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6>
<어머님들! 지금 이 시간부터 귤 100그램에 790원 세일하고 있습니다. 어서어서 오셔서 기회 잃지 마시고 좋은 상
품들 골라 가세요.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만 한정판매 합니다.>
“어머! 얘 민훈아! 이리 안 와?”
“진태엄마! 얼른 일루 와. 생선 싱싱하다! 반씩 사서 나누자.”
“여보! 이거 이만큼 담으면 돼? 더 살까?”
토요일 오후의 백화점 식품매장은 정말 혼잡하기 그지없다.
나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봉지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치여 눈쌀을 찌푸리면서도 과일 매장
의 한쪽 구석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서서 하이에나 떼같은 아줌마들 사이에서 열심히 사과를 뒤적였다.
역시 사과는 윤기가 나고 빛깔이 좋은게…..음…..
“좀 비싼 것 같기도 한데….”
비록 내 돈은 아니지만 아이엠에프같은 대형사태로 인한 금융위기가 언제 터질지도 모르니 항상 절약하
는 바람직한 가정부의 생활자세를 잃지 말아야지. 좋은게 좋은 거라고 얹혀사는 주제에 씀씀이까지 헤프면
그야말로 최악이 아닌가. 비록 놈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화가 나기는 하지만 이 엄동설한에 쫓겨나면 갈 곳
도 없으니 미리미리 알아서 기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좀 비참하긴 하지만…..
“역시 이걸로 결정했다.”
나는 삼천원 어치를 살까 사천원어치를 살까 한참동안 고민하다 결국 삼천원어치를 사기로 마음먹고 싱싱한
사과들만 골라 조심스럽게 비닐봉지에 담았다. 놈에게 과연 삼천원이 돈일까. 라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그
래도 나에게 삼천원은 아주 큰 돈이다.
아끼고 또 아껴서 그 비인간적인 놈한테 십만원의 식비로도 한 달을 거뜬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필코 보여
주고 말리라!
“잘 깎아서 사흘동안 아침상에 올리고 남은 건 갈아서 점심 때 내가 마셔야지. ”
(알뜰하기도 하지….ㅡㅡ;;)
나는 가격표가 붙은 비닐봉지를 조심스레 카트 안에 넣은 다음 한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펼쳐 그 다음에 사
야할 품목을 확인했다. 오기 전에 꼭 필요한 것만 적어놓았으니 충동구매를 할 염려따윈 없다.
에….사과도 샀으니 그 다음은 베이컨하고… 또….
내가 메모지를 든 채 한 손으로 카트를 밀며 유제품 코너로 향할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두두두두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어깨를 탁 치며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야! 보경아!”
응?
반사적으로 휙 돌아본 내 눈에 비친 것은 연갈색 체크무늬의 목도리를 두른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애였다. 커다
란 눈동자가 반짝반짝하는게 어딘가 몹시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윤아야! 너!”
“우와아! 너 보경이 맞지? 반갑다! 어쩌면 여기서 만나냐, 우리?”
“정말! ”
우리 둘은 손을 맞잡고 백화점 식품매장 지하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작년 돈이 없어 임시로
성남에 있는 변두리 술집에서 일할 때 만난 윤아와는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않게 솔
직한 성격의 윤아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파였고 나는 항상 그런 윤아의 뒤를 수습하느라 매번 경찰
서니 파출서를 쫓아다녔다. 어느날 술취한 취객에게 뺨을 맞은 나를 대신해 상대를 걷어찬 윤아가 해고되자 나
도 기다렸다는듯이 술집을 그만두고 둘이서 이주동안 동해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 초쯤 거처를
옮긴 윤아와 연락이 되지않아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오늘 우연히 이렇게 백화점 지하에서 만나다니!
“그래서, 지금은 뭘 하고 있어?”
산 물건들을 서둘러 계산하고 백화점 사층의 커피숍으로 올라가 창가에 앉자마자 나는 그동안의 근황부터 물었
다. 그동안 생활이 좀 좋아졌는지 작년보다 훨씬 보기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냥 뭐…..”
그런데 답지 않게 윤아는 아르바이트생이 날라온 딸기쥬스를 스트로우로 휘저으며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뭔데. 저번에 하던 일 계속하는 거야? 아니면 나이트 클럽 같은 데 있어? 잠깐 쉬는 중이야? ”
봇물처럼 쏟아진 내 질문에도 윤아는 난처한듯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 얼굴을 바
라보니 불현듯 마음속에서 뭔가가 떠올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윤아….너…설마….”
척하면 척이라고 역시 마음이 통하는 친구는 뭔가 다르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아는 얼굴을 붉히며 몹
시도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으응…나 지금 애인이랑 같이 살아…”
“뭐야? 누구랑? 언제? 왜? 아니, 그보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뭐하는 사람이야? 언제 만났어?”
“야아! 목소리 좀 낮춰.”
내가 놀라서 커다래진 눈을 하고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뛰어넘을듯한 기세로 추궁하자 윤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난처한 표정을 했다. 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조용한 커피숍 안에서 다른 테이블의 여자들이 놀란 표정으
로 모두 우리만 쳐다보고 있었다.
웃 ㅡ
“그,그래. 미안. 그런데 참. 정말 누구야?”
나는 엎어질 듯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숙여 얌전히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윤아에게 대쉬를 했던 수많은 남자들을 떠올려봤지만 그 중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저돌적이고 성깔있는 윤아는 대부분의 대쉬에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
기 때문에 내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누군데, 응?”
“그렇게 궁금해?”
“너 같으면 안 궁금하겠어? 누구야, 응?”
내가 안달하자 윤아는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승화라고…. 지난번 마지막으로 일하던 술집 사장 조카야.”
“사장 조카라고? 그 사람은 뭐하는데?”
“아직 대학생이야.”
대학생!
윤아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애인임을 빙자한 제비에게 걸려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이용당하고 있는 건…..!
못된 생각이었지만 이 바닥에는 그런 일이 허다했다. 뭐 윤아가 그렇게 당할만큼 멍청하지는 않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은 항상 정에 굶주려 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걱정하지 마. 그 사람 진짜 대학생이야. ”
그런 내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윤아는 남은 주스를 마저 마시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나는 저…너무 뜻밖이라…”
“그렇지? 나도 놀랐어.”
“….그 사람이 잘해줘?”
“응. 무지무지.”
그렇게 말하며 웃음짓는 윤아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천하의 한윤아가 아마도 진짜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겠네….”
멍하긴 했지만 윤아의 웃는 얼굴을 보자 그 사실이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라서 좀 뜻밖이긴 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축하해 주었다.
“축하한다. 윤아야.”
“고마워. 그런데 너는? 예전에 사귀던 사람 있었지? 그 클럽 웨이터였나? 키 크고 덩치 좋았쟎아. 이름이
성도였지. 아마?”
으으…제발 그 이름은 입밖으로 내지 말아줘.
속으로 진저리를 치며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 헤어졌어….”
다행스럽게도 윤아는 어딘지 떨떠름한 내 표정을 보고 금새 눈치를 챘나보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럼 지금 뭐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듯 윤아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으응, 나 지금 가정,”
헉 ㅡㅡㅡㅡㅡ!!!
가정부야. 라고 말하려다 나는 아차, 하며 말을 삼켰다.
옛친구를 만나 너무 기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는데 나…가정부였쟎아!
비록 한 달동안 임시이긴 하지만.
윤아의 그 질문에 암울한 현실이 되살아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변화를 눈치챈 윤아가 왜 그래, 뭘 하는데? 하
고 물어왔지만…으응. 나 어떤 버릇없고 돈만 많은 놈의 가정부야. 라고 어떻게 고백하냐ㅅㅡㅡㅡㅡ!!!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건 절대 안돼!
“뭐해? 응? 뭐하는데?”
뭐, 뭐라고 하지? 그냥 저번처럼 술집에서 일한다고 둘러댈까? 안돼. 그럼 연락처를 물어볼텐데!
나는 거짓말을 못하다. 특히 조금이라도 정직하지 못한 말을 할 때는 눈동자를 굴리기 때문에 금방 표시가 난다.
윤아도 그걸 잘 알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난관을 빠져나가지?
내가 미친듯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핸드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 전화왔네?”
윤아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자기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응, 나야. 응. 지금? 으응. 나 여기 ** 백화점이야. 오랜만에 너무 친한 친구를 만나서. 그렇지. 뭐? 지금?”
말을 하며 윤아는 곤란한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지금은 좀 곤란한데? 왜 그래? 뭐? 정말?”
“왜. 급한 일이야? 가야 돼?”
“으응….지금 좀….”
윤아는 전화를 들고 잠깐 난감한 표정을 해보였다.
“그럼 가. 연락처 주고가면 되지 뭐.”
내 말에 윤아는 그래도 되겠어? 하면서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내 말에 윤아는 알았어, 그럼.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더니 주머니를 마구 뒤적여 작은 펜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
에 있던 냅킨을 하나 뽑아들고 서둘러 전화번호를 적었다. 아마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이거 우리 집 전화번호거든? 내가 거의 매일 집에 있어. 그러니까 이른 새벽이든 밤늦게든 언제라도 전화해. 알았지? ”
“그래. 그래. 알았어.”
“나 갈께. 참, 그리고 계산은 내가,”
“야아 ㅡ 무슨 소리야. 내가 하고 갈께. 얼른 가기나 해.”
나는 계산서를 집으려는 윤아의 손을 얼른 쳐낸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지금 아무리 궁핍해도 커피값 6천원 정
도는 충분히 낼 수 있었다.
“미안해. 대신 내가 다음에 밥 살께. 알았지?”
“그래. 알았어.”
“연락해! 꼭!”
윤아는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더니 시야에서 황급히 사라졌다. 성격이 급한 건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나는 참, 하면서 피
식 웃다가 카운터 위의 시계가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나도 집에 가서 얼른 밥 해야 하는데!
그나저나 이렇게 우연으로라도 윤아를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내내 연락이 안돼서 걱
정했었는데 이렇게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며 지갑을 꺼내기 위해 청바지 뒷주머니를 더듬다가 나는 일순 창백해졌다.
어라?
이, 이럴리가 없는데?
“잠깐, 아까 지하에서 계산을 하고 분명히 다시 주머니에….?”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 번 주머니를 뒤졌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분명히 지갑이 들어있어
야 할 주머니는 판판하게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한참을 미친듯이 이 주머니 저 주머니 심지어는 장을 본 비닐봉지 안까지 뒤져보다 나는 기가 막혀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가 사람잡는다고 정말로 아무곳에서도 지갑은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당장 주머니에 돈은 한 푼도 없고 윤아는 이미 가버렸는데!
아아아! 어쩌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