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래. 너 나아가고 있었어. 한동안 보이지 않았잖아. 조금만 더 거리를 두면 다신 그것들 보는 일 없이 완전히 극복할 거야. 그러니까 지헌아, 그거 제발 이리 내놔.”
담담하게 묻는 내 말 뒤로 나보다 더 괴로워하는 목소리가 따라왔다. 이렇듯 날 속여 온 이유가 불을 보듯 빤하니까 원망하기가 어려운 거다. 마음이 약해져 하마터면 물건을 건넬 뻔했다.
그러나 늦었다. 죽은 개놈마저 눈에 담은 뒤였고, 내겐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할 목적이 생겼다.
“이거, 향낭요. 잠깐 쓸 데가 있어서 그래요. 선배, 그냥 나 한 번만 믿어 주면 안 돼요?”
“신뢰 문제가 아니라…….”
“무신으로 해결하려는 거 아녜요! 어떡할 건지 내가 지금 보여 줄게요.”
돌칼 정령의 힘을 빌릴 작정이지만 일단은 이혜준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우리가 탄 밴이 놀이터 입구에 정차한 참이었다.
“뒷문 열고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야. 저기 귀신 있는데 너 혼자 들어가려고? 괜찮겠어?”
운전석에서 공숙선이 약 올리듯이 물었다.
“오, 귀신이 있다고? 어디 어디? 구경하고 싶다! 나 이런 거 완전 좋아한다구요!”
조수석의 고고학도 덩달아 호들갑을 떨어 댔다.
쓰레기들 입 닥쳐!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강지헌!”
“나오지 마요.”
따라오려는 이혜준을 도로 밀어 넣었다. 그 길로 자동차 바깥으로 뛰쳐나와 숨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들이 내는 소리가 휑한 놀이터 공간을 저렁저렁 울렸기에 모니터를 통해 미리 확인하지 않았더라도 위치를 쉽사리 파악했을 거다.
관리실 직원은 장소를 옮겨 시소를 타고 있었다. 직전에 본 그네 귀신은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 중이었고, 직원의 맞은편에 있는 건 또 다른 귀신이었다. 놈은 산발을 한 채 시소 위에 일어서서 풀쩍풀쩍 널뛰기를 했다. 소름 끼치게 높이도 뛰었다.
직원과 귀신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서로 마주 보며 큰소리로 웃고 떠들어 댔다.
“어지럽다. 그만 뛰고 앉아, 이 자식아. 하하하. 성호 너 머리에 종양이 생겨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니었나 보네. 그래그래, 건강하면 된 거지.”
직원은 눈앞의 것을 옛 친구로 착각하는 듯이 보였다.
『성호래. 나는 성호다. 히히. 히히히힛.』
풀쩍거리던 귀신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홱 고개를 돌렸다. 나를 쳐다본다.
안 보여. 내 눈엔 안 보인다.
쫄아서 간이 떨어질 새도 없이 직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기분 탓이 아니라 기어 오는 놈도 속도가 붙었다. 자석에 달라붙는 철 가루처럼 시선이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귀신을 부른다는 향낭의 효과인 듯했다.
그렇다면 산에는 더더욱 내가 올라가야지.
빠각.
잡생각을 접고 손날 목 치기 기술로 직원을 졸도시킨 후 그대로 메고 튀었다. 미친 듯이 달려서 밴 안으로 사람을 집어 던져 넣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죄송…, 죄송합니다.”
직원분에겐 들리지 않을 사과를 뒤늦게 했다.
“우와, 강지헌 너 10초 컷! 올림픽에 나가도 되겠다.”
“무슨 초월자를 보는 것 같았어요! 존나 신기록이다, 진짜!”
앞자리에서 덤 앤 더머가 쌍으로 의미 없는 칭찬을 갈겼다.
어떤 종목으로? 귀신에게 찍힌 먹잇감을 가로채는 데 드는 시간을 재는 경기?
“방금은 뭘 증명하고 싶은 거였는데?”
앞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이혜준이 흥분한 기색 없이 물었다. 기진맥진한 나 대신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직원을 일으켜 의자 위로 눕혀 주었다.
나는 우선 바깥의 동정부터 살폈다. 따라올까 봐 염려했는데, 놈들은 놀이터 입구 부근에서 머뭇거릴 뿐 출발하는 밴을 쫓아오려 들지는 않았다.
사실 물리적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다. 재수 없으면 눈만 마주쳐도 귀신에 씌어서 끈질기게 찾아오는 거다. 꿈에서라도.
이혜준 덕분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일단은 물러서는 것처럼 보였기에 안도하며 뒤늦게 대답했다.
“나 달리기 겁나 잘한다고요.”
“준족인 건 예전부터 잘 알았어.”
“이 속도로 챤 씨랑 같이 산에 올라갔다 올게요. 선배는 이 직원분을 지켜봐 주세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물론 고고학 놈과 직원분의 안위가 염려됐지만, 이혜준을 떼어 놓으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없는 동안 무신의 힘을 빌리고, 가능하다면 내 손으로 끝장을 보고 싶었다.
“난 가기 싫거든! 산에 모기가 얼마나 많은데 땀 흘리면서 뛰라고? 내가 차에 있을 테니까 너희 둘이서 다녀와.”
공숙선이 동행을 거부했다.
“공숙선 씨 말고 챤 씨 데려갈 거야.”
말은 이렇게 해도 이혜준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면 본체 역시 불러낼 작정이었다. 영결식―무기 수여식을 해야지. 목적은 신령을 베는 돌칼이다.
“벌레한테 물어뜯기는 건 내 몸뚱어리인데 뭐래?”
“그러자. 공 선생님, 지헌이 말대로 함께 가 주세요. 나보다는 더 든든할 테니까.”
좀 더 설득해야 할 줄 알았던 이혜준이 뜻밖에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달가운 마음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실망한 기색이 비치지는 않았지만 어떤 마음이 돼서 하는 소리인지 신경이 쓰일 수밖에.
당신은 나에게 누구보다도 고마운 사람인데, 이럴 때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선배 도움이 훨씬 커요. 선배가 미덥지 않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요.”
이혜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상식이 그가 내놓는 해결책을 따라가지 못할 뿐이었다. 초자연적 현상을 과학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도 있지만, 나는 아니어서, 그게 너무 미안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강지헌이 미덥지가 않아서 따라가서 감시하려는 거 아니라고. 처음부터 말해 왔지만 내가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한 적 없잖아. 나 박양우처럼 무신론자 아니거든?”
“그건 그렇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더라도 네 결정 역시 존중할 각오가 돼 있어. 다만 나는, 내 선에서 해 줄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 주고 싶지. 훼방 놓으려는 게 아니고 필요할 때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내 시야 안에 널 두고 싶은 거야.”
강지헌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
허벅지 위로 걸쳐 둔 양손이 움찔했다. 제풀에 찔려서 그를 오해하고 넘겨짚었다는 사실에 창피함을 느끼면서도 기쁜, 기묘한 고양감에 휩싸였다.
내리깐 눈에 이혜준의 손이 보였다. 뜬금없이 지척에 놓인 그 손에 닿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러잖아도 어장 관리하는 꼴이 날까 봐 조심하는 중이기에 더더욱 이 남자에게 결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이혜준이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리면 안타깝고 마음 아프다며 손깍지를 끼었을 때 개수작을 부린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순간 돌이켜 보니 그건 단순한 위로였을 것 같기도 했다. 나 역시 지금 연애 감정을 떠나서 호의 충만한 이 기분이 그에게 닿길 바라지만 말로써는 전달하기가 어려우니까.
뇌세포가 말랑말랑해져 가던 그때, 이혜준이 훅 치고 들어와 날 감동시킨 진짜 목적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강지야, 네 쪽으로도 드론 한 대만 띄울게?”
“…….”
응, 안 돼. 드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직전까지 느끼던 그와의 유대감이 숭덩 깎여 나갔다. 무슨 꼴을 보일 줄 알고 드론을 허락할까. 나도 내 영결식 참여는 처음이라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딱 한 대만.”
“사양할게요.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챤 씨는 장식용이 아니잖아요? 누가 소개해 준 특별 보디가드인데.”
“…….”
대답 없이 끙 앓는 신음만이 돌아왔다. 내게 챤 발름 요팟을 소개한 장본인이 ‘저놈 보디가드 아니고 장식용 맞는데?’라는 본심을 밝힐 순 없는 거다. 제 발등을 제가 찍은 거지.
이혜준은 동행을 포기하는 대신에 당 떨어지기 전에 미리 마셔 두라며 초콜릿 음료수를 강권했다. 그가 심심하면 내미는 이 제품은 최근에 신상품이 나왔는지 ‘프로틴’이 첨가돼 있었다. 근육을 챙기려 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만한 문구였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강지헌이 이 음료를 마시는―마셔 주는― 이유는 마실 때마다 이혜준이 세상 뿌듯한 얼굴을 해서였다. 그뿐이다.
“나는 네 전화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언제든 불러, 응?”
이러고 있으니까 꼭 호령도 숙소 현관 앞에서 있었던 일이 재현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땐 긴장감이 큰 탓에 한 모금 넘기다 말고 도로 건넸지만, 이번엔 억지로라도 전부 들이켰다.
8그램의 당단백질 신령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되길 기원하며.
∞ ∞ ∞
지리교육이 제작한 향낭의 효과는 직방이었다. 관리실 직원분을 쫓아가던 귀신마저 돌려세워 도로 산을 내려오게 할 정도로 부적이 잘 들었다.
원래는 산정에 있는 팔각정까지 가서 의식을 치를까 했는데 따라붙는 것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산을 타다 중도에서 멈추고 말았다.
“음. 이 자리도 그리 나쁘지는 않네. 가뭄에 계곡물도 바짝 말라 있고.”
“강지헌 정신 승리하면서 아무 말이나 씨불여 대는 거 좀 봐라. 큭큭.”
사실은 건너편에 귀신이 보이는 바람에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주춤하는 나를 공숙선이 키들키들 비웃었다.
‘너라면 귀신이 저기 있는데 다릴 건널 수 있겠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내 말에 공감하지 못할 놈들로만 이루어진 팀이라 내가 많이 외로웠다.
내가 비정상인 거니?
“챤 씨 있으니까 가까이엔 못 오겠지?”
공숙선의 본체에서 벗어난 돌칼 요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제발 그렇다고 해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