.
―아아, 새끼들이 사유지라며 들어오지 말라고 생지랄을 떨더라고. 성가셔서 내가 어디로 좀 보냈어요.
“어디로?”
나 때문에 또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 엮였다는 사실을 깨닫자 멀쩡하던 손과 다리가 잘게 떨려 왔다. 이것이야말로 내 업보가 아닐까. 지옥에 떨어진다 한들 나는 죄가 없다고 떳떳이 주장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이 누구라고? 집에 초대받으면 관리인 새끼들 어디로 보냈는지 알려 줄게요.
지리교육이 조건을 내걸었다.
문패에 새겨진 이혜준의 이름을 읽지 못한다는 놈과 내가 코앞에서 그 이름을 불러 줘도 뇌로 입력하지 못하던 놈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러자 우리 팀 최종 병기의 이름을 파는 데 서슴없어졌다.
“이혜준 씨.”
―뭐? 누구? 방금 뭐라고 했는데?
예측대로 수화기 너머에서 안달 난 지리교육의 음성이 울렸다.
이게 되네. 신기하게.
축복받은 이름이 틀림없었다. 성명학적으로 동명이인 전원에게 해당하는 특성이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신령에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든든하니까.
서창경의 죽음을 인지한 이제야 신령과 이혜준은 서로 다른 세상,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는 말이 실감 나려고 했다.
어째서 서창경은 이 선배를 보지 못하는지 줄곧 의아해하며 원인을 캐려고 들었다. 무신과 무속인이 하는 말은 확고한 증거가 없어도 믿었으면서, 이혜준이 하는 말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믿음을 보류해 왔었다.
아무래도 내가 쓰레기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