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이었구나.”
태양 새끼가 원흉이었네. 지가 뱀파이어도 아니고 뭣 땜에 피가 필요했는데?
사실 가만있는 태양이 무슨 죄가 있을까. 온갖 자연재해에다 종교·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 잘못이지.
하지만 그 여파가 당장 내 안위에까지 미치다 보니 고대 문화권마다 하나씩은 설치는 태양신과 그 추종자들 상대로 빠득빠득 이가 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끼들이, 모셔도 곱게 모실 것이지.’
여기까지 하고 본심을 꽁꽁 갈무리했다.
“혼례 같은 의례도 이 위대한 성소에서 치렀나 봐?”
공숙선의 충고대로 돌칼 정령을 밀어내지 않고 합을 맞추었다.
네 눈에 성소로 보인다면, 내 눈에도 그렇다고 치자. 돌칼도 숭배하고 피의 제단도 숭배하고, 시발 공숙선 숭배하는 거 빼고는 전부 동조해 줘야지.
『모르겠다.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이곳 출신이지만 일찌감치 다른 도시의 통치권을 받고 떠났어. 다시 돌아왔을 땐 전쟁 포로의 신분이었지.』
생각해 보니 자기 나라 지배자를 제물로 쓸 가능성은 적었다.
이곳 왕이 아니라 다른 도시의 왕이었구나.
“포로? 여기 도시 왕족하곤 혈연관계에다 종교도 같았던 모양인데 어떡하다가 적대국이 되었대?”
『우호 관계라면 전쟁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어…… 설마 제물을 조달하려고 고의로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는 거?”
『그렇다. 방목장이 필요해서지. 가축을 사육할 때는 원하면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게끔 적절한 개체수를 유지해야만 해. 한꺼번에 잡아서 씨를 말려선 곤란하다.』
제물 용도로 쓸 인간을 사육하는 위성 도시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빌미는 적국의 포로겠지만.
아우 씨, 사탄 새끼들인가? 그런 식으로 당하면 나였어도 원혼이 되고도 남았을 것 같네.
공숙선이 동행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사이비 교주 후보가 이 체계적인 제물 조달 시스템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벤치마킹이라도 했다간 뒷감당이 되지 않을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 공숙선이란 인간 자체보다는 그가 다루는, 보통 사람은 지각하지 못하는 초월적 힘을 경계하는 것이다.
사람 두개골을 디뎌 밟으며 피라미드를 오르는 미션이라니 두려움보다는 거부감이 더했다. 다신 무력해지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진행했건만 이 끝 간데없는 악의 앞에서 애써 끌어모아 온 용기가 사그라들려고 했다.
“목장지기인 넌 왜 잡아먹었는데? 그거야말로 씨를 말리는 행위 아니야?”
본진에선 또 다른 희생양 왕을 세우면 그뿐이겠지만.
『왕의 피와 심장이 요구될 만큼의 가뭄과 대기근이 찾아들었다. 영광스러운 희생이었지.』
이 자식아, 영광은 무슨 영광. 저도 싫고 무서웠으면서.
하마터면 망자의 어깨를 도닥이며 위로해 주고 싶다는 충동에 휩쓸릴 뻔했다.
그만두자. 이놈들 상대로 일일이 감정 이입하고 공감 능력 발휘했다간 공숙선 꼴 난다고.
마음이 좋지 않아 속으로 혀를 차며 잠자코 고개를 돌렸다.
“……?”
시선이 피라미드 정상 부근에 가 닿았을 때, 신기루처럼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위에 누가 있는데?”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익숙한 기운을 느끼긴 했어. 그리운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다.』
“혹시 생전에 너희 가족이었던…… (널 죽인) 제사장 같은 사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주관했던 자라면 챤 발름 요팟의 적일까, 아군일까.
『제사장이라. 조부가 대신관이었지. 저자는 친근함이 들지만 당장은 누구인지 정체가 떠오르지 않아.』
“일단 올라가 보자. 근데 돌칼아, 이것만은 머리에 새겨 둬.”
『……?』
“이름을 잃은 귀신보다는 네가 더 세. 그 신령의 신도였던 자들은 다 죽었겠지만 너는 현재 신도를 거느리잖아. 공숙선이 널 몸주신으로 모시는 데다 산 사람들이 네 이름을 알고 불러 주지. 나도 같이 싸울 거야. 그러니까 쉽게 굴복하지 마라.”
이 녀석이 제 할아버지를 만나자마자 옛 기억이 떠올라 무릎 꿇고 복종할까 봐서 밑밥을 깔았다. 여긴 뭐 하러 왔는지 까맣게 잊고서 예전처럼 제 심장을 꺼내어 냅다 바칠지도 모를 일이니.
그러면 혼사굿이 문제가 아니라 생사의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우리가 무사 탈출에 실패한다면 이대로 여기서 사장되든지, 위에서 돌칼 정령을 부른다는 귀신에게 먹히든지 하겠지.
딱 한 명 있는 신도 놈, 공숙선의 신앙심이 영 시원찮았기에 그 인간이 알아서 꺼내 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더는 몸주신 아닐 거다. 너와 계약한 후엔 숙선의 몸에 머무를 수 없게 된다. 떨어져 나와야 해.』
돌칼 정령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지껄였다.
그래, 이 기회에 너는 그 인간한테서 멀리 떨어져서 지내라.
공숙선을 대체할 인성 괜찮고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만한 무속인을 물색해 봐야겠다.
“돌칼만 몇 번 사용하고 곧 돌려보내 줄 테니까 당분간만 참아. 일단 저거나 해결하자. 우릴 도울 의도로 부르는 거라면 고맙겠는데 말이지.”
피라미드의 꼴을 보아하니 그런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경계심이 치솟는 거였다.
근방의 마야가 달력으로 유명하고 천체를 이용한 역법이 발달했던 문명이기에 이곳의 계단 개수에도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했다. 가령, 1년을 상징하는 365개의 계단이라든지. 그 정도 숫자로 가늠하고 체력을 분배해 뛰어올랐다. 해골 생각은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밑에서 보던 대로 계단은 가팔랐지만 중간중간 평편한 지대가 있어 쉬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 유적지에 있는 피라미드 계단은 밧줄에 의지해 등반할 정도로 난코스라던데, 높이 육십 미터쯤은 생전에 전사였던 소년 왕과 나에겐 숨도 차오르지 않는 수월한 산책길이었다.
각오했던 숫자보다 백여 개나 적은 계단 수에 얼떨떨해하는 사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더 올라가야 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건축물 꼭대기에 맞닥뜨려서 내심 당황했다. 꼭대기 광장의 움푹 파인 정방형 공간에 선 인물을 확인하고는 더더욱.
‘이놈 쌍생아였나?’
깃털 장식이며 고리가 굵은 금 귀걸이며 차림새마저 똑같은 돌칼 정령 도플갱어가 서 있었다. 그의 신체 주변으로는 암녹색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기운이 넘실거린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어. 이거 잘하면…… 일거양득?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는데, 그럴싸한 귀신만 만났다 하면 내 혼인 대상으로 걸맞은지 아닌지 적합성을 따지게 된다. 두 번째 영결식을 하러 왔다가 일생의 혼사 운을 세 번을 다 채우고 돌아가면 남는 장사잖아. 안 그래?
『너를 마중하러 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도플갱어가 챤 발름 요팟을 향해 팔을 뻗었다. 일단 적의는 없는 것처럼 보이고, 내 목적에 방해는 될 것 같았다.
그럼 안 되지.
“누구세요?”
내가 물었다.
『시간이 되었다. 가자.』
도플갱어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오직 챤 발름 요팟에게만 집중할 뿐이었다. 나와는 대화할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다.
큰 기대를 걸지 않았던 나는 개의치 않고 이번엔 돌칼 정령을 돌아봤다.
“이제 누군지 떠오르냐?”
『사람이 아닌데.』
“당연히 아니지. 귀신이잖아?”
나 역시 생존자만 통계에 집어넣지, 죽은 자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삶과 죽음의 연속성 좋아하시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모르겠다. 나하고 깊이 엮인 관계처럼 여겨지긴 하는데 말이다.』
야. 그건 겉모습만 봐도 알아. 늙은 태양이나 젊은 태양으로 불리던 등급의 큰 신도 아닌 듯이 보이잖아.
이혜준은 이런 돌칼 정령의 어리벙벙함을 공숙선 탓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흡수하듯 숙주의 바탕을 빨아들이는데, 숙주의 관심사가 무신 이외의 분야에는 닿아 있지 않은 탓에 돌칼 정령이 일상의 대화조차 어려운 거라고.
한편, 공숙선은 돌칼 정령이 저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혜준 본가에 있는 신령님들은 싹 다 이 모양이더라고. 유물에서 강제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사기뿐만이 아니고 나사도 한 뭉텅이씩 빠져 버린 거야.」
정화되는 동시에 머리도 나빠졌다는 주장이다. 금시초문인 이론이었다.
「공숙선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 원래 어리바리한 놈들일 수도 있지.」
「아니거든! 내가 당해 봐서 잘 알아! 이혜준하고 눈 마주친 이후로 지능이 100은 넘게 떨어진 것 같아.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날 깔보기 시작했다고!」
예전부터 깔봤는데 이제야 눈치챈 걸 보면 최근 들어 더 똑똑해진 거 아닌가?
돌칼 정령의 경우, 제 쌍둥이 형제도 못 알아보는 걸 보면 지능 문제가 아니라 기억이 소실된 모양새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나니까 좋지? 반가워?”
제발, 반가워해라.
『……음.』
돌칼 정령이 애늙은이 같은 얼굴로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갈등하는 눈치를 보니 진심으로 반갑진 않은 듯했다. 상대방에 대한 기억이 없는 탓일까?
“그럼 재회 기념으로 네 부탁 하나만 들어 달라고 해 봐. 나하고 결혼식 한 판만 해 주면 원하는 대로 네가 따라가 주겠다고 해.”
게임 한 판을 신청하듯 권했다. 죽은 자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건 거래 요청이다. 얘들한텐 공짜 서비스가 없다는 사실은 일찌감치 배웠다. 계산법도 되게 특이해서 하찮은 심부름을 해 주고 목숨을 달라는 새끼들도 있었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나더러 저자를 따라가라는 거지?』
챤 발름 요팟이 ‘감히 날 팔아?’라는 얼굴로 날 째려봤다.
어디긴.
귀신이 함께 가자는 곳이야 뻔하지 않나? 친형제가 데리러 왔으면 마땅히 따라가 줘야지. 차고도 넘치는 시간이었잖아. 이젠 갈 때도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