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88)화 (88/96)

88화

환한 대낮에 지나다닐 땐 신경 쓰이지 않았던 이정표, <공원묘지 관리사무소 800M>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이 부근은 고구려 석관묘가 산재해 있는 유물 밭이라 오래된 것들도 많을 터였다.

그렇다고 한들 산 제물의 피를 머금은 돌칼에 깃들었던 정령보다는 ‘무덤까지 갖춘, 곱게 죽은’ 귀신일 테지만.

정화까지 필요한 상태였다니까 산 채로 심장이 뜯기고 인신 공양을 당한 돌칼 정령은 그야말로 사기로 점철된 원혼이었을 거다.

서창경의 말에 따르면 여긴 주인이 떠난 산이었다. 살인 사건도 있었고,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다 보니 나쁜 기운이 계속해서 모이고 해서 큰 신이 탄생할 기회가 희박해졌다고 한다.

「나름 명산으로 이름났는데? 해발이 낮아서 사람들 많이 찾아와요.」

「그건 인간 기준 좋은 산이고.」

「그럼 이런 산은 어떡하면 산신이 다시 돌아오는데요? 나무를 잔뜩 심으면 되나?」

「한 100년쯤 입산 금지하고 인간이 접근하지 않으면?」

말도 되지 않는 해법이었다.

등산 왕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집 근처 야산 정복을 포기하지? 더군다나 등산로를 개발한다며 곳곳에 나무 덱 계단이며 인공 구조물을 설치해 놓았는데 산문을 닫으면 그거 다 못쓰게 되잖아. 아깝게.

「그냥 나무 잔뜩 심어 주고 등산 계속하면 안 돼요? 정기 훼손되지 않게끔 자연 보호하면서 쓰레기도 안 버리고 조심조심 다니면 되잖아.」

「풀 한 포기 밟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렇게 하라지.」

시발, 풀이 무슨 자연이야. 아니, 자연 맞긴 한데 인간적으로 풀 밟는 것 정도는 봐줘야 하지 않나? 산신령은 인간 아니라서 인간 이해 못하나?

그땐 서창경에게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이라 무신에 덜 물든 상태였다.

‘산신령 새끼, 저는 공중 부양하며 다닌다고 형평성에 어긋난 기준만 들이대네.’ ―이런 삐딱한 마음을 눈치채이는 바람에 그날은 또 한바탕 정신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른바 풀떼기돌멩이론.

천지 만물에 신령이 깃들어 있으므로 풀을 풀같이 보지 말고 돌도 그저 돌처럼 보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이혜준 같았으면 ‘깃들어 있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하며 흘려 넘길 얘기였다.

옛일을 떠올리니 가뜩이나 우중충한 기분이 더 뭣 같아졌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부대낀 사이였건만 서로 좋은 얼굴 한번 비추는 법 없이 물어뜯으며 지내 왔다. 이혜준과는 웃음이 삐져나오는 게 자존심 상할 정도로 웃는 일이 일상인데 말이다. 분명 개그 코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개놈하고 나 사이의 사주엔 살이 낀 게 틀림없어.

“야. 설마 저 신령님들이 너 해코지하려고 모이겠냐? 네가 그 부적을 들고 설치니까 강제로 끌려 나오는 거지. 지가 불러 놓고는 지랄이야.”

그러게. 강지헌이 잘못했네.

“제가 바른 말씀 하시는 공숙선 씬 오늘 처음 접해 봐서 그런지 되게 낯선 기분이 드네요?”

“뭐래? 나는 항상 진정성 있는 말만 골라서 내뱉는 인물이야!”

“나한테 거짓말 많이 하셨잖아요.”

“지금까지 널 속여 온 행동은 전부 계약 탓이잖아. 거짓말하게끔 시킨 서창경과 이혜준이 나쁜 놈들이지. 누가 옳고 그른지 그거 구분 똑바로 해야 한다, 너? 곧은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해.”

뚫린 입이라고 진짜.

“예. 오늘따라 교주님이 될 자질이 충분해 보이십니다.”

“오! 너도 그렇게 생각해? 강지헌 갑자기 사람 보는 눈이 생겼나 본데?”

사기꾼 새끼라고 욕했더니, 공숙선이 볼까지 발갛게 물들이며 기뻐했다.

“그럼 지금부터 진정성 넘치는 교주 후보분께 질문 몇 개만 드릴 텐데요, 꾸밈없는 답변 바랍니다?”

“뭐? 뭐가 궁금해? 나 교주 되면 제일 먼저 누구부터 손댈 거냐고? 내가 살생부 빼곡하게 작성하고 있거든. 올바른 새 세상을 열기 위해서 우리 신령님들께 해 끼치는 놈들은 다 쳐 내 버릴 거라고, 내가!”

그 저주 명단의 1순위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대번에 언짢아졌다. 고대 유물처럼 이 인간 역시 정화할 수 있다면 참 안심이 될 텐데.

“공숙선 씨, 챤 발름 요팟 사주는 알아요?”

“그건 모르지. 기원전인지 그 후인지 몇 년도에 죽은 신령인지도 몰라. 저도 모르더라고.”

너무도 당당한 대꾸에 이런 상황을 짐작했으면서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주도 모르면서 영결식은 어떻게 해?”

“나는 사주팔자 공부 안 해서 사주 그딴 거 가지고 있어도 무용지물이야. 철학관 차리고 점쟁이 될 것도 아닌데 그걸 익혀서 뭐 하려고.”

역학은 무속인의 영역이 아닌 역술인의 영역이라고 선을 긋는다. 공숙선이 통계 자료를 참고삼아 남의 미래 같은 걸 점치고 라이프 컨설팅을 해 주는 모습은 나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서창경 역시 사주나 주역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반 무속인처럼 신령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아니었다. 의심 많은 성격상 귀신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 한마디도 믿지 않았고, 신점도 우습게 봤다. 죽은 자는 그저 사령으로나 쓰다 버릴 뿐이었다.

“절실함이 안 느껴지네요? 요즘 보충 활동으로 사주 공부하는 무속인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만신 조상희도 사주 가지고 나랑 윤상현을 엮었잖아요.”

“엇, 그러게. 그 할망구가 신기가 떨어졌나. 왜 사주까지 챙겼지?”

“직업의식이 투철하다 보니 영결식 성공률을 높이려고 이것저것 다 때려 박았겠죠. 그런 방식이 잘 먹혔던 바람에 결국 혜준 선배님 만나기 전엔 아무도 나한테서 윤상현을 못 떼어 냈잖아.”

그럴싸한 답을 유도해 주니, 공숙선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역학에 손대지 않는 이유를 부연 설명했다.

“그래도 나는 신력이 높은 인물이 굳이 사주나 주역 같은 데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신이 실리면 아주 많은 것이 보여. 굳이 생년월일시를 넣지 않고도 과거하고 현재는 어느 정도 읽어 낼 수가 있거든. 상대방 가방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없어진 물건은 어디에 있는지, 그런 건 당연히 보이고 어떨 땐 30년 전에 살던 집 대문 색깔도 알아맞힌다니까.”

미래까지 모조리 내다본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교주님이 될 자질이 아직은 19.2퍼센트가량 부족해 보였다.

이것으로 공숙선은 사주 없이도 의식을 치를 수 있다는 확인은 마침.

고고학 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대만 귀신이 생년월일시를 따지지 않고 처음 만난 외국인들을 낚은 것처럼 주술의 조건만 성립하면 되는 거였다.

“저주 걸 때에도 사주 필요 없어요?”

“나는 필요 없어. 살 날릴 때 그 새끼가 갑술년에 태어났는지 임인년에 태어났는지 알 게 뭐야. 내가 모시는 신령이 얼마나 강력하고, 주술이 먹힐 조건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가 중요하지.”

“그럼 이제 좀 더 진정성 넘치게 대답해 봐요. 공숙선 씨, 혜준 선배님한테도 살 날렸을 거야. 그치?”

살생부 명단 1순위 후보의 이름을 넌지시 대 보았다.

“야. 뭐. 그걸 왜 물어. 너 그놈한테 일러바치려고?”

펄쩍 뛰는 걸 보니 짐작대로 이 인간은 이혜준을 교주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기는 듯했다. 눈 마주치는 족족 모시는 신이 도망갈 테니까.

“아냐. 선배님도 벌써 알고 있던데, 뭘. 이혜준 없애 버리자면서 만날 챤 씨 부추긴다면서요.”

“그래 시발, 이혜준 뭔데? 생각날 때마다 살 날리는데 절대 안 고꾸라져. 그거 사람 새끼 맞아?”

공숙선이 살인 미수에 그친 주술을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다.

상대가 무신에 방탄조끼 두른 혜준 선배 아니었음 어쩔 뻔했냐, 진짜.

이 새끼도 하루빨리 사회와 격리시켜야 마땅하건만 겉보기로는 번듯한데다 살성을 타고났다는 증거를 댈 수가 없어서 골치 아팠다. 이런 유의 괴물은 이마에다 ‘살성 탑재 주의’라는 개 조심 경고문 같을 걸 써 붙이고 다니게 하면 훨씬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질 텐데.

저 정도로 저주술에 광기를 쏟아부으면 본인에게도 나쁜 기운이 돌아오련만,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진짜 아이큐가 50이라서 저러나?

“공숙선 씨도 눈치챈 줄 알았는데? 우리 선배님 사람 아니고 방상시잖아.”

“놀고 있네. 방상시는 뭐 아무나 되는 줄 알아? 신령을 볼 줄도 모르는 방상시가 어딨어? 게다가 방상시는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하지 이혜준처럼 아예 영혼 자체를 말살하지는 않는다고. 그거는 명백한 신의 영역이다. 천벌 받을 짓을 하는 거지.”

“혹시 영살靈殺 말하는 거?”

그게 영살로 귀결되나?

더럭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야-, 서창경네 개 3년이면 영살도 배우는구나. 맞아. 이혜준 그 새끼는 저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힌 만큼 분명 끔찍한 몰골로 뒈진다. 전문가인 내가 잘 알아. 서창경보다 더 고통받으면서 죽어 갈 거야. 그러니까 더 피 보기 전에 우리 가련한 신령님들 작작 좀 괴롭히라고 해.”

너희 가련한 흉신들 말이야?

비웃음이 나오는 개소리의 나열이지만 저주는 저주였다. 듣고서는 마음이 불편해질 수밖에.

겁 없이 사령을 가지고 놀던 서창경도 영살만은 피했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신벌이 두려워서.

지금 공숙선이 공갈 협박을 하는 게 아니라면, 무신에 몸담은 자들이 벌벌 떨며 금기시하는 천벌 받을 행위를 이혜준은 여태껏 아무런 자각 없이 해 왔다는 거다.

처음에는 천운을 타고났다는 그의 말을 긴가민가하며 믿는 쪽에 가까웠다. 기적 같은 일을 연달아 목도하고 났더니 나답지 않게 ‘이혜준이 신 대신 악귀를 처단해 주고 하늘의 비호를 받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는 희망 어린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이 붙어 지내다 보면 진실이 드러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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