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난 분명히 조건을 지켰는데 지리 선배님이 못 알아들으신 거예요. 나중에 딴말하기 없습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신고당하지 말고 타운하우스 입구에서 기다려 봐요. 가서 초대해 줄 테니까.”
태블릿 화면이 바뀌어 이번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걸어가는 지리교육의 모습이 잡혔다.
저기가 어디쯤이지?
건물 구조와 방위며 건물 색이 전부 똑같이 생겨 먹은 개성 없는 주택 단지라 위치 파악을 어렵게 했다.
이런 집도 무신 쪽으로는 장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공숙선이 말하길, 귀신은 주로 창문을 통해 드나드는데 그 건물은 창문 자체가 없는 집과도 같다고 했다. 통로가 현관문밖에 없다고, 그래서 이혜준과 협의 끝에 고른 집이란다.
그렇게 깊은 뜻이!
그 얘길 들은 뒤로는 별안간 자췻집의 구조가 세련돼 보이고 건물에 정이 갔다. 컨테이너 상자라고 욕한 걸 마음속으로 사죄하기도 했다.
지금 저렇게 헤매고 있는 지리교육을 보니 저 열 쌍둥이 주택 단지에 대한 호감도가 더욱 상승했다.
―설마 집주인이란 게 윤상현 친구가 피하라는 그 경영학 새끼는 아니겠죠? 난 그 새끼하고는 안 만나요.
“…….”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간 신령과의 거래나 계약이 꼬일 우려가 있어 차라리 말을 삼갔다. 못 들은 척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인간의 의사가 중요하지 않은 저것들은 인간의 거절도 거절했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뭐든 저들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아무리 필요 없다고 거절해도, 날 돕겠다며 끝까지 붙어먹으려고 설치는 윤상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교섭 스킬이 있는 전문가―무속인―라면 몰라도 나 같은 일반인이 산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저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나는 이만 운전하러 앞자리로…….”
이혜준과 붙어 있다간 향낭을 빼앗길까 봐 회피 스킬을 쓰며 허리를 일으켰다.
“이대로 내가 운전하면 되는데? 나도 너희 동네 가는 길 안다고. 나 요즘 거기 살잖아.”
눈치 없는 돌칼 정령이 끼어들었다. 저 오래 묵은 놈은 신문물에 호기심이 넘쳤고 운전대를 잡는 것도 좋아했다. 공숙선 본체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운전이겠지만.
“길은 내가 더 잘 알거든? 서둘러야 해.”
바쁜 척하는 게 아니라 실종된 관리실 직원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다급했다.
“아르망.”
그때 이혜준이 뜬금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고, 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마치 귀신처럼.
―왜 자꾸 불러 대, 이혜준. 시도 때도 없이 부려 먹으려고 드네.
영어를 사용하는 귀신은 이혜준의 부름이 달갑지 않은지 퉁명스러웠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 같아서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혜준이 그의 정체를 밝혀 주었다.
“박양우 네가 운전해.”
아르망? 박양우 씨, 프랑스계 교민이었어?
―알았다고. 자율 운전 모드로 전환합니다. 교통 감시 카메라에 대비해서 공숙선 씨는 핸들에서 손 떼지 마시고요.
말끝마다 토를 달 줄 알았던 박양우가 이혜준의 지시를 따랐다. 자동으로 시동이 걸리며 밴이 출발했다.
“쟤가 지금 나더러 운전하는 척만 하라는 거지?”
돌칼 정령이 물었다. 그릇이 외국어를 하면 회충도 자동 습득인 모양이다.
신령이 이 사람 몸에서 저 사람 몸으로 옮겨 다니며 수십 년, 수백 년의 지식이 축적되는 시스템이라면?
그런 추측을 바탕으로 한 실타래가 신흥 종교 대종사 영감님의 존재에까지 이르자 별안간 무시무시해졌다. 그릇 역할을 하던 숙주가 사망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란 뜻이니.
부디 그릇이 깨어진 그날, 그 시점에서 그자도 함께 소멸하였길 빌었다. 몇백 년, 몇천 년짜리 귀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태 회충 짓을 하며 돌아다닌다고 상상하면 끔찍했다.
“어. 일단 핸들만 잡고 있어 봐. ……이거 무슨 원격 조종 같은 거예요?”
이혜준에게 물었다.
아무리 박양우가 길 찾기 선수일지라도 차 안에 운전할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굳이 먼 동네에 위치한 그에게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조수석에는 고고학이 앉아 있었지만 눈이 아프다며 줄곧 끙끙댔기에 운전자 후보에서 열외. 이혜준은 이혜준이므로 열외.
“소개할게, 지헌아.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AI야. 박양우가 제멋대로 회사 자산에다 자기 이름 붙여서 사용 중이거든. 그 인간을 고소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
“기계음처럼은 들리지 않았는데요?”
내비게이션에다 전문 성우 목소리를 따 와도 로봇과 합성한 것처럼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방금은 박양우가 말하는 줄로 알았다.
“묻고 답하는 응답 기계나 인공 지능 비서가 아니다 보니까 실제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이 차량에 설치한 건 회사에 있는 AI의 초기 버전 복제품이라서 상당히 단순해. 운전할 때나 사용하잖아.”
딥 러닝 인공 지능 내비라고 소개하는 제품을 몇몇 사용해 봤지만 별거 없었다. 순간 상황 판단은 내 쪽이 우위일 때가 대부분이어서 내비가 보태는 말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그래도 미 국방성에 납품하는 방위산업체의 인공 지능이라면 일반 내비게이션보다는 더 높은 수준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혹시 차량 도난당하면 스스로 알아서 주차장에 돌아오기도 해요?”
“그래, 맞아. 자율성 인공 지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네.”
억…! 진짜?
농담으로 던져 본 말에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자 뒤늦게 충격이 찾아들었다.
“어엇…… 그럼 심층 학습을 통해서 성장도 하겠네요?”
“그냥은 무리고 활용할 만한 데이터를 제공받으면 수집해서 배워. 대규모 데이터일수록 성장에 도움이 되지. 그런데 나는 박양우하고 안 친해서 쟤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거든? 어지간하면 말도 걸지 않고 조용히 시키잖아.”
회사 대표가 사심을 담아 회사 소유 AI의 성장을 누르고 있다고 밝혔다.
아니, 사람도 아닌데 친하고 안 친하고가 무슨 상관이냐고. 동기였다면 ‘이 등신 새끼야.’라고 다정한 욕설 한마디 건네줬을 텐데.
“그나저나 저 아르망 씨는 언제부터 이 차에서 지냈던 거예요? 나는 까맣게 몰랐네.”
심각할 정도로 운전을 귀찮아하는 이혜준이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AI를 이용한 불법 주행을 참았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단순 내비게이션 용도로만 쓰기엔 아까운 기능이니까.
“저거 설치하고 나서 겸사겸사 서울-호령도 구간 완전 자율 주행 시험하러 갔잖아.”
‘무허가 주행 주제에 제멋대로 구간을 정해 놓고 달렸네? 사고 나면 어떡하려고 인공 지능의 판단 따위를 믿는대, 진짜.’
토정 이지함 선생님의 말씀은 철석같이 떠받드는 내 마음에 아르망 씨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국내 인지도의 차이가 크다 보니 저울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괜히 불법이겠냐고. 위험하니까 그렇지. 근데 토정비결은 불법 아니잖아.
“그래서 박양우 씨도 자기 분신하고 같이 내려오셨구나.”
그러게. 박양우는 함께 장거리 여행을 다닐 만큼 이혜준과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학부 학생들과 더 신나게 어울려 놀았지. 그의 목적은 처음부터 주행 테스트였던 거다.
“분신은 무슨. 개발 지분은 내가 더 많은데 그 미친 직원이 자기 명성 높여야 한다며 마음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라니까.”
“아, 그렇구나. 선배님은 개발 면에서 상당 지분을 보유하고 계셨군요. 박양우 씨는 미친 분이셨고……. 음. 역시 하늘 같은 선배님이 하시는 말씀이라 무한한 신뢰가 갑니다.”
“하, 강지야, 어색하게 되도 않는 아부 떠는 거 보니까 꿍꿍이속이 있나 보네. 말해 봐. 일단 들어는 볼게.”
역시 이 인간에겐 강지헌의 애교나 아부 따윈 통하지 않았다. 하긴 내가 들어도 어색했다.
밥은 나중에 먹자고 권해야 하는 내 마음이 무거웠다. 나야 먹고 자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놈이지만, 이혜준에겐 매 끼니 잘 챙겨 먹는 것이 인생의 낙이니까.
“우리요, 집에 들르지 말고 먼저 관리실 직원분들부터 찾으면 안 돼요? 얼굴을 미리 등록해 두지 않으면 검색하기가 어려울까요?”
공숙선의 안면을 인식했다는 AI의 존재를 방금 확인했다. 언제든 운용 가능한 기술인 듯 보이니 당장 추적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봤다.
사라진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은 어른들을 경찰에 신고해 봤자 실종이나 가출로 인정해 줄 리 없었다. 장난치지 말라고 역정이나 낼 거다. 사달이 나기 전에 우리가 직접 찾으러 나서야 한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타인을 구원해 주고자 무신에 몸담았다는 지리교육의 변명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지만, 이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산 사람에게 해를 끼칠 줄은 몰랐지.
몸에 침투한 윤상현의 영향일까. 놈도 이제 흉신으로 봐야 하는 거겠지?
이기적인 놈이 죽었는데 그 성품이 이타적으로 탈바꿈됐다는 가정이 잘못된 거였다. 저는 서창경에게 이용당했을 뿐이고 묶여 있다는 말에 경계를 누그러뜨려선 안 되었다.
“영상을 앞으로 돌려서 안면 스캔하면 돼.”
이혜준이 군말 없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접이식 테이블 위로 놓았다. 곧 내 손에 든 태블릿과 노트북의 화면이 공유됐다.
여느 때처럼 관리실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모니터 위로 사각형의 점선이 생성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선은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두 사람의 얼굴과 어깨 주변을 덮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처럼 인물의 정보가 부지불식간에 수집되고 분석당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자 그 편의에 대한 기대 심리보다는 거부감부터 피어올랐다. 상용화하지 않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기술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남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려에 그치지 않고 이미 대국민 통제용으로 가동 중인 독재 국가도 있고.
그사이 시비가 붙은 직원 한 명이 먼저 관리실을 나가는 모습이 잡혔고, 좌우로 분할된 모니터가 안팎의 상황을 각각 비추었다. 지리교육과 대거리하던 직원이 몸을 틀더니 별안간 시야에서 벗어났다. 다른 직원이 당황해서 관리실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곧 앞서와 마찬가지 상황에 맞닥뜨렸다.
직원들이 모니터에서 사라진 지 약 3초쯤 흘렀을까.
“두 분이 따로따로 이동하는 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