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29/141)

 비운의 신데렐라 <28>   

너 이 자식! 앞으로 일주일 동안 나한테 밥 얻어먹을 생각은 하지도 말앗!

연달아 두 잔이나 되는 물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입가로 흘러내린 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놈

을 째려봤지만 그 한 서린 눈길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놈은 꿈쩍도 안 하고 예의 그 <

완벽한 자세>로 식사를 하며 나의 반응 따위는 절대 무시하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런 놈을 짝사랑하는 내가 정말 바보같아…ㅠㅠ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이미 좋아하게 돼버린 것을.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설령 그 상대가 아무리 나쁜 놈이라도 일단, 좋아하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끌려가는 게 타고난 내 성격이다.

아아, 나는 어쩌면 이렇게도 일편단심인 걸까….(뭔가 그 말의 의미를 상당히 착각하고 있는 황보경양. ㅡㅡ)

고개를 떨군 채 수저를 한 손에 쥐고 있다는 것도 잊고서 슬퍼하고 있는데 그 자세를 뭔가 

오해했는지 맞은편에 앉아있던 작은 누나가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전복찜을 내 앞으로 밀어주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보경씨 찬이 입에 안 맞아요? 통 먹지를 않네. 이것 좀 한 번 먹어봐요.”

그런 거 챙겨주시기 전에 먼저 놈부터 좀 처치해 주세요. ㅠㅠ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어 나는 그냥 한 번 기운없이 웃어보였다.

“많이 드세요. 전 지난 번에 왔을 때 많이 먹었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방 안에 흐르는 침묵. 

“….지난 번에? 보경씨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어요?”

“네? 아, 네...”

한참만에 나온 작은 누나의 놀란듯한 물음에 대답하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놈을 바라보았다.

야 너가 얘기 안 했어? 왜 저렇게 놀라는 거야?

하지만 놈은 말이 없고 대신 그 뒤를 이은 것은 잔뜩 날카로와진 강세련의 목소리.

“언제?”

무섭게 가뜩이나 큰 눈을 왜 더 크게 뜨고 그러는 거야 …ㅡㅡ 

“한…두 달쯤 전에…”

“성욱이가 데리고 왔었어?”

당연하지. 그럼 가난한 서민인 내가 무슨 재주로 이런 비싼 한식집에 드나들겠어?

내가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산호빛 립스틱이 칠해진 강세련의 입술 사이

로 하, 하고 기가 막힌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작은 누나는 에…하면서 뭐라고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고…놈은 어쩐지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처해? 왜?

나는 내가 뭘 잘못 말했나…. 하고 기가 죽어 주위를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하지

만 나에게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뒤로 이해할 수 없는 침묵뿐이었다.

뭐야 이 반응들은? 나는 이런 데 오면 안되는 사람이야?

막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는데 왠지…그러기엔 이 분위기가 뭔가 상당히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뭐지? 분명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데?

혼자서 마구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다음 순간 뭔가에 화난 사람처럼 갑자기 놈이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어라?

“성욱아 너 어디가?”

“화장실.”

작은 누나의 말에 놈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하고는 드르륵 문을 밀고 나가버렸다.

“그래? 어…나도 잠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누나도 놈을 따라 나가버리자 방 안에 남은 것은 나와 몹시도 분한듯한 표정의 강세련.

“설마 설마 했더니 성욱이가 정말 그럴 줄이야…”

에?

“무슨 말씀이세요…?”

못 알아듣겠단 얼굴을 하자 입술을 꼭 깨물고 한참을 노려보

듯 나를 바라보던 강세련은 분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내뱉는다.

“흥. 얼굴도 꼭 얼룩 강아지같이 생긴 게.”

캭! 뭐라구!

얼룩 강아지라니! 얼룩 강아지라니!

그거 지금 나한테 한 말이지!

나는 흥분해서 얼굴이 갓 삶은 새우처럼 시뻘겋게 되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얏!

그래! 나 얼굴 둥그렇고 팔 짧고 다리짧다! 그런데 거기 보태준 거 있냐?! 

격분해서 소리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강세련이 손을 뻗어 내 볼을 

쿡 쥐더니 양쪽으로 쭈욱 인정 사정없이 잡아 당긴다.

아야야야야야야야얏 ㅡㅡㅡㅡㅡㅡㅡ

그렇게 한참을 쥐고 흔들더니 어느 순간 탁, 하고 놓아버린다.

“칫. 지나치게 말랑말랑한 것도 맘에 안 들어.”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오…ㅠㅠ

불시의 기습에 그로기 상태.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아우우….”

나는 사정없는 공격에 반항할 의욕도 잃고 발갛게 부어오른 뺨을 손바

닥으로 감싼 채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강세련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는 조금 기분이 풀린듯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맘에 안든다는 얼굴을 하고있다.

뭐가 불만인 거야…대체…

“너가 남자애니까 이 정도로 봐준거야! 만약에 여자애였으면 어림도 없어!” 

끝까지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제멋대로 방을 나가버린다.

“이 사람들이 정말!”

가만히 있으니까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거야? 왜 이래? 다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는 거냐구!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작은 누나는 정원의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내 질문에 신기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럼 모르니까 묻지 알면 바보같이 그걸 왜 묻겠어요….

꼬집힌 뺨이 아직도 아파서 달아오른 얼굴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손에 쥔 커

피캔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건 말하자면…”

말을 하며 조금 고심하는 얼굴로 맞은편 호숫가에 서있는 놈과 강세련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생긋 웃는다.

“나도 잘 모르는데.”

캿!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내가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자 작은 누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산책이나 할까요? ”

산책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깐요! 지금 제가 알고 싶은 건,

다시 한 번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작은 누나는 빙글 하고 몸을 내

쪽으로 돌리더니 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꺼낼 때처럼 눈을 반짝였다.

“아, 우리 성욱이 어렸을 때 얘기 해줄까요?”

핫!

작은 누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귀가 쫑긋했다.

놈의 어린 시절 얘기?

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단 말야?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나는 놈이 다른 사람들처럼 유아기에서 소년기

를 거쳐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믿을 수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저렇게 생긴 거 아니었어?

“아, 별로 재미없을까요?”

아니에요! 해주세요! 너무너무 듣고 싶어요!

내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자 작은 누나는 듣고 싶어할 줄 알았어요, 하고 웃더

니 아직도 강세련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있는 놈 쪽을 슬쩍 넘겨보며 말했다.

“우리 성욱이 어렸을 때부터 얼마나 고집이 셌는지 알아요?”

그건 말 안해도 뻔하죠. 지금도 저렇게 제멋대로인데 멋 모르는 유아시절에야…ㅡㅡ

“하긴. 그럴 만도 하죠. 부모님이 나이 오십 가까워서 얻은 아들이라 어렸을 때부

터 유모에 가정부에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컸으니까. 있쟎아요 보

경씨. 우리 부모님이 재를 어느 정도 애지중지 하셨냐 하면, ”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하다는듯 작은 누나는 발을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경씨. 캐딜락이라는 차 알죠?”

난데없이 왠 캐딜락?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게 차 이름이었구나아…

내 대답에 작은 누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성욱이가 유치원 다닐 때만 해도 서울 시내에 캐딜락이 손꼽힐 

정도였죠. 그 중 한 대를 우리 아버님이 가지고 계셨는데 그 오래된 차를 너

무 아끼셔서 우리 형제들은 아무도 안 태워주고 다 걸어서 등교하라고 그러셔도 성

욱이는 매일 아침 손수 운전해서 유치원에 데려다 주시곤 하셨어요. 차에 흠집난다고 

큰오빠나 우리들한테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으면서.”

“…..”

“그러니 상상이 가죠? 성욱이를 얼마나 편애하셨는지. ”

어, 어렸을 때부터 왕자였구나아…ㅡㅡ;;

예상은 했었지만 나와는 너무나 달랐던 놈의 과거에 나는

 조금 쇼크를 먹고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 이유없이 그렇게 비사교적인 성격이 된 게 아니었어.

나면서부터 그렇게 무시무시한 대우를 받았으니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거겠지.

“그러니까 말이죠, 쟤가 저렇게 냉정한 남자가 된 건 조금

은 주위환경 탓도 있다 이 말이에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죠?”

그, 그럼요. 이해하고도 남죠.

내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작은 누나는 만족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보경씨라면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이런 얘기하면 좀 우습게 들

릴지도 모르겠지만 나 보경씨를 처음 본 순간 왠지 이렇게 될 줄 알았거든요.”

이렇게 돼? 뭐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성욱이가 함께 있기엔 까다롭고 좀 오만하더라도 보경씨가 이해해줘요. 제멋대로긴 해도 나쁜 애는 아니니까.”

작은 누나가 이렇게 말하고 내 손을 꼭 붙잡는 바람에 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앞뒤를 맞춰보자면 그건 역시 놈에게 잘 해주라는 얘기겠지.

작은 누나가 그런 얘기 하지 않아도 놈에게 흑심((?)을 품고있는 나로서는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래도 동생을 생각하는 그 마음에 감동되어 나는 절대 놈과 다

정하게 잘 지내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말았다.

ㅡ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ㅡㅡ;;)

“아, 이제 춥다. 우리 그만 들어가요.”

내 말에 미소짓던 작은 누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벌써 삼십분이나 지났네?> 하고 놀란 

목소리로 말하고는 어~이~ 하고 호수 저편의 놈과 강세련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나 작은 누나에게 뭔가 묻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 질문이 뭔지 다시 떠올릴 사이도 없이 나는 아~ 추워라~ 하고 부르르 어깨

를 떠는 작은 누나의 손에 이끌려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놈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정했던 우리들과는 달리 놈과 강세련은 무슨 논쟁이라도 별인듯 둘 다 어딘지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성욱아.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갈까?” 

“지금?”

“응. 밥도 먹었고. 어차피 모레쯤 인사드리러 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래. 그럼. 내가 계산할 테니까 누나들은 주차장에 가 있어.”

“알았어.”

그 할아버지를 안 기다리는 건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작은 누나를 따라가려고 빙글 돌아섰을

 때였다. 놈의 강인한 손이 뒤에서 내 옷소매를 꽉 잡았다.

…에?

“넌 어딜 따라가?”

“어…주차장에…”

“넌 이리와.”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손목을 잡혀 질질질.

"왜, 왜요?”

놈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름대로 미약하게 반항하자 놈은 

“큰누나한테 또 괴롭힘당하고 싶어?” 하면서 한 마디로 내 말을 일축한다.

그, 그건 아니지만…

아까의 그 장면이 생각나 나는 조금 겁을 먹었다.

그런데 얜 보지도 않고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야. 설마하니 그 사악한 여자가 자기 입으로 그걸 말했을 리도 없고.

혼자서 궁금해 하고 있는데 여느때처럼 카드로 계산을 마친 놈은 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향하며 말했다.

“앞으로 사흘 뒤면 누나들 떠나.”

“네? 어딜 가시는데요?”

깜짝 놀라 물었더니 귀챦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긴 어디야? 미국이지.”

“그럼 여기는…?”

“놀러온 거야. 그럼 누나들이 여기서 평생 살 줄 알았어?”

캿. 같은 말이라도 좀 이쁘게 하면 덧나나. 말 끝마다 <너 바보 아냐?> 

라는 뉘앙스를 팍팍 던지면! 내가 모를 줄 아냐!

잠깐. 그러면 뭐야. 저 골칫덩어리 강세련이 드디어 떠난다는 말?

흥분하다 말고 깨달은 사실을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 놈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는 사이

에 강세련에게 <저…미국으로 다시 가세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더니 

“그럼. 내가 여기서 평생 살 줄 알았어?” 라고 가시돋친 어조로 응수한다.

어떻게 된 게 누나나 동생이나!

“너 너무 좋아하지 마. 둘이서 편안히 살게 놔 둘 마음은 꿈에도 없으니까.”

헉! 들킨 건가?

드디어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 나를 찌리릿! 하고 스파크를 튀기

며 뭔가가 몹시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강세련이 단언하듯 그렇게 말하자 

작은 누나가 그 사이에 끼어들어 나무라듯 말했다.

“그만 좀 해라. 너.”

“내가 뭘!”

“보경씨가 이해해요. 얘가 지금 샘이 나서 그러는 거니까.”

왜 내가 샘이 나는 걸까…

작은 누나의 말에 조금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새 놈이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어 미끄러지듯 앞에 섰다.

“타요, 보경씨.”

“네? 아, 네.”

이번에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무사히 놈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뒷자석에 앉은 강세련이 신경쓰여 백미러로 살

그머니 쳐다봤더니 이마를 찌푸린 채 심각한 얼굴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 

아까 뭘 잘못 먹었나? 아무래도 이상하네. 

조용해진 차 안의 공기에 긴장하고 있는데 차가 남대문 근처로

 빠져나오자 강세련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성욱아. 나 이 근처에 내려줘.”

“지금?”

갑작스런 말에 작은 누나가 의아한 어조로 묻자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 위의 소형백을 집어든다.

“응. 기분이 안 좋아서. 쇼핑이라도 해야겠어.”

헛. 나들이 가다말고 왠 쇼핑?

이상한 얼굴을 하자 작은 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욱아. 나도 생각해보니까 그게 낫겠다. 그렇쟎아도 살 것 있었는데 

우리 먼저 내려주고 너네는 집으로 돌아가던지 아니면 근교에 바람이라도 쐬러가

던지 마음대로 해.”

“좋을대로.”

놈은 그렇게 말하고 가까운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럼 잘 들어가고 이따봐요. 보경씨.”

“아, 네….”

눈을 찡긋 한 뒤 차문을 닫고 나가는 작은 누나를 향해 인사하고 나서 나는 동요된 얼

굴로 침을 꿀꺽 삼키며 옆자리의 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

럼 놈은 차를 출발시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원래 저러니까 신경쓰지 마.”

“네에…”

너 같으면 신경이 안 쓰이겠니?

원래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심한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은 좀 너무하쟎아.

두 사람이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놈이 지금 어디로 가

는지에 신경이 쓰여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근데요….”

“말해.”

“저기 우리…지금 어디로 가요?”

내 질문에 놈은 차들로 가득한 도로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집.”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집에 가는 거야. 이런 날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니까.”

뭐야, 그럼 누나들이 아니면 어디 갈 생각도 없었단 말야?

그럼 꽃단장하고 쫓아나선 나는! 뭐가 되는 거냐!

하다못해 어디 동물원에라도 한 번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야속한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놈은 중간에 단 한군데도 들르지 않고 곧장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더니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코트를 소파에 던져놓고 샤워를 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에이~ 씨!

뭐 이런 나들이가 다 있어?!!

분한 생각에 거실 카페트 위를 한 발로 탕탕 구르고 있는데 욕실에서 놈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잠깐 이리 와!”

헛 ~

“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두두 달려가 욕실 앞에서 묻자

“수건 없어?” 하고 찾는 소리가 들린다.

“아, 일광욕실에 널어놨는데. 지금 가져올께요.”

“아, 됐어. 그것 말고, 나 지금 나갈 테니까 쥬스가져와.”

“…..네.ㅡㅡ”

사람을 잔뜩 들뜨게만 해 놓더니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나는 툴툴거리며 패딩코트를 벗어놓고 식당으로 가 냉장고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제 아침에 먹은 게 마지막이었는지 오렌지 병은 텅 비어 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용도실 문을 활짝 열고 지난번에 사서 어딘가에 두었던 사과 쥬스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용도실 선반에는 와인이며 소스, 야채 바구니들이 가득 올려져 

있어 그 틈에서 주스 한 병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여깄다.”   

간신히 주스병을 찾아들고 식탁에 앉아 뚜껑을 따려는데 문득 식탁 한 쪽에 놓여있던

 가계부 사이로 삐죽이 나온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펼쳐보니 X 표가 78개.

이 집에 온 지 벌써 두 달하고도 반이 넘었다는 얘기다.

“으음…벌써 그렇게 됐나…”

처음에는 이 집에서 나갈 날만을 기다리며 표시하던 X 표가 이젠 상황이 바뀌어 놈을 넘기는

데 얼마만한 시간이 들 것이냐를 가늠하는데 쓰이고 있으니 인생 참 요지경이지.

하지만 그 가위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초조해질 수 밖에.

“….누나들도 곧 떠날테고.”

처음에야 자신 없었지만 이젠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누나들이 떠나고 나면, 그때야말로 결판을 내고 말겠어.

나 황보경 한다면 하는 성격이라구.

“야! 아직 멀었어!?”

주먹을 불끈 쥐고 화르륵 불타오르고 있는데 식당 밖에서 놈이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참! 나 지금 쥬스 가지러 온 거였지!

“네! 지금 가요!!!”

나는 재빨리 컵에 담아놓은 주스를 쟁반에 받쳐 놈의 방을 향해 날랐다.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창가의 사이드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펴놓고 화면을 들

여다보고 있던 놈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뭘 하다 이제 오는 거야?”

누가 보면 나 보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겠다 야. 

그거 조금 늦게 가지고 왔다고 왜 인상은 쓰고 그래?

하여튼 그 놈의 성질머리 하고는…ㅡㅡ

“오렌지 쥬스가 없어서요… 다용도실에서 찾느라고….”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내가 노트북 옆에 쥬스잔을 내려놓고 슬슬 물러서자 놈은 말없이 다시 휙 노트북 앞으로 돌아섰다.  

쳇, 마시지도 않을 걸 왜 가져오라는 거야?

놈을 째려보기 위해 눈을 확 가늘게 떴다가 나는 아니, 아니지, 하고 눈에 힘을 풀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쁘게 굴어야 하는 법.

“어…저기… 그럼 계속 공부하세요.”

나름대로 간드러진(?)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는 재빨리 방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조금 더 구체적인 전략을 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옷을 갈아입은 후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펴놓고 저녁거리로 쓸 콩나물을 다듬으며 생각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할까…..

밤에 자는 걸 그냥 확 덮쳐?

….아냐, 아냐. 이 방법은 성공 가능성이 절대 희박해…. 게다가 실패하면 진짜 끝장이라구.

나는 심각하게 찌푸린 얼굴을 한 채 콩나물 대가리를 기계적으로 뚝뚝 따냈다.

그러면….

저녁 때 먹는 국에 약을 탈까?

헉, 그건 범죄쟎아….

  

저, 정신 차리자, 황보경.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그 방법은 절대 써서는 안되지….

어디까지나….그 합법적으로….

“나 참…골치 아프네….”

내가 뭐 한 번이라도 연애를 제대로 해봤어야 알지. 아는 

거라곤 대부분의 남자들을 찡찡거리는 걸 싫어한다는 것 정도인데.

…..정 안되면 서점가서 <사랑의 기술> 이라는 책이라도 구해 읽을까?

나는 이리 저리 머리를 짜내느라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 뒤에서 갑자기 손이 휙 빧어나와 리모콘으로 TV 를 켰을 때는 헉! 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뭘 그렇게 놀래?”

“아니, 어, 어, 언제,” 

손으로 가슴 부분을 움켜쥐며 깜짝 놀란 얼굴로 더듬거리자 놈은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내 뒤의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이리 저리 채널을 바꾸며 태연하게 말했다.

“방금.”

그러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말을! 

왜 인기척도 없이 살금살금 다니고 그랫! 심장마비 걸릴 뻔 했쟎아!

설마 내가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건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놈의 얼굴을 보기가 겁이 나 나는 슬

금슬금 신문지를 그러모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저…식당에…콩나물 다듬으러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대답했더니 방금 전 내가 앉아있던 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그냥 앉아서 해. 방해 안 할 테니까.”

넌 존재 자체가 신경이 쓰인 단 말야!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우우…하는 수 없다.

나는 일어설 때처럼 머뭇머뭇 다시 그 자리에 앉아 거실 바닥에 신문지를 펼쳤다.

  하지만 놈이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쪽으로만 온통 신경이 몰리는 바람에 아까처럼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뭘 저렇게 관심있게 보고있는 거지?

고개를 수그린 척 하면서 슬쩍 TV 화면을 보니 남아메리카의 생태계에 관한 자연 다큐멘터리이다.

아유 참 고상하기도 하지.

자꾸 비교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성도 그 자식은 TV 라고는 오로지 오락

 프로그램밖에 보지 않으니까 나는 남자들은 모두 다 그런 것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 

뭐 나처럼 드라마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다 한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남은 콩나물 한 묶음을 다 다듬고 주위에 떨

어진 부스러기들을 줍고 있는데 별안간 놈이 말을 걸어와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 한 거냐고.”

“네, 그런데요.”

내가 의아한 얼굴로 대답하자 놈은 말없이 내가 손에 들고있던 바구니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큰누나가 너를 좀 괴롭힐지도 몰라.”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멀뚱멀뚱 쳐다보는 내 눈길을 피해 TV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놈이 말했다.  

“그래도 어차피 사흘 뿐이니까 그 동안만 네가 좀 참아.”

언제는 내가 안 참았나. 안 그래도 매일매일 수행하는 기분으로 참고 사는데.

“됐어, 그럼.” 

이게 동문서답을 하나. 왜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거야?

놈은 그 말만 하고는 알쏭달쏭하는 나를 뒤에 남겨둔 채 TV 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 참 별일이네. 아까는 강세련이 이상하더니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그나저나 내 말은 못 들었나 봐.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 다듬어 놓은 콩나물 바구니를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폭풍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이 시점에서는 물론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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