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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89)화 (89/96)

89화

확률적으로 따지면 딱히 운이 좋은 편도 아니었다.

심심하면 가구 모서리에 발가락 찧는 이혜준, 제 키와 대한민국 평균 가구 높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내가 찬장 문 열 때마다 옆에 서 있다가 머리통 들이받는 이혜준, 그것도 못 피하는 이혜준, 세차한 직후에 소나기 맞는 이혜준, 강 씨 형제들과 화투 치고 포커 쳐서 돈 따 본 적 없는 이혜준, 뽑기 게임에서 꽝만 걸리는 이혜준, 그래도 끝까지 뻥치고 우기는 이혜준…….

「있지, 원래 나처럼 대운에 강한 사람은 소소하게 운이 샐 수도 있는 법이야. 천운은 따로 정해져 있어. 대수롭지 않은 건수는 무시하면 돼.」

이혜준은 전혀 기죽지 않고 주장했다. 멘탈이 튼튼하려면 일단 낯짝부터 철판으로 튼튼하게 무장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대사였다.

‘좋았던 일만 집계하면 나라도 만사 대통이라고 우기겠다!’

날 안심시키고자 지어낸 말이라고 여기니 고마운 한편으로 마음의 빚이 더 불어나는 듯도 했다. 받은 것 이상을 돌려줘야 마땅한데 내 쪽에서는 이자는커녕 줄만 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점점 빚이 늘어만 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하튼 이혜준이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인 건 맞는데 그의 천운까지 믿기엔 미진한 구석이 남았다. 그 와중에 그가 천벌을 받아 끔찍하게 죽을 거라는 공숙선의 저주를 들으니 불안해질 수밖에.

뒤늦게 호령도 토지신을 짱돌로 쳐 죽인 일이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죽여 없앨 일이 아니라 한 줌 흙의 형태로라도, 하찮은 벌레의 형태로라도 남겨 둘 것을 그랬다.

어차피 쌓인 업보가 있는 나야 영살을 저지르고 신벌을 받아도 되지만, 이혜준은 그래선 안 된다. 불확실성 위에 그의 운을 두고서 모험할 순 없었다.

“서창경이 어떻게 뒈졌는지 알려 줄까?”

“내가 알 바야?”

이혜준을 향한 걱정이 호기심을 말끔히 꺾었다. 그 새끼가 왜, 어떻게, 죽었나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나타나지 못하게끔 처리하는 것’이 나의 숙제였다.

돌칼에도 영혼까지 말살하는 기능이 탑재돼 있다면 좋으련만 과한 희망이다. 이혜준의 기이한 능력이 사람을 해치는 데 사용되던 그 유물에서 발현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너하고 말을 섞었다간 자비로운 신령님도 결국 성을 내고야 말겠다. 너는 그 냉담한 성정부터 뜯어고쳐야 해. 관심 없더라도 신령님 말씀은 들어 주는 척이라도 해야지 복을 받는 거라고. 알고 보면 네 화는 전부 네 성질머리가 불러들인 거라니까.”

이런 말을 수년간 수백 번씩 듣다 보면 이성적으론 아닌 걸 알아도 뇌리에 잔재할 수밖에 없었다.

“냉담 좋아하시네. 혜준 선배님이 매일같이 하는 얘기 못 들었어요? 태어나서 나처럼 다정다감한 사람은 처음 만나 봤다잖아요. 내가 얼마나 마음이 따스한 사람인데. 공숙선 씨야말로 사람 볼 줄을 모르네.”

“하이고. 이혜준이 멀쩡한 애 다 버려 놨네. 강지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태도가 나빴다며 반성하는 양심이라도 남아 있었는데 말이야.”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며 땅굴 파는 걸 ‘멀쩡한’ 상태라고 말한다.

상대가 인간쓰레기이기 때문인지 욕을 들어도 아무런 대미지가 없었다. 귀신에게 불친절한 나 자신을 반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잔말 마시고 저것들 접근하지 못하게 결계나 치세요. 나 여기서 혼사굿 치를 거야.”

“뭐-? 나 지금 북 없어! 아무리 나라도 내 북 없이는 신력 못 끌어올려. 그 의식 못 연다고!”

공숙선이 펄쩍 뛰며 거부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이혜준이 수상쩍게 여기고 따라붙을 듯해서 악기는 일부러라도 챙기지 않았다.

“우리 교주 후보님 멋대가리 없게 약한 모습을 보이시네? 진정성 있는 사이비 종교인이라면 악기가 없어도 굿 주관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약식으로, 예? 내가 휘파람 불어 줄게.”

“야! 사이비 아니거든? 그리고 주파수 맞춰야 하는 사람은 굿 주관하는 난데 네가 뭐라고 휘파람을 불어? 서창경이 그따위로 가르치디?”

엇. 옆에서 아무나 장단만 맞춰 주면 되는 거 아니었나? 굿할 때도 북재비가 보조 역할을 하잖아.

개놈이 음파를 이용해 신을 부르고 주술을 행하는 작자가 아니어서 내게는 생소한 분야이긴 했다.

“그럼 님이 직접 휘파람 부세요.”

“내 전공은 타악기라곳!”

거참, 연장 탓은 오지게 하네.

“도굴했다는 종은 어쨌는데? 나랑 선배한테 주술 걸려고 했던 낡은 종 있잖아요, 왜.”

“정화해서 단물 다 빠진 물건을 얻다 써? 멍청한 중개인한테 도로 넘겼지.”

저주용 유물을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업종까지 존재하다니 세상 말세다. 그나저나 언제 어디서든 굿판을 열 수 있게끔 캐스터네츠라도 들고 다닐 걸 그랬나?

“그럼 짝짝이처럼 돌멩이 두 개를 마주쳐서 딱딱 박자 맞추면 되겠네. 말해 놓고 보니 괜찮은데?”

응용력을 쥐어짰다. 안 되면 손가락을 튕기거나 손뼉을 치는 방법도 통하지 않을까? 둘러보니 주변에 ‘타악기’가 차고도 넘쳤다. 공숙선 좋겠네.

“이 무식한 놈이 날 뭘로 보고……. 내가 이래 봬도 대한민국 최고 고수鼓手 중 한 명이라고 불리는 몸이란 말이야.”

평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상처 입은 짐승이 신음을 꾹꾹 참는 것처럼 억눌린 음성이 새어 나왔다.

허구한 날 쓰레기 소릴 들으면서도 태연하기에 자존심 따윈 없는 인간인 줄로 알았는데, 공숙선의 역린은 인간성 문제가 아니라 제 전공 분야였던 모양이다.

<대한 극락 불토 수양회>에 의탁하면서 교주님에겐 어울리지 않는 북춤은 버리겠다더니?

“쪽팔리면 나도 옆에서 거들게.”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돌멩이를 줍는 대신에 손전등 삼아 쥐고 있던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풀었다. 공숙선의 공연 동영상을 검색했다.

단체 공연밖에 없었지만 하이라이트로 올라온 영상에는 홀로 북을 치는 이 남자를 담은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부분 신들린 연주라고 평가받는 구간이었다.

두리둥둥 둥둥둥둥.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어수선함 속에서도 장단은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중심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이미 신령이 실렸는지, 신령을 부르는 중인지, 어떤 상태일 때의 장단을 사용해야 굿에 효험이 있는지 뚫어져라 영상을 쳐다보아도 내 능력으론 판단할 길이 없었다.

‘이왕 몸 상할 거, 없던 신력이라도 생기든가. 이래서야 약쟁이가 된 보람이 없잖아.’

이혜준에게서 옮았는지 내 몸 상태에 대한 걱정과 불안보다는 한만한 감상부터 불쑥 튀어나왔다.

“이거면 주파수 맞출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공숙선은 내밀어진 전화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너 이리 와서 나란히 서라.”

“……!”

재빨리 공숙선의 상체로 손전등의 방향을 잡았다. 아까 딱밤을 맞은 부위가 퉁퉁 부어오른 것 빼고는 온전한 낯빛이었다. 만신 조상희처럼 흰자위까지 시꺼멓게 물들어 두려운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신령의 경지에 들었다는 느낌이 왔다.

무신에는 진심인 양반이라 이혜준의 포로가 되어서도 기도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더라니, 북소리가 흐르자마자 곧장 몰입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돌칼아, 이쪽.”

주례를 마주 보고 선 자리로 챤 발름 요팟을 불렀다.

『내가 신관에게서 떨어지면 의식을 열 수가 없다. 지금 누가 숙선에게 힘을 넘기는 중이라고 생각하지?』

“……!”

어, 그러게? 본인 혼례식인데 수고가 많구나.

결국 돌칼 정령의 힘을 빌려서 여는 의식인 것이다. 나는 걸음을 옮겨 두 사람과 하나의 신령이 일렬로 늘어서는 대형을 만들었다. 셋 모두 같은 방향의 허공을 바라보는 어색한 모양새였다.

“결계는? 저것들이 도중에 훼방 놓으면 어떡하려고.”

점차 수가 불어나는 망자들을 곁눈질했다.

내가 든 향주머니 부적으로 저들을 초대했다는 얘길 듣고서도 여전히 불청객을 맞는 것처럼 불편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개개는 잡귀 나부랭이일지 몰라도 수백의 집단으로 불어나면 공숙선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일 텐데 말이다.

그런데도 겁 없이 고집을 부린다면 이 음흉한 새끼가 무슨 꿍꿍이속이 있나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속셈이 있길 바라기도 했다.

‘둘 중 하나라도 불러들여라, 공숙선.’

“결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곳에서 의식을 마무리하고 너희가 돌아올 때 길을 잃지 않게끔 너희 이름을 불러 줘야 해. 그러니까 동행할 수가 없어.”

돌칼 정령 너머의 공숙선이 말했다.

“장소를 옮겨야 한다고?”

“넌 우리 신령님이 숨 거두신 곳으로 가야지.”

“뭐? 저승혼사굿 하러 저승까지 가야 해? 스케일 뭔데?”

영매의 신력이 높다고 이렇게까지 스케일이 웅장해질 일인가 싶었다. 나는 그저 무기 하나만 받으면 그뿐인데, 과했다.

산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 앞으로 데려가 혼사를 치르는 방식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와 비슷한 맥락 같았다.

심지어 나와 윤상현의 경우, 부부 무덤이라며 쌍분까지 만드는 짓거리를 해 놓았다. 제물이 저주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게끔 생문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두는 촘촘한 그물의 일환이었다.

「강지헌, 너 뭐 윤 의원 집안에 잘못한 거 있어? 이건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원수 새끼 말살하는 각인데?」

첫 번째 혼사의 전말을 파헤칠 때 겹겹이 쳐진 덫에 서창경은 경이로워했고, 또 배울 점이 많다고도 했다.

내가 그쪽 집안에 잘못한 일이라면 상놈으로 태어난 거? 뒤탈 걱정 없이 욕심껏 저주를 쏟아부어도 괜찮은, 만만한 잡것으로 인식된 게 유일한 잘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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