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12>
“에…우선 참기름에…잘게 썬 전복을 볶다가….음…앗, 뜨거!….음…그
다음에…..믹서에 갈아놓은 쌀을….앗, 물이 너무 많쟎아! 이런….!”
나는 얼른 냄비 안의 물을 국자로 떠내며 기름기 때문에 손에서 미끄러진 요리
책을 주워 보고있던 페이지를 찾아 뒤적였다.
전복을 싸고있던 랩에서 떨어진 물기로 식당 바닥이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지
금 그런 걸 신경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그 다음에는 쌀알이…다 풀어질 정도로 오랫동안 익혀라…?”
음…..
나는 요리책 화보 안의 맛깔스럽게 윤기가 도는 전복죽과 지금 냄비 안에서 끓
고있는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한참동안 번갈아 바라보다 체념한 표정으로 뚜껑을 닫고 불을 줄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난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까.
이제 죽도 끓였으니까….
나는 냉장고 옆의 장식장에서 사기그릇과 작은 교자상을 꺼내며 복도 안쪽의 놈의
방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아프긴 아픈 모양이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나서 어느새 칙칙 소리를 내며 끓고있는 냄비를 열고 한
번 뒤적인 다음 다시 뚜껑을 닫았다. 죽이라는게 보기보다 상당히 손이 많이 가고 까
다로운 음식이어서 벌써 세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간신히 태우지 않고 만들어낸 참이었다.
“어휴…”
난데없이 왠 가정부인가 했더니 이제는 팔자에 없는 간병인 노릇까지.
그치만 나라고 뭐 이걸 하고 싶어서 하나? 환자라 죽을 먹여야 한다는데 어떡해. 그렇다고
저 까다로운 입맛에 인스턴트죽을 사다 먹일 수도 없고. 결국 이 한 몸 희생하는 수밖에.
신세한탄을 하다보니 죽이 대충 다 끓은 것 같아 나는 렌지를 끄고 정체불명의 흐물흐물한
죽을 식히기 위해 잠시 나무주걱으로 휘저었다. 하지만 그 전복인지 뭔지 모를 시커먼게
불규칙적으로 뒤섞여 보기에 괴로운 죽도 조금 전 마른 행주로 세번이나 닦은 사기그릇
에 얌전히 담아놓으니 꽤 폼이 그럴 듯했다. 여기다….김도 조금 부셔서 얹으면….
“후훗. …역시 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니깐.”
이렇게 어려운 죽을 완벽하게(?) 끓여낸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나는 작은 교잣상에 죽그릇과
수저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다음 그걸 들고 발소리를 죽여 복도 안쪽의 놈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ㅡ
일단 문앞에 멈춰서서 가만히 노크를 해봤지만 감감 무소식.
자나?
의아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 가려는 순간 갑자기 휘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뭔가 커다란 것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나가!”
우왓 ….!!!
나는 놈의 고함소리가 들린 순간 스스로도 놀랄만큼 민첩한 반사신경으로 재빨리 몸을 숙
였다. 천만다행으로 죽은 그릇을 조금 넘쳤을 뿐 무사했으나….도대체 지금 뭘 던진 거야?
“뭐야!”
내가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침대에 기대 누워있던 놈이 극도로 날카로와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저…뭘 좀 먹어야….”
“안 먹어!”
이런 왕 싸가지를 보았나.
내가 기껏 손까지 데어가며 세시간이 넘도록 악전고투해서 끓여왔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나도 <그럼 니 맘대로 해!> 라고 마구 소리쳐주고 방문을 쾅 닫고
나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놈의 안색이 정말로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지 핏발선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입술,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렇게
나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정말 엄청나게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 약을 먹으려면 뭔가 먹어야…”
참을 인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을 받들어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어봤지만…
“시끄러! 나가!”
“아니, 저..”
“안 먹는다쟎아! 나가라니까!”
아프다는 놈이 정말 목소리 하나는 더럽게 크다.
이게 진짜 보자보자 했더니…
야! 나가면 될 거 아냐! 나가면! 위경련으로 죽든말든 니 맘대로 해!
화가 난 내가 휙 하고 몸을 돌려 방을 나오려고 했을 때였다.
고래 고래 소리치던 놈이 갑자기 윽 ㅡ 하고 비틀거리더니 다음 순간 푹, 하고 시트 위로 고꾸라졌다.
“우왓 ㅡ 왜 그래요! 괜챦아요?”
“….다 필요없어…..나 좀 내버려 둬….”
깜짝 놀라 달려간 나에게 힘겹게 그 말만을 남기고 놈은 다시 눈을 감고 쓰러져 버렸다. 놀라서
가슴팍에 귀를 대보니 다행히 호흡만은 정상인 것이 아마도 기절하듯 잠든 모양이었다.
“참 내.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화가 치밀어올라 잠든 사이에 한 대 때려줄까 했지만 목덜미며 이마에 식
은땀이 맺혀 있는게 눈에 들어와 나는 입술만 깨물며 놈을 노려보고 있다 결국 물수건을 챙겨
놈의 이마를 닦아주고 말았다. 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찬 물수건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놈의 속눈
썹이 움찔움찔 했다. 평소에는 정말 뒤에서 습격하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그 모습
을 보니 왠지 마음이 자꾸만 약해지는게….
하여튼 난 이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뭐가 안된다니까!
<뭐? 정말이야? 진짜 쓰러졌어?>
“그렇다니깐. 급성 위경련이래. 내가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나는 어깨와 턱 사이에 낀 무선 전화기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얼음이 든 통을
조심스레 테이블 위의 대야에 쏟아부었다. 우르르 얼음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대야에
들었던 미지근한 물이 금세 차가와졌다. 마침 냉장고에 얼려놓은 얼음이 가득 있어서 그나
마 다행이었다. 얼음물에 타올을 적시며 지금쯤이면 형이 한참 가게를 정리하고 있을 것
같아 전화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형은 이틀이나 연락이 안되 무슨 일인지 엄청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놈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주며 되도록이면 간략하게 놈이 쓰러진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가벼운 위경련이니 별로 걱정할 것은 없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그랬더니 진이형은 휴우, 하고 한숨을 쉬더니 다행이라는듯 안도하는 목소리로 말
했다.
<성욱이 걔도 몸이 약해서 정말 큰일이라니까.>
“뭐? 몸이 약해? 누가? 얘가?”
놈의 체온을 재기 위해 체온계를 흔들면서 비웃었더니 진이형은
<너 모르는구나? 걔가 몸이 얼마나 약한데! 막내인데다 몸까지 약해서 어렸을 때부터 엄
마 속 무진장 썩였쟎아. 그래서 걔네 집에서도 애지중지하며 금지옥엽처럼 떠받들어 키운
거 아냐!.>라면서 열을 올렸다.
어쩐지…그러니까 애 성격이 이 모양이지.
그나저나 이건 생각도 하지 못했던 놈의 뒷배경이네.
“형. 얘 집에서 막내야?”
<그렇다고 들었어.>
“형제가 몇인데?”
<5남매라지, 아마? 정확한 건 나도 잘 몰라>
히익 ㅡㅡㅡ 그럼 놈과 똑같은 인물이 네 명이나 더 있단 소리쟎아!.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손이 떨려와 나는 하마터면 젖은 타올을 시트 위로 떨어뜨릴 뻔했다.
그것도 모르고 수화기 저편에서는 진이형이 계속 뭐라고 혼자서 말하고 있었다.
< 그렇지? 어쨌든 보경이 네가 고생이다. 사람 간호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
“고생은 무슨. 형, 내가 원래,….”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나는 문득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놈이 어느새 일어났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 보고 있는게 아닌가!
“어. 형, 내가 다음에 다시 전화할께.”
황급히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또다시 놈이 소릴 지를까봐 침대에서 뒤로 조금 물러선 다음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저….괜챦아요?”
“……..”
내 말에 놈이 힘겹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열 때문인지 그 말은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아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그에게
로 다가가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뭐라구요?”
“…….아파.”
아…..
간신히 기도를 빠져나온 그 속삭이는 듯한 말뜻을 이해하자마자 나는 불현듯 마음이 저릿해
져 눈 앞에 있는 그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 보았다.
열에 들뜬 푸른빛 도는 검은 눈동자. 짙은 속눈썹까지 지친듯 물기에 젖어 투명했다.
너무나 열이 높아서 아마도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생각
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많이 아파요?”
대답대신 놈은 괴로운듯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음, 하고 괴로운 신음이 메마른 입술에서
힘겹게 흘러나왔다.
“아, 저 힘들면 말하지 말아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허둥지둥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위에 놓아둔 아무렇게나 놓여져있던 약봉지를 찾아
뒤적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물컵을 찾아 가루약을 붓고 휘휘 저어 스푼으로 조금씩 놈의 입가
에 흘려넣었다. 물론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턱으로 흘러 시트를 적시는 양이 훨씬 많
았지만 그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조금 뒤 그의 숨소리가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휴우….”
일단 한숨 놓은 다음 반시간쯤 후에 다시 체온계를 가져다가 체온을 재보니 좀 전보다 2도 떨어진 39도 5분.
일단 급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 그 사이 다 녹아버린 물을 놈의 방에 딸린 욕실에 가져다 버리고
냉동실에서 새 얼음을 가져다 타올을 적셔 쉴새없이 식은땀이 맺힌 이마와 목덜미를 닦아주었
다. 나에게는 생각외로 나이팅게일 기질이 잠재해있는 모양으로 새벽이 올 즈음에는 놈의 증세
도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 새벽 세시쯤 놈이 갑자기 괴로운듯 몸을 뒤척이더니 곧바로 아까
힘들게 먹인 약을 물과 함께 시트에 토해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계속 괴로운 표정으로 헛구역
질을 해대는 바람에 나는 아까 놈이 빈 속이었다는 걸 기억해내고 <죽을 먼저 먹이고 약을 먹였어
야 하는 건데!> 라면서 내 자신의 멍청함에 울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치만 놈이 그렇게 반쯤 기절해 있는데 절망에 빠져 있을 마음의 여유따윈 없었다.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만큼 바쁘게 움직이면서 시트를 얼른 벗겨서 세탁기에 넣고, 아까 만들어
두었던 죽을 다시 데워 억지로 먹이고, 열에 들뜬 목소리로 뭔가를 계속 찾는 놈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는 사이 어느새 밤은 가고 희뿌옇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