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26>
“어떡하긴 뭘 어떡해! 팔자를 고치는 거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화기 저편에서 윤아가 빽 소릴 질렀다.
아유. 깜짝이야.
간 떨어질 뻔 했쟎아, 하고 이마를 작게 찡그리며 대답했더니 윤아는 또 위기의식이 없다고 난리법석이다.
사태가 이 정도까지 됐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를 잘 모른다나?
나도 알아. 알고 있다구.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어서 그런 것 뿐이야.
이건 어디까지나 짝사랑이쟎아.
남들처럼 고백할 수도 없고 설사 고백한다 하더라도 앞날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섣불리 고백이라도 했다가 그날로 당장 쫓겨나면 어떡해?
내가 망설이며 그런 이야기를 하자 윤아는 누워서 떡먹기보다 쉬웠던 자신의 케이스를 들먹이며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하란 말야! 수단과 방법을!> 이라고 소리치더니 바쁘다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게 말이 쉽지 승화랑 성욱이랑 똑같냐?
성공할 확률이 0.05%도 안된단 말야. 나는!
아아 나는 왜 하고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면 강성욱같은 놈을 좋아하게 돼 버린 걸까.
돈이 없어도 못 배웠어도 나만을 사랑해주는 다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아무리 좋아해봤자 내가 뭘 어쩌겠다고…
전화를 끊고 난 뒤 푹신한 오리털 이불을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고 침대에
누워서 나는 별의별 가능성을 다 생각하며 이리저리 몸부림쳤다.
정말 미친 척 하고 한 번 대시해볼까….
그러면 최악의 경우는 그 자리에서 집 밖으로 내쫓기는 거지만….
만약, 만약 그 반대의 경우라면…..
놈과 오래도록 함께 살게 되는 건가…
반대의 경우를 떠올리자마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어차피 여기서 더 잃을 것도 없는데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지.
성질 더러운 거야 잘 가르쳐서 길들이면 되고 돈도 많고 얼굴도 잘 생겼으니 잘만 잡으면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 때는 격.
(뭔가..비유가…ㅡㅡ;;)
무엇보다도….내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란 말야.
그래서 결심했어!
내 미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놈을 꼭 내 손아귀에 넣고 말겠어!!!
그리하여 나 황보경 사흘밤낮의 심사숙고 끝에 <강성욱 발목잡기>라는 가공할 작전을 세우게 된 것이다.
비록 나중에 처절하게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 8장: 오블라디 오블라다 ♪
음….
아직도 감기 기운이 남았는지 조금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나는 거실에서 주워온
세련된 여성지를 열심히 뒤적였다. 잡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
는 이런 저런 란제리 선전이나 가십기사말고 내가 원하는 건…..
아! 여깄다!
<사랑하는 그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 이라는 특집기사.
제목이 좀 유치찬란하긴 하지만 효과만 확실하다면야….
유혹이란 걸 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르니 그 방면에 능숙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빠르겠지.
윤아의 말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놈을 꼭 손에 넣고야 말겠
다는 굳은 신념이 내 얼굴에 드러나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
든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펼쳐진 페이지를 한 줄 한 줄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가며 열심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제 1 단계
<당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라>
서, 성적 매력?
나한테 그런 게 있었던가?
왠지 첫번부터 난관에 빠진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손거울을 찾아 침
대 옆 사이드 테이블 을 열심히 뒤적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거울이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욕실로 통하는 탈의실 옆 복도에 서서 커다란 전신거울에 내 얼굴을 자세히 비쳐 보았다.
……어느새 길어져 목덜미에 닿는 머리카락과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뺨, 작은 코, 그
리고 별 개성없는 반원형으로 얇은 쌍거풀 아래 언제나 조금 겁먹은듯한 인상을 풍기는 눈까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섹스어필(?)하거나 관능적인 구석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쟎아!
아냐 아냐 뭐든지 노력이 필요한 거니까 다시 한 번….
거울 앞에서 물러서 입고있던 파자마 단추를 두어 개 풀러 목덜미가 드러나도록 한 후 나는 최
대한 도발적(…ㅡㅡ;;)이고 섹시하다고 생각되는 포즈로 거울 앞에 서서 어깨를 조금 뒤로 젖혀보았다.
우 ♡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바, 바보같아...ㅡㅜ
…어딘가 모자라보이는 이 얼굴로 그래봤자 놈한테 비웃음만 살 게 뻔하다.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벽에 부딪치다니….
안되겠다. 첫번째는 패스하고 그 다음은….
나는 서둘러 침대로 돌아와 그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제 2단계
<당신이 항상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하라.>
어떻게?
미간을 찌푸리며 나는 두꺼운 소제목 아래 씌여진 본문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를 위해 음식을 한다든지 세탁을 하며 당신의 존재를 눈치채
게 하라. 당신이 언제나 상냥하고 가정적이며 그를 위해 헌신적으로.…”
안 그래도 이건 내가 날마다 하는 일인데?
죽어라고 해줘봤자 별로 고마워 하지도 않던데 이런 게 대체 무슨 효과가 있다는 거야?
“이거 순 사이비아냐!”
신경질이 나서 나는 잡지를 탁 소리나게 던져버리고 침대 위에 앉아 엄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뭔가…엄청나게 획기적인 계기가 필요한데….
그치만 아이큐 100이 간신히 넘은 내 머리로 지금 당장 무슨 뾰족한 수를 생각해내는 것도 무리고….
하는 수 없다. 이거라도 읽고 시키는 대로 따라해야지.
절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인
상을 쓰며 바닥에 던져진 잡지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런데 그때 똑똑 하고 노크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문 틈으로 강세련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왜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침대 위의 디지털 시계를 가리킨다.
오후 네 시 삼십분.
요컨대.
<간식시간>이라는 거지.
잘났어 정말.
나 아파서 누워있을 동안은 어떻게 참은 거야?
“지금 나갈께요.”
계획은 계획이고 일상은 일상이니 하던 일에는 충실해야지.
나는 체념의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고 방바닥에 던져두었던 앞치마를
찾아 두르고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거실의 소파에 길게 누워 뿔테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고 있던 작은 누나가 인기척에 반쯤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보고 놀
란 얼굴로 물었다.
“왜 나왔어요? 더 자지.”
작은 누나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강세련을
재빠르게 째려본 다음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에, 이제 다 나았어요.”
“뭐 하려구요? 내가 도와줄께요.”
“아뇨.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신문을 접고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작은 누나를 만류한 다음 나는 느릿느릿 식당
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요 며칠 앓느라 시장을 못 봐서 먹을만한 게 별로
없었지만 냉동실 안에는 꼼꼼하게 손질된 생선과 고기들이 알루미늄 케이스에 담겨
칸칸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새우가 있네….야채랑….뒤져보면 다용도실에 고구마도 있을텐데….
가볍게 튀김이나 좀 할까?
그러면 이따가 성욱이가 올 때쯤에는…..
무의식중에 식당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놈이 돌아올 시간을
가늠해보다 나는 사르르 얼굴을 붉혔다.
….왠지 놈이 돌아오기를 너무 기다리는 것 같쟎아.
뭐 굳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누가 쳐다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저절로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나
는 커다란 볼에 계란을 풀기 시작했다. 튀김 옷을 만들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반죽에 쓰이는 물의 온도이기 때문에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동안 야채를 다듬어 얇은 스틱형으로 썰고 새우를 꺼내 해동시키고 전분을 체에 치며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에 다른 일들은 모두 다 잊고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데 작
은 누나가 빈 컵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왔다.
“보경씨 나 주스 한 잔만 더,”
“아, 예. 제가 꺼내 드릴께요.”
밀가루가 범벅이 된 손을 황급히 앞치마에 닦고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아침에 갈아놓은 오렌지 주스 병을 꺼내 들었다.
“모자라면 제가 이따가 더, 아…!”
말을 하다말고 움찔하며 나는 밀가루가 묻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왜 그래요?”
“아아…자꾸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서요….”
간신히 실눈을 뜨고 대답하자 작은 누나는 그래요? 하고 나를 바라보다 아! 하고 딱 소리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보경씨. 머리 좀 다듬어줄까요?”
“네?”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지만 작은 누나는 <내가 왜 여태 그 생각을 못 했지?> 하고 기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내 팔꿈치를 붙잡고 거실로 질질 끌고 갔다.
“이리 좀 와 봐요.”
“아니, 저, 왜….!”
그리고는 테라스로 뛰어가 내가 엊그제 세탁하려고 꺼내놓았던 시트를 가져와 내 목
주위에 칭칭 감싸 리본형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뭐, 뭘 하실려구요…”
한쪽 뺨에 밀가루를 묻힌 채 튀김용 젓가락을 들고 뭔지 모를 위화감에 더듬거리고 있는
데 그 사이 위층에 뛰어 올라갔던 작은 누나가 외국 모델들이 촬영할 때나 들고 다니는 작
은 사각의 손가방을 들고 강세련의 팔을 잡은 채 계단을 급하게 내려왔다.
“뭐야, 나 막 샤워하려고 그랬단 말야.”
검정색의 긴 슬립 원피스 차림의 강세련이 짜증스런 얼굴로 불평했지만 작은 누나는 들
은 척도 않고 회심에 찬 얼굴로 거실의 1인용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가리켰다.
“봐 봐, 보경씨 두상 너무 근사하지? 잘만 하면 스타일이 멋질 것 같지 않아?”
“……그래?”
순간 나를 보는 강세련의 눈빛이 번쩍 빛난 것처럼 느껴진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흐음, 하고 내 뒤로 다가와서 긴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이리저리 헤쳐보던 강세련이
<좋아! 결정했어!> 하고는 가방을 열어 푸르스름하고 날카롭게 손질된 가위를 꺼내들었다.
헉! 뭐, 뭘하려구요..!
내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올려다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맞은편에 서있던 작은 누나가 후후, 하고 미소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챦아요. 보경씨. 저래뵈도 뉴욕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타일리스트예요. 나쁘게 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무슨 소리야? 헤어 커팅만은 비달 사순한테 직접 사사받은 몸이라구. 예약이 아니면 받지도 않는데 영광으로 알아야지.”
비달 사순인지 비단 사슴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야야야! 머리 잡아당기지 말아요!
내가 버둥거리건 말건 강세련은 손가락으로 층을 내가며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쓸어보고
넘겨보고 하더니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우수수 ㅡ
아아! 내 머리카락이!
내가 경악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세련은 날카로운 손놀림 사이사이 투덜거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정말 누가 잘랐는지 최악의 센스네. 사이드 라인을 완전 무시하고 제멋대로 잘라냈쟎아!”
네. 네. 그거 동네 미장원에서 4000원주고 자른 머리예요…ㅠㅠ
그래도 그렇게 맘대로 자르면 어떡해요!!!
“자, 다 됐다.”
날 선 가위가 무서워 꾹 참는 줄도 모르고 한참동안 멋대로 가위를 놀려댄 강세련
은 조금 뒤 가방 안에서 크림타입의 향이 부드러운 젤을 꺼내 양쪽으로 슥슥 발라주더
니 <다 됐다!> 하고 만족스런 얼굴로 소리쳤다.
이거 보세요, 사람 머리를 그렇게,
“어머, 보경씨! 너어~무 깜찍하다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 다시 앉은 건 지켜보고 있던 작은 누나의 탄성 때문.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은 누나는 내 주위를 앞 뒤로 빙빙 돌며 연신 감탄사를 날렸다.
“정말 근사해요. 너무 잘 어울려! 처음 봤을 때부터 깜찍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그전 헤어스타일은 처음 본 순간부터 정말 눈에 거슬리더라니까. 내 손만 닿으면 이렇게 화려하게 변신하는데 말야.”
도대체 뭐가 어떻길래 그러는 거야?
감탄만 하던 작은 누나가 보경씨도 봐요! 하면서 건네준 손거울을 들고 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랬더니…
허걱! 이거 깻잎머리쟎아!
그것도 6 대 4 비율!
“어머. 너 얼굴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당연히 마음에 안 들죠! 가 아니고….어…나 뭔가….
소리치려다 말고 나는 놀란 눈으로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결을 살리며 귀 뒤에 가지런히 꽂아진 옆머리. 반짝반짝 윤기가 나
는데다 목덜미를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단정한 스타일.
머리를 흔들면 그대로 찰랑찰랑 종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뭐, 뭘 어떻게 한 거지….
“이쁘죠? 그렇죠?”
이리보고 저리봐도 처음 해보는 그 헤어스타일이 생소해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작은 누나가 웃는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네…뭐 조금….”
“당연하지. 누가 한 건데.”
드러내놓고 기뻐하지는 못하고 조금 기분좋은 얼굴로 대답하는데 가위를 마른
헝겊으로 닦아 다시 케이스에 집어넣던 강세련이 잘난 척하며 말했다.
조금 얄밉기는 하지만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드니까 그냥 봐주자.
“그럼 저는 이만.”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진 내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내고 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얌전
히 귀 뒤에 꽂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헤어젤의 오렌지향이 좀 낯설었지만….헤헤헤.
요리하는 사이사이 냉장고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배시시 웃음지었다.
놈도 돌아와서 나를 보면….예쁘다고 생각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평소보다 배는 더 들뜬 마음으로 나는 열심히 새우를 튀기며 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딩동 ㅡ 딩동 ㅡ
왔다!
밤늦은 시각. 초조한 마음으로 빨래를 개다 말고 나는 나는 듯이
현관으로 달려가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세차게 현관문을 열었다.
거기에 서있는 것은 예상대로 머리와 코트에 묻은 흰 눈을 털어내고 있는 강성욱.
“다녀오셨어요?”
“음.”
늘 하던 대로 코트와 재킷을 벗어 나에게 건네주고 놈은 복도 안쪽의 욕실로 들어간다.
나는 무거운 코트와 재킷을 한 팔에 안은 채 졸졸졸 그 뒤를 따라갔다.
쏴아아 물소리가 나는 욕실을 바라보며 옷을 붙박이장에 걸다가 아 참 하고 식당으로 가
저녁상을 차린다.
“국 좀 더 드릴까요?”
조금 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타난 놈에게 두근두근하며 물었지만…
“됐어.”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국을 뜨며 날아온 대답.
이, 이러면 안 되는데….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
하는 수 없이 놈이 밥을 먹는 사이 타이밍을 맞춰 말을 건넬 기회를 노렸지만….
“잘 먹었어.”
탁, 하고 식탁 위에 수저를 놓는 소리에 상황종료.
오늘따라 뭐가 잘 안되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다른 때 같으면 밥 먹자마자 설거지부터 하는 나였지만 오늘은 예외다. 12
시가 가까운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잘 생각이 없는 듯 거실의 긴 소파에
앉아 <초미립자 광학>이란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을 펴드는 놈 뒤로 나는 슬금슬금
다가갔다.
손에 든 <알뜰주부의 재테크>란 책은 명백한 위장용이었다.
한발짝…두발짝…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극도로 세심하게 머리를 써서 다가갔는데 놈은 휙 하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어마 깜짝이야.
“과일이라도 깎을까요?”
손에 책을 들고 있다는 것도 깜박 잊고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놈은 아
주 잠깐 미심쩍은 눈길로 나를 보더니 <안 먹어> 하고는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치잇…! 눈은 장식으로 달고있냐?
<나 안 이뻐?>하고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꾹 참고 나는 손에 쥔 책을 건성으로 펼치며 다시 놈의 동정을 살폈다.
이번에야말로….
다섯발자국쯤 되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마악 발을 뻗었는데 놈이 갑자기 책을 탁 덮고 말했다.
“뭐야 너? 나한테 할 말 있어?”
네? 제가 뭘요?
오른쪽 발을 엉거주춤 뻗은 자세로 그 자리에 정지한 채 눈을 둥그렇게 뜨자 놈은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썼다.
"있어 없어?"
"...어, 없는데요."
“그럼 왜 아까부터 내 주위 반경 5미터 내에서 빙빙 돌아?”
아, 제가 그랬나요?
놈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 10미터쯤 놈에게서 물러났다. 그러자 놈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진짜 없는 거지?”
할 말이야 산더미같지. 그렇지만….
나느 다시 한 번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놈은 소파 위에 책을 집어들고 보란듯이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난 가서 잔다.”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상황.
뭐야 이건!
입을 멍하니 벌리고 놈이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보다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저 하나한테 이쁘게 보일려고 자른 머리인데!
본 척도 안 하고 그냥 싹 들어가 버리냐?
아아, 정말 저런 놈을 선택한 내 인생에 회의가 느껴지는구나.
너무나 황당한 반응에 실망해 한참을 소파에 엎드린 채 슬퍼하다 나는 간신
히 정신을 차리고 흐느적 흐느적 침실로 걸어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설거지가 문젠가.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안 하고 넘어가버릴 테다.
어두컴컴한 침실 안. 침대 옆의 스탠드에서 비치는 흐릿한 불빛 아래 창쪽으로 등을 돌리
고 누운 놈의 잠든 모습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나는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거대한 더블 침대의 맞은편으로 기어들어갔다. 침대가 움직이는 기척에 놈이 깨어나지
않을까 기대도 해보았지만….흥, 머리 끝까지 오리털 이불을 덮은 채 움직이지도 않고 잠만 잘 자고 있다.
씨이…나는 이렇게 네 옆에 누우면 그러고싶지 않아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데.
넌 내가 머리를 자른 모습을 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지?
병원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달리 예전처럼 냉정해진 놈에게 속도 상하고 분하기도
해 나는 놈처럼 이불을 머리 위까지 휙 끌어올리고 최대한 놈에게서 멀리 떨어져 침대 끝 쪽에 달라붙었다.
두고 봐. 내가 꼭 너를 넘기고야 말 테니까.
시련이 강할 수록 투지는 불타오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