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육친에 의해 팔아넘겨진 내 혼백의 대가가 얼마였는지를 떠올리니 새삼 내 처지가 서글퍼졌다. 이젠 화가 나지도 않았다.
‘또 그런다, 강지헌. 네 잘못인지 아닌지 제대로 구분해. 네 의지로 선택하지 않는 일로 자책하지 말라니까.’
여느 때처럼 다정다감한 음성이 곤두박질치는 감정을 훅 낚아채어 올렸다. 흠칫해서 주변을 돌아보는데 실제 이혜준이 뒤따라온 건 아니었다.
헛소리도 아주 잘 들리고 약에 찌든 상태도 쓸 만하네.
환청에 힘입어 가까스로 잡념을 떨쳤다. 또다시 죽은 자를 혼인 상대로 맞이하는 거부감 또한 떨치려고 노력했다. 서둘러야지. 질질 시간을 끌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내겐 저승문 너머까지 들여다볼 능력은 없다.”
저승까지 가야 하느냐는 물음에 공숙선이 답했다.
“그러면?”
“내 감각 범위 안에 존재하고 길을 열 수 있는 걸 보면 그곳이 영계나 저승은 아니란 거지. 다행인 줄로 알아.”
“……?”
다행인가?
“강지헌 너는 기본적으로 신령님들에 대한 존중이 없어서 틀림없이 지옥행인데 거기 떨어지면 나는 너 못 건져 낸다. 너처럼 영혼이 차갑고 메마른 놈은 신령님과 소통하기가 너무 어려워. 너 같은 놈의 눈을 밝혀 주려고 내내 마약을 쓸 순 없잖겠어. 약값 아까우니까 제발 알아서 눈 떠라.”
잔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뭐가 다행인지 궁금해서 집중했다가 괜히 내 귓구멍만 썩어들어 갔다.
개놈이 없다고 이젠 이 새끼가 시비를 거네? 과연 저주 전문 캐릭터다웠다.
너하고 개놈하고 지리교육은 영혼이 맑고 순수해서 귀신을 접하고 소통하는 줄로 아는가 보지.
내 귀안을 틔우려 애쓴 걸 좋은 일 해 줬다고 착각하는 것도 웃겼다. 귀신을 다루는 서창경과 지리교육이든, 귀신을 섬기는 공숙선이든 선택받았다는 우월의식에 찌든 건 매한가지였다.
“왜 신이 실린 상태에서까지 개소리가 작렬하는데? 정작 당신 몸주 신령은 내가 저를 떠받들든 말든 관심도 없는데 공숙선 씨가 뭐라고 나대세요? 몸주님 뜻을 받들어서 얌전히 계약이나 이행하시죠.”
“강력한 힘을 다룬다는 기쁨은 정말 얼마 못 가. 단물이 빠진 껌 씹는 기분 알지? 딱 그거라고.”
세상 다 산 듯 씁쓸한 어조였다.
저주용 유물 종으로 저주를 할 수 없게 된 것처럼 돌칼 정령이 제 사악한 취미를 보조하는 도구가 돼 주지 않자 무용지물인 기분이 든다는 거다.
이혜준의 본가에 묶인 유물 정령들 역시 다들 정화된 놈들이라는데 산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집 정령들로 몸주를 바꿔 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공숙선도 슬슬 알아차릴 때가 되었다.
이혜준에게 날리는 살이 줄곧 실패해 온 데에 돌칼 정령의 저주적 무능함이 작용했다고 생각하니, 돌칼 정령이 조금 예뻐 보였다. 그 방면으로는 앞으로도 줄곧 무능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지금 공숙선 씨 지루한 고민 상담해 줄 시간 없어. 우리 선배님 기다리신다.”
“썅. 너 이 새끼 어른이 말을 하는데…!”
“너무 늦어지면 이혜준 선배님이 걱정돼서 올라온다고. 나도 모르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모양인데 그 선배님이 이 자리에 있어도 괜찮겠어요?”
개소리가 더 길어지기 전에 나도 그를 압박했다.
“어…… 너… 뭐 필요한 거 있다며.”
정말로 꿍꿍이가 있는지 공숙선이 우물쭈물 화제를 돌린다.
“그랬죠. 돌칼이 필요해요.”
“그럼 빨리 시작하자. 네 예물 가지러 가야지.”
“아. 이거는 그런 목적이었던 거야? 그럼 나는 준비됐어. 시작해요.”
예물이 여기에 없었구나.
비록 실물 껍데기는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지만 귀의 영역에 속한 돌칼은 챤 발름 요팟이 품에 지니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너희 둘은 상성이 어긋나서 한 번 만에 파장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히 강지헌 넌 의식적으로라도 우리 신령님을 밀어내지 마라. 계약이란 점 명심해.”
공숙선이 평소보다 무게감이 실린 음성으로 경고했다.
“안 밀어내요.”
어떻게 만든 기횐데 사사로운 감정으로 망칠까.
곧 또 다른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서창경이 그토록 날 붙잡아 두길 원했던, 어둡고 습한 망자들의 세상이.
귀안을 틔우려 부적을 눈에 문지르기 직전에 느끼던 긴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너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받아들이는가.”
『너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을 받아들이는가.』
공숙선과 챤 발름 요팟의 목소리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동시에 뇌리를 파고들었다. 나는 평소에 소원했던 바, 한 번 사는 욜로 인생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입 밖으로 꺼냈다.
“받아들인다.”
죽음 뒤에도 내가 존재하며 또 다른 형태로서의 삶이 도사린다는 생각만으로도 인생의 고달픔이 배로 다가왔지만 죽은 자와 연을 맺기 위해선 이걸 인정해야만 했다.
대답과 동시에 명전이 된 듯 시야가 온통 하얗게 번졌다. 다른 세상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각오했던 음습한 기운은 없었다. 고대의 귀신들이 같이 죽자며 좀비 떼처럼 달려드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통을 달구듯 햇볕이 쨍했고 공기는 건조했으며 간간이 잔모래가 섞였지만 선선한 바람마저 불어왔다. 고온다습하다고 알려진 중남미 저지대의 기후가 아니었다. 돌칼 정령의 출신지를 떠올리고는 내가 딛고선 돌바닥이 고원에 위치한 장소가 아닐까 유추해 봤다.
내 앞으로 치수에 맞추어 재단한 돌길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직선의 끝이 어디인지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았고, 도로 폭만 해도 20미터 8차선 도로의 두 배는 돼 보였다.
길 가장자리로 크고 작은 피라미드와 사원으로 보이는 건물이 열 지어 서 있는 이곳은 어떻게 보아도 종교적 색채가 짙은 구역이었다. 혹은 종교 도시 그 자체일지도.
인적도 없이 적막에 휩싸인 너른 광장 길을 파노라마 촬영을 하는 것처럼 쭉 훑었다. 부분적으로 소실된 유적 사진보다 훨씬 정돈된 풍경이라 익숙함보다는 이질감이 들었다.
흠 없이 완성된 형태가 부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여기가 테오티우아칸인가 보네.”
테오티우아칸 문명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비전문가가 파고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인근 마야 문명이나 후대 아스테카 문명에 비교하면 확보한 정보가 미미했던 탓이다.
심지어 ‘테오티우아칸’조차 멸망 후 붙여진 이름이고, 멸망의 원인도 불분명하며, 원주민이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적은 여태 복원 중이고, 대대적인 인신 공희를 후대에 퍼뜨렸다, 라는 사실 정도만 머리에 새겨 둔 상태였다.
오랜 세월 흑요석 돌칼의 기억만을 빨아들이며 갇혀 지내던 챤 발름 요팟이 뒤를 돌아보았다.
『글쎄다…….』
어딘가 석연찮은 기색이다.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방문했다고 감격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나도 돌아보곤 우리가 어느 거대한 피라미드 앞 계단 끝자락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돌을 쌓아 올려 건설한 피라미드가 아니며, 과거 어느 한때 실재했던 장소조차 아니라는 사실 역시.
수십 미터 높이의 계단 양옆으로 층층이 쌓여 햇빛에 눈 부시게 반사되는 건 다름 아닌 죽은 사람의 머리뼈 무더기였다. 해골로 이루어진 피라미드였고, 제물 중 하나였던 챤 발름 요팟의 두개골도 이 구조물 벽 어딘가에 박혀 있을 것만 같았다.
수백 수천 원혼의 시선이 내게로 내리꽂히는 기분이었다.
이 와중에 찬란한 태양의 존재가 위화감을 부추겼다. 어두울 때 멋모르고 제전을 오르지 말고 맨정신으로 건축 자재를 확인한 후 등반 여부를 결정하라는 듯한 악의 섞인 배려가 와닿았다.
“인주 설화야? 아니지. 실제 유적지에서 매장된 인골이 발견되고 있으니까 설화가 아니고 사실이라고 해야 하나. 건물 지을 때 산 사람을 엄청 집어넣었나 보네. 뭐 하는 신이기에 이렇게 으스스해?”
『어둠의 신에게 지지 않으려면 산 제물을 바쳐야만 해.』
그렇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얘가 좀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내 눈엔 네가 모시는 신이 어둠 그 자체 같은데 그분은 자기와의 싸움 중이시니?
“아니, 그러니까 여기 피라미드 제단에선 누구한테 제물을 바치느냐고. 다신교라고 해도 제단 하나를 다 함께 나눠 쓰는 건 아닐 거잖아?”
룩소르 카르나크 신전 유적군처럼 건물 규모며 수가 상당하니까 아몬 신 구역, 몬트 신 구역, 무트 신 구역, 콘스 신 구역, 이런 식으로 신역을 나누지 않았을까 해서 묻는 말이었다.
역사에서 잊힌 신의 이름이 튀어나온다고 해서 내가 알아들을 리는 없겠지만, 무엇을 관장하는 신인지는 알아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것이 아닌가. 해골로 둘러싸인 이 구조물은 척 봐도 좋은 의도로 쓰인 장소는 아니잖아. 그들 기준으론 바람직한 쓰임새였겠지만.
내 목적을 방해받을 낌새가 보이면 굳이 이 피라미드를 오를 이유가 없었다.
『젊은 태양이 더 많은 피를 원했기에 모든 신들이 이곳에서 희생했다. 그러므로 모든 신의 제단이다. 저물어 간 세상을 다시 연 위대한 성소지.』
돌칼 정령과 나는 건물 한 채에 대한 감상조차 이다지도 차이가 났다. 내 세 번째 상대는 사고방식이라도 비슷한 귀신이면 참 고맙겠는데.
말은 이런 식으로 하면서도 생에 대한 집착이 사무쳐 기생충이 돼서라도 아등바등 살아 보려는 돌칼 정령을 보면 언행 불일치를 통감했다. 실은 저도 개죽음당하긴 싫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