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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신부 (92)화 (92/96)

92화

얘를 어디에다 맡길까 고심 중이었는데 마침 마중 나왔다는 자가 있으니 솔깃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이놈을 떠넘길 생각은 없었다. 과거 원혼이었던 놈이라서 행선지에 신중해야 했다. 챤 발름 요팟을 기다리는 곳이 지옥이라면, 네 형제를 따라가라며 무작정 등을 떠밀긴 어렵다.

『역시 숙선의 말마따나 쓸모가 다하면 날 버릴 작정이었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강지헌 자식아!』

남의 속도 모르고 챤 발름 요팟이 배신감으로 바르르 떨며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야. 그런 말은 네 쓸모를 증명한 뒤에나 하라고 했지. 공숙선을 살리고 싶으면 입 닥쳐. 네 개소리가 예언이 돼서 숨겨 왔던 내 초능력으로 그 인간 목을 따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알아서 중매 잘 서라. 쟤 포함, 우리 셋이 사이좋게 지내자?”

나 역시 되지도 않는 아무 말을 되돌려 줬다.

『그런 대단한 살인 능력을 지녔으면서 왜 여태 속여 왔어, 이 비열한 자식아!』

뭐라는 거야. 농담으로 알아들을 뇌세포가 없니?

“됐고. 시간 없으니까 너를 조건으로 걸고 빨리 혼인 의사를 타진해 봐.”

『너는 누구지?』

챤 발름 요팟이 내 요구를 싹 무시했지만, 나 또한 저 녹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놈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터라 숨죽여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너다.』

은유법인가? 이놈이 저놈이고 저놈이 이놈이라면 둘로 쪼개기가 어려울 텐데 그건 내 바람대로 흘러가는 전개가 아니었다.

『이곳은 어디냐.』

『이곳은 명부로 이어지는 도시. 영문도 모른 채 의식도 없이 줄곧 머물러 왔다.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순간 비로소 자아가 돌아와 나는 내가 기다리던 존재가 누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갈라져 나간 너와 나는 온전한 하나의 형태로 명부에 들어야 한다.』

딱딱한 말 품새 역시 챤 발름 요팟 그 자체였다. 저놈의 정체가 손에 잡힐 듯 그려지자 먹잇감이 둘에서 하나로 줄어 버린 짙은 상실감이 찾아들었다.

사람도 귀신도 아니라면 그거겠지.

그나저나 돌칼 정령이래서 이놈을 보낼 세계로는 ‘정령계’와 같은, 영계 중에서도 약간 귀여운 어감의 장소를 상상해 왔는데 명부라니 지옥에 버금가게 어둡다.

『나는 가지 않는다.』

챤 발름 요팟 역시 불길함을 느꼈는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래. 너는 명부에 가지 않아도 돼. 그래도 쟤랑 합체하긴 해야겠다.”

『어째서?』

“혜준 선배님 만나고 분리된 네 반쪽이잖아. 너는 정령, 쟤는 돌칼. 네가 2천 년 가까이 머물렀던 정든 네 집이어서 익숙하고 그리웠던 거지.”

그나저나 목표한 아이템을 발견하자마자 명부 타령이라니 진짜 타이밍 뭔가 싶었다. 보관 기술이 발달해서 어떤 유물이라도 일단 박물관에 놓아두기만 하면 불멸 불사 영구 보존을 보장받는 거 아니었나? 잘 모르겠다.

실물 돌칼의 내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됐다. 적어도 두 번은 사용하고 싶은데 무기를 빌리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날라 버린다면 혈압이 올라 쓰러질지도 몰랐다.

내가 얼마나 기대해 왔는데!

『음… 그래서…….』

챤 발름 요팟은 납득했다는 표정으로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반가울랑 말랑했구나, 하고.

둘이 함께한 세월을 계산하자면, 챤 발름 요팟에게 저 돌칼은 인간의 고향 집보다 더욱 끈끈하고 애틋한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왜 이리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지?

“돌칼님이 섭섭하시겠다. 좀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어떨까? 포옹이라도 해 줘.”

빠른 합체를 기원하는 내가 기쁨을 종용했다. 하지만 챤 발름 요팟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물러서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지금은 숙선이 있으니까 됐어.』

2천 년 가까이 사귀었던 ‘연인’에게서 서슴없이 돌아선다.

“야. 그릇이 바뀌었다고 이렇게까지 매정해질 일이야? 너야말로 쓸모가 다했다고 버리는 냉혈한이었어? 어차피 공숙선 씨한테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며. 얼른 다시 합체해라.”

돌칼이 절실한 나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말하는 거 못 들었어? 하나가 되는 순간 의식을 장악당해 명부로 끌려갈 거라고. 숙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면 나도 강지헌하고 계약해 줄 이유가 없다.』

“…….”

예감대로 저 녹색 아지랑이 놈은 훼방꾼이었던 거다. 놈의 목적은 챤 발름 요팟을 명부로 데려가는 것. 내 목적은 돌칼을 사용해 서창경과 윤상현의 목을 따는 것.

둘의 의지를 공통으로 충족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집 피울 때가 아니어서 내가 들고 온 계획은 과감히 파기했다. 아쉽지만 예물은 물 건너갔다.

머릿속이 명부에 갈 생각으로만 들어찬 저 돌칼을 설득하려면 흥정할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없…… 아니, 있네.

“쟤는 꼭 챤 발름 요팟이어야만 한대? 너는 맞춤형 정령이야? 너 저 돌칼에 스며들 때 어떤 조건을 충족했지?”

『생각 안 나. 이제 와서 떠올릴 필요가 있나?』

냉정한 놈. 돌칼과 갈라섰다고 이토록 남남처럼 굴 일인가 싶었다. 여태껏 돌칼 정령이라고 불러 준 게 아까웠다.

“모르면 저쪽한테 물어봐. 어째서 너였는지.”

『그때 너는 왜 나를 선택한 거지?』

챤 발름 요팟이 돌칼에게 물었다.

『나는 왕의 심장을 도려내고, 그 시신을 아래로 떨구고 굴리어 이 성전을 피로 물들이고자 탄생했다. 그러나 좀처럼 사명을 이행할 기회가 오지 않았지. 하염없이 내 검날에 피를 묻히기만을 기다렸다. 네가 제단에 누워 심장을 바친 그 날까지.』

그렇겠지. 일반 왕족도 아니고 제물이 될 왕은 아주 특별한 의식에서나 사로잡을 테니까 드물 수밖에.

역시 그 쓰임새 때문에라도 돌칼은 사기에 물든 유물이 되기에 알맞았다. 이런 인골 피라미드를 구현해 낸 이유는 이게 저놈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겠지.

혹시나 내가 오해하는가 싶어 염려했는데 돌칼의 본질을 확인하자, 새로이 제안할 거래에 대한 죄책감과 거부감이 사라졌다.

“내가 새 제물을 제공하면 챤 발름 요팟을 포기할 의사가 있어?”

악령끼리 붙어먹어라.

『왕인가?』

챤 발름 요팟을 통해 말을 전했더니 예상대로 돌칼은 제물의 신분부터 따졌다.

“후보는 둘인데, 둘 다 지위가…… 자기가 남보다 높은 신분이고 왕이 될 자질이 있다고도 생각해. 무엇보다 지옥에, 아니 명부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고 봐.”

거짓말을 하면 안 되니까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다. 왕이라고 착각해 주면 고마웠겠지만 콧대 높은 돌칼은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흔한 귀족 따위는 건드리지 않는다. 내 수준에 맞지 않아.』

이 동네엔 귀족 써는 2등급 돌칼도 따로 마련돼 있었나 보다.

“수준이라…. 한 놈은 대신관급으로 영력이 아주 강한 편인데 과연 네가 그를 거둘 힘이 있을지 모르겠는걸?”

『…….』

소년의 형상을 한 돌칼이 고심하는 눈치로 입을 꾹 다물었다. 왕보다 종교 지도자의 권세가 높았을 것 같은 시절을 보낸 놈이기에 귀가 솔깃할 만도 했다.

“그래, 생각 좀 해 봐요. 요팟이랑 나는 긴한 볼일이 있어서 잠깐 실례. ……비켜 달라고 해.”

꼭대기 광장을 둘러보니 가장 중요한 장소는 역시 돌칼이 선점한 중앙 제단이었다. 예물이 돼 주지도 않을 놈이 예식에 영향을 끼칠까 봐 움푹 파인 정방형의 공간 바깥으로 그를 내몰았다.

지갑에 넣고 다니던 종이를 꺼냈다. 약식 혼인 신고서로, 챤 발름 요팟의 경우엔 출신지와 이름만 달랑 적혀 있었다. 계약상 가리키는 대상이 명확해야 하므로 빈칸을 채우고자 굳이 없는 정보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두 증인, 이혜준과 공숙선이 각자의 필체로 서명을 해 놓았다.

“협조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다. 앞으론 네 몫으로 핫 초콜릿 자주 만들어 줄게.”

챤 발름 요팟에게 말했다. 내 선에서 보일 수 있는 호의는 고작 이 정도였다.

살아생전 고향에서 마시던 카카오 음료와 비슷했는지 챤 발름 요팟은 핫 초콜릿을 유난히 좋아했다. 파나마 방면은 커피콩이 유명한 줄 알았더니 카카오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여태까진 이혜준이 마시는 경우에만 곁에서 한 잔씩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이놈도 혼백이므로 제사상에 올리는 것처럼 음료가 든 잔을 놓아두기만 하면 되는데,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반드시 공숙선의 몸으로 마시라고 강요해 왔다. 체중 관리에 철저한 공숙선이 마시기 싫다고 아무리 징징거려도 귀신에 대한 내 거부감을 꺾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꺾으려고. 어린애가 먹고 싶은 건 먹게 해 줘야지.

『어……, 나는 무기를 준다는 약속 못 지켰는데.』

“괜찮아. 지금 이 단계까지 함께 진행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어. 네 신력이 강력한 것도 나로선 참 안심이 되고 든든하다.”

개놈이 내게서 윤상현을 떼어 놓지 못했듯이, 챤 발름 요팟 또한 쉽사리 떨어져 나갈 급이 아니었다. 물론 이 녀석을 오랫동안 붙들어 매어 두긴 어려웠다. 누구보다 방상시 눈깔의 소유자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테고.

고작 향주머니 하나에도 파르르 떠는 인간이잖아.

내 주변 흉신 새끼들을 처리할 동안에 챤 발름 요팟이 안전장치 역할만 해 주어도 더없이 감사했다.

바라던 무기 수여식은 무산됐지만 돌칼의 눈치를 보니 그가 힘을 실어 줄 가능성이 엿보였다. 이 작전에 개놈과 윤상현, 둘 중 하나만 끌어들여도 절반의 성공이었다.

“잘 부탁해.”

악수를 청하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챤 발름 요팟도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육신을 벗어난 상태라 녀석의 손을 맞잡을 수 있었고, 넋과 접촉했다고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다.

귀신과 닿고서도 소름이 돋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공숙선처럼 마냥 행복한 기분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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