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혼인 계약을 마쳤지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윤상현이 붙어 있을 때에도 정기는 빨려 나갔어도 무속인이 아닌 내 일신상에서 두드러지게 바뀐 부분은 없었다. 원래 없던 신력이나 초능력이 증강될 리도 만무했다.
심지어 나는 귀신에 씌어도 귀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영매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귀안을 틔우는 부적을 쓰거나 향낭과 같은 도구에 의지해 약에 절어야 겨우 환각이 보였다.
평소에 맨정신으로 귀신을 보고 살지 않아도 된다니 감사하고 다행한 체질이었다. 개놈이며 지리교육은 나와 정반대로 생각할 테지만.
“이제 신고해야지. 이 동네 구청은…… 이곳이라고 치자. 나름 중심가네.”
다시 피라미드를 뛰어 내려가더라도 이보다 더 그럴듯한 장소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차피 돌칼이 구현한 가상 도시일 뿐이다.
인간을 써는 돌칼 유물의 특성상 어딜 가나 분위기가 이 모양으로 괴기스러울 게 뻔했다.
주재자인 공숙선이 알아서 태워 줄 줄 알았던 신고서를 우리가 처리하게 됐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돌 제단 위에다 신고서를 내려놓자, 종이의 내용이 돌판을 잠식하듯 가라앉으면서 팔만대장경 법문처럼 활자로 뚜렷하게 새겨졌다. 대한민국 공공 문서 예시의 주인공 홍길동 씨가 된 기분이 들었다. 주민센터 유리판 아래에 끼워 두고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해 둔 그거 있잖아.
‘아니, 아니, 이러지 마요. 과하다고. 이거 영원히 지속할 계약 아니에요.’
며칠 뒤에 이혼할 작정인 내겐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증거물이었다. 새겨진 문자를 지우지 못해 계약 해제가 불가능하면 어떡하나 싶어 식은땀이 흘렀다.
“쟤한테 돌칼에 깃들 제물을 부르려면 우리가 일단 나가야 한다고 전해 줘.”
『너희 둘 중 하나는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돌칼의 대답이 챤 발름 요팟을 거치지 않고 직통으로 돌아왔다. 혼인 계약의 영향으로 챤 발름 요팟과 일체였던 돌칼과의 관계가 돈독해진 까닭일까.
“오.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네?”
『나는 오직 왕과 그의 배우자와 소통할 뿐이다. ……물론 대신관도 그에 해당한다. 그 역시 고귀한 혈통일 테니까.』
돌칼이 스스로 신분 차별주의자임을 밝혔고, 뜸을 들이다가 대신관급 제물도 원한다는 희망 사항을 말했다. 여태 상놈인 나하고는 말 섞기가 싫어서 내 말을 이해했으면서도 무시했다는 거지.
띠꺼워서 진짜.
그래도 사람도 아닌 물건을 상대로 혈압을 올리며 감정을 소비하진 않았다.
“챤 발름 요팟을 먼저 보내 줘.”
애새끼가 명부에 끌려갈까 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얼른 돌려보내 줘야지.
『강지헌 너 혼자 괜찮겠어?』
『그가 저를 대신할 제물을 데리고 오는 건가?』
돌칼과 정령이 동시에 대꾸했다.
“너야말로 혼자서 돌아갈 수 있겠어? 이제 공숙선 씨하고 연결이 끊겼을 거잖아.”
먼저 과거 돌칼 정령이었던 놈에게 물었다. 마찬가지로 공숙선도 이젠 과거의 그릇이 되어 버렸다.
『……괜찮아. 너와 내 이름을 부르는 숙선의 목소리가 들려. 그 소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돼. 이곳 주인이 발목을 붙들지만 않는다면.』
잠시 눈을 감고 명상하던 챤 발름 요팟이 말했다.
공숙선이 아직까진 본색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인가 보다. 하긴 내가 이곳에 있는데 배신을 하더라도 일단 날 꺼내 놓고 일을 쳐야겠지.
“그럼 됐다. 너 먼저 가 있어.”
『너는 어떡하고?』
좋아서 냉큼 튈 줄 알았더니만 녀석은 날 걱정하는 얼굴을 했다. 사악한 공숙선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착해진 건가? 그릇은 껍데기일 뿐이고 중요한 건 알맹이 넋이라고 믿어 왔는데 이놈들 탓에 내 안의 상식이 흔들렸다.
“나도 바로 따라갈 거야. 공숙선 씨가 일부러 결계 안 만들었잖아. 뭐가 많이 와 있을 텐데 너도 조심하고.”
『…….』
챤 발름 요팟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유령처럼 흐릿해지더니 곧 그의 자취가 사라졌다.
“자, 우리도 낚시를 시작하자.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내 발목 좀 잡고 있어 줄래? 돌칼 씨까지 인간계로 끌려가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말이야.”
이 공간의 주인에게 요구했다.
『명부로 갈 시간이 되어 나는 이제 그곳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꼭 발목이어야 하나?』
고귀하신 돌칼님께서는 내 앞에서 몸을 수그리기가 싫은 모양이다.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그래야 해. 허리를 붙들리면 내 상반신만 저쪽으로 이동할 거 아니야. 지금 바깥에서 날 기다리는 놈들은 모두 영체를 보는 놈들인데 수상쩍다고 여길 거라고. 그것보다 데려오면 바로 제압할 수 있겠어?”
『이곳은 나의 영역. 문제없다.』
“어, 그래. 그럼 시작한다.”
증명된 바는 없지만 이놈도 오래 묵은 놈이니 흉신 한둘쯤은 어렵지 않게 소화하겠지.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눈을 감자마자 돌칼이 내 두 다리를 붙들어 잡았다. 하체가 석상처럼 굳어 땅바닥에 못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집중해서 본래 살던 세상으로의 연결점을 찾으려 했다.
챤 발름 요팟의 말대로 곧 내 이름을 부르는 공숙선의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어느 방향인지 길을 알 듯했다.
이번엔 암전이 되고, 후덥지근한 밤공기가 나를 맞았다.
‘날씨 탓인가? 기분이 너무 찝찝한데?’
다시 육신에 깃들자마자 드는 감상이었다. 저쪽 날씨가 몹시 쾌청했기에 대조되는 건가 했는데, 원인은 따로 있었다.
『강지헌, 이놈들이 네 입술에다 더러운 짓 하고 있었어! 서창경이 숙선의 몸에 들어가서!』
챤 발름 요팟이 외쳤다. 그가 뒤쫓는 대상은 공숙선에게서 벗어난 개놈이었다.
‘그래. 너 새끼라면 올 줄 알았지. 그나저나 발름아, 그렇게 멀어지지 말고 서창경을 이리로 몰고 와! 지금 내가 꿈적도 할 수가 없단 말이야.’
돌칼의 강력한 힘이 내 영혼의 반쪽을 저쪽 세상에 붙박아 두고 있었다.
“하하하. 진정해. 내 몸주로 받은 게 아니라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잠깐 합친 것뿐이라고. 같이 지낼 적에 서창경 씨가 육신 없이 널 범한 게 몹시도 아쉬웠다잖아. 친하게 지내던 신령님 소원인데 한 번쯤은 들어줄 수도 있는 거지.”
공숙선이 얻어터지는 게 무서웠는지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가며 변명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였다. 한순간의 충동에 못 이겨 내일 없는 짓을 한 거다. 개놈의 꼬드김에 넘어간 거겠지.
상상력이 부족해서 다행이었다. 아니라면 역겨운 짓을 떠올리느라 이 자리에서 토하고도 남았을 텐데.
어떡해야 훌륭한 미끼가 되려나. 개놈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후 정식으로 키스해 줄 테니까 가까이 오라고 한다면, 의심만 살 것 같다.
“구역질 나네. 별것도 아닌 새끼가 너저분한 짓이나 하고.”
개놈을 내리깔아 보며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평소 강지헌다운 반응을 보였다.
『뭐?』
“그나저나 저 새끼 말고 윤상현은 안 왔어요? 결계 때문에 여기로 못 들어오는 거 아니야?”
경계선까지 도망쳤다가 방향을 틀어 시퍼런 낯으로 접근하는 서창경을 무시하며 공숙선에게 물었다.
주변을 둘러싼 사슬 선이 바닥에서부터 아물아물 움직이고 있었다. 어쩐지 산중 귀신들로 바글거릴 줄 알았던 공간이 쾌적하더라니. 공숙선이 기다렸던 옛 친구가 찾아오자 다른 귀신들을 방출하고 결계를 둘러친 듯했다.
잘 알겠다. 김빠진 사이다 같은 정령하고 지내 보니 사는 게 재미가 없고, 저 흉신하고 붙어서 놀던 때가 그리워졌겠지.
짐작했던 공숙선의 꿍꿍이속 그대로였다. 이혜준의 본가에 있는 정령들로 몸주를 갈아 끼워 봤자 타고난 살성을 마음껏 발휘하긴 어렵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거다.
저들이 애초에 세웠던 계획대로 나를 저주해서 개놈의 제물로 던져 줄 생각이 아닌가 했다. 그쪽이 더 적성에 맞고 재미있을 테니까.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참 바쁘게 산다, 공숙선.
“윤상현? 그놈을 왜 여기에서 찾아. 걔 지금 아랫동네에 있지 않아?”
“나는 그놈 신력이 들어간 부적으로 불렀으니까 당사자가 올 줄로 알았죠. 정작 기다린 주인공은 안 오고 저런 거나 달라붙었네.”
다가오는 흉신을 고갯짓하며 하찮다는 듯이 지껄였다.
개놈은 아까는 그래도 얼굴에 핏기가 없을 뿐 살아 있을 때 보던 청년의 모습이더니,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손톱도 갈퀴처럼 길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점차 기억 속의 서창경의 흔적이 지워지고 내가 살인 문어보다 훨씬 더 두려워하는 귀신의 형상으로 변했다. 어쩐지 현재 그의 시신 상태가 저런 모습일 듯했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만큼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흉신 키우는 취미라도 있나. 미친 것도 아니고, 시체를 왜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보관하고 있어.
“야야. 수양회 얼굴 봐서 내가 일단 막아 주긴 할 테지만, 괜히 도발하지 마. 신령님 노여움을 사서 좋을 거 없다고.”
공숙선이 말했다. 내가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미래의 직장을 잃을까 봐 걱정이 돼서 말리는 것처럼 보였다.
‘뭔데. 날 서창경에게 던져 줄 속셈이 아니었어? 그냥 잠깐 재미있으려고 결계 안으로 들인 건가?’
나는 정상인이다 보니 공숙선 같은 사이코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저씨는 나서지 마세요. 의식 없는 사람 몸에 추행이나 일삼는 찌질한 놈한테는 져 주기도 어려우니까.”
공숙선도 함께 들으라는 소리였다. 지금이 중요한 순간만 아니라면 저 새끼도 다신 개 같은 짓을 하지 못하게끔 흠씬 밟아 줬을 텐데.
그러자,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는 대꾸가 돌아왔다.
“하하. 전부터 궁금했는데 마침 기회가 닿아서 여기저기 만져 보고 맛도 봤지. 너 맛 좋더라?”
네 감상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새끼야.
『내가 찌질하다고? 내가 만든 인형, 내 꼭두각시를 내가 가지겠다는데 어째서. 네 입으로 영원히 내 곁에 머물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이쪽도 양심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서창경 씨하고 쭉 함께 갈 거야. 됐죠?」
내가 호령도에 갔을 때 전화로 주고받은 대사를 영원한 동반의 언약으로 승화시킨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