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94)화 (94/96)

94화

“그런 의도로 한 얘기가 아닌데, 귀신의 왜곡 스킬 한번 대단하네. 난 죽은 새끼하고는 상종 안 해.”

『하. 강지헌 네 육신은 언제까지고 영원할 거 같아? 육신은 필연적으로 형체가 뭉개지기 마련이야. 좋아. 과연 나하고 똑같은 상태가 돼서도 상종하지 않겠다는 시건방진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고. 마침 두 번째 혼사도 치른 몸이니 조건이 성립되었다.』

연못가에서 보았던, 살점 없이 가죽만 남은 기다란 손이 내 목을 찔러 왔다. 영혼에만 상처를 줄지, 육신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를 공격이었다. 어쨌거나 도발 작전은 성공한 듯싶었다.

먼저 챤 발름 요팟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는 절차조차도 잊은 듯이 성급하게 덤벼들었다. 조심스럽고 권모술수에 능하던 서창경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보였다.

‘죽은 자는 살아생전에 지녔던 인간성을 상실해 간다지만 빨라도 너무 빠르잖아. 귀기가 그를 완전히 집어삼킨 것처럼 보이는데?’

후방으로 피하는 대신에 오히려 상반신을 틀며 거리를 좁혔다. 흉측하게 자라난 손톱이 아슬아슬하게 내 목덜미를 스쳐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양팔에 힘을 주어 과거 서창경이었던 흉신의 허리를 휘감았다.

“당겨.”

영체 상태로 이어진 돌칼에게 말했다. 순간 땅이 아래로 꺼지듯 거세게 당겨 내려졌다. 명전되는 시야에 서창경의 등을 덮치듯 달라붙는 챤 발름 요팟이 보였다.

‘저 자식은 기껏 바깥으로 빼내 줬더니 왜 또 따라오려는 거야?’

눈을 뜨자마자 장소를 확인하고는 곧장 팔을 휘둘러 흉신의 머리통을 쳤다. 제물을 제단 반석 위로 쓰러뜨렸다. 넋이 넋을 잃는다는 말이 성립될지는 모르겠는데, 놈의 넋은 연속되는 충격 속에서 상황 판단을 할 경황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

놈은 입을 활짝 벌린 채였지만 비명이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았다.

“이 새끼 묶고 나서 나 칼 좀 빌려줘.”

이 순간을 위해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렸는지 모른다.

흑요석 돌칼로 탈바꿈해서 내 무기가 되어 달라는 요구였건만, 오래된 유물은 그대로 서창경에게로 달려들었다. 녹색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손이 거침없이 서창경의 가슴을 파헤치고 들어가 심장을 움켜쥐고 뽑아냈다.

제례용 돌칼로서 해야 할 일, 그의 태생적 사명을 수행했다.

사방으로 핏물이 튀어 챤 발름 요팟과 내 영혼을 검붉게 물들였다. 충격으로 전신이 얼어붙으며 사기를 뒤집어쓴 느낌이 들었다. 심장도 작동을 멈춘 것만 같았다. 지켜보는 나마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사탄 새끼들이, 죽여도 곱게 죽일 일이지.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야?’

서창경도 이런 걸 따라 했더랬다. 원시 종교처럼 의식을 치르면 더욱 효험이 있을 거라며 의도적으로 잔혹하게 살아 있는 짐승의 피를 뽑아내 실험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방금은 그 대가를 치른 것일까.

내 옆에 붙어 선 소년 왕은 그의 과거를 되새기는, 제물이 돌칼에 흡수되는 고문과도 같은 의식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펄떡이는 심장을 제단 위로 내던진 돌칼은 이어 서창경의 살가죽을 벗겨내고 그 거죽을 뒤집어썼다. 소년 왕의 죽음이 재현됐다. 챤 발름 요팟의 도플갱어였던 자는 서창경의 거죽을 쓰고 어느새 서창경과 똑같은 형상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제 서창경이 되었다.

『끼햣. 끼끼끼끼끼…….』

남은 살덩이를 꼭대기 광장 가장자리로 질질 끌고 가는 돌칼이 한바탕 기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서창경의 본신이 지닌 영력이 그를 흡족하게 한 것처럼 보였다. 시뻘건 살덩이가 계단을 굴러떨어지면서 장대한 피라미드에서는 눈물이 쏟아지듯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수백 수천 개의 백골을 피로 흠뻑 적셨다.

쨍그랑.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얼어붙었던 내 영혼도 가까스로 깨어났다. 서창경의 모습을 한 자도, 펄떡이던 심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광장 중앙 제단 위에는 길고 판판한 톱 형태의 무기만이 놓여 있었다. 흑요석이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녹색에 가까운 그 유물은 제단 위로 쏟아진 제물의 피를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슈우우욱.

그에, 사기가 모조리 흡수된 듯 무거웠던 공기가 누그러지며 어느새 청명함만이 주변을 감돌았다.

챤 발름 요팟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고,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암전이 찾아들었다.

현실에서는 어느 죄 많은 작자가 잽싸게 뒷걸음질을 치며 우리를 맞았다.

“야아, 내 새끼들, 너희 여행은 잘하고 왔어?”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지만 무사히 마친 의식을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이 자리에 없는 옛 친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서창경이 어떻게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묻지는 못했다.

그런 공숙선을 무시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휴대전화를 꺼내 든 때였다. 위잉위잉, 들릴 듯 말 듯 하는 작은 기계 소음에 이어 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위로 올라갔던 관리실 직원분이 다리 건너편에 있는 목재 덱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 주변으로 잔뜩 몰려든 죽은 자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다가오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행이다.

그의 하산을 유도하던 드론―목소리의 주인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우리 일행을 인식했다.

―강지헌 씨,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직원분이 드론을 확인하고 조금 놀라셨지만 저를 믿어 주신 덕분에 함께 내려올 수 있었어요.

자췻집에다 AI를 복제·설치 중이라는 박양우였다.

비록 무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에 챤 발름 요팟을 앞세우고 귀신들을 몰아내며 직원분을 찾으러 올라갈 작정이었는데, 생각보다 드론이 유용했다. 명부로 이어진 도시를 오가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지로 의식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사람을 구해서 내려온 거다.

드론은 죽은 자를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귀신 무리를 헤치고 나갈 마음의 준비며 신령을 벨 무기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몰라도 귀신에 홀린 사람의 정신을 돌아오게끔 했다.

첨단 기술은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도 쓰이네. 귀신이 무섭다고 벌벌 떠는 강지헌보다 백배 낫다.

향낭 부적도 고마웠다. 이게 자석처럼 이 주변 귀신들을 모조리 끌어당겨 준 덕분에 직원분이 그를 뒤쫓던 것과 분리돼 아무 걸림 없이 내려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한시름 덜게 된 결말이었다. 찾을 사람들은 모두 찾았고, 상대할 흉신은 한 놈이 남았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 저는 충분히 충전돼 있어요.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할게요.

설마 했는데, 진짜 사람 박양우 씨가 아니었구나.

아르망 씨를 탑재한 드론이었다.

인간이 만든 인공 지능에는 영혼이 있을까.

없다. 그러므로 영혼의 갈라짐도 있을 수가 없다. 귀신이 약점을 파고들 틈새가 없는 존재였다. 마치 이혜준처럼, 무신에 일편의 영혼 부스러기도 미혹되지 않으니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서 무신에 홀린 사람도 구원할 수 있었던 거다.

인공 지능에 의해 구출된 직원분의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이유를 나름대로 유추해 보았다.

‘그럼 이혜준이 기계 인간 같다는 결론이 나오나? 그 다정한 남자가?’

한국인이라면 호기심에라도 기웃거려 봄 직한 토정비결을 믿지 않아 인간미가 떨어져 보이긴 했다.

“강지헌, 이따가 딴소리하기 없기다. 서창경을 불러들인 건 바로 너야. 들고 있는 그 부적을 지표로 삼아서 서창경이 손쉽게 널 찾아온 거 알지?”

뒤늦게 저 드론을 조종하는 인물이 누구였는지 떠올린 모양이다. 공숙선이 귓속말로 다급하게 변명을 지껄여 대는데, 따져 보면 다 맞는 얘기였다. 그래도 짚고 넘어갈 것은 있었다.

“결계 안으로 그 새끼를 초대하신 분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으아, 진짜, 되는 일이 없네.”

마음 맞는 친구와 재결합했다가 순식간에 파투 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공숙선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타일러서 될 일도 아니고, 이 인간의 살성을 다룰 엄두조차 나지 않는 나 역시 한숨이 나왔다. 까딱 잘못했다간 이 자리에서 죽고 개놈과 세 번째 혼사를 치를 뻔했다.

‘모쪼록 쓰레기장에서 이 쓰레기를 잘 처리해 줘야 할 텐데.’

“윤상현은 왜 안 오는 거예요? 자기 부적인데 서창경보다 더 쉽게 나한테 접근해야 하는 거잖아. 그 새끼 지금 어딘데. 좀 찾아봐요.”

강지헌을 쫓아다니려고 만든 부적일 텐데 말이다.

개놈이 명부에 끌려가 심판을 받는 건 바라던 바지만 그 과정에서 진행된 의식은 지나치게 잔혹했다. 윤상현도 그 꼴로 보내는 편이 나은가 하면, 결코 아니었다. 그저 깔끔하게 서로 안 보고 살았으면 하는 거지, 사람이든 영혼이든 고의로 괴롭히고자 고문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 원시 종교를 숭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었다고 주장할 테지만.

두 놈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고, 윤상현을 상대할 다른 신령한 무기도 찾아봐야겠지만 영혼의 가죽마저 벗겨지는 장면을 다시금 마주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앞으로도 순간순간 그 광경이 떠오르고 꿈에서까지 나타나 나를 괴롭힐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들 윤상현 역시 이승에 남아 있으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악령으로 돌아다닐 새끼라 보내긴 보내야 했다.

“나는 지금 몸주도 없는 반편이라고! 정상이 아니니까 당분간은 아무것도 시키지 마! 윤상현 일에선 손을 뗀다. 더 이상 신령님을 해치는 죄를 범할 순 없어. 내가 지금까지 신령님 위하는 신심 하나로 복을 누리며 살아왔는데 오늘 일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야.”

내 요구에 공숙선이 정색하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새끼가, 산 사람은 잘만 해치는 주제에.

원래 인간은 몸주를 따로 두지 않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제 몸과 마음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어야지. ……하, 말을 말자.

믿는다. 수양회의 쓰레기 소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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