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59/141)

 비운의 신데렐라 <23>   

“글쎄….이걸로는 반지하밖에 못 구하겠는데.”

“반지하…요?”

“암. 요즘 집값이 어디 보통 올랐어야지. 그것도 금방 빠질지 안 빠질지 모르겠어.”

“…..네에.”

“어때. 그거라도 할테야? 그럼 내 구해주고.”

“아니에요…..다음에 다시 올께요.” 

나는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나 돋보기 안경을 치켜올리는 주인 할아버지

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안녕히 계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는 힘없이 부동산 중개소의 문을 열고 나왔다.

“하아….”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그런지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말랐지만 지쳐서 어디

 가서 앉을만한 자리를 찾을 기운조차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고개를 푹 숙이고 낡은 스웨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근처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으며 나는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이 걸로 일곱번째. 

비교적 집값이 싸다고 소문난 동네의 부동산을 버스를 이리저리 갈아타며 모

조리 찾아가봤지만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뿐이다.

그치만 지하는 정말 싫은데….

진이형이랑 처음 도시로 도망쳐 나와서 살던 방도 성도랑 살림을 차렸던 방도 반지하

 삯월세방이었는데 비만 오면 물이 새고 벽지가 일어나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지금도 지하라는 말만 들으면 숨이 가쁘고 목덜미의 솜털이 오싹 곤두설 정도

다. 오죽하면 내가 서울시내 어디를 가더라고 절대 지하철을 안 타고 죽어라고 버스만 

타고 다니겠냐고.

하지만 간신히 가격이 맞아서 보여주는 방들도 하나같이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낡

고 어두침침하고 곰팡이 냄새가 날 정도로 습해서 차마 발을 들여놓기도 꺼려져 한참

을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사정이 이러니 선뜻 방을 구해서 계약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그

 집에서 살자니 그것도 안되겠고….

“돈이 없다는 건 정말 비참한 거구나….”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버스 정류장 안의 벤치에 앉아서 나는 기운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진이형한테 말해서 돈을 구해볼까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형도 가게 수리비랑 가

게 얻을 때 쓴 이자 갚느라고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라는 걸 누구보다 뻔히 아는데 거기다 

대고 아쉬운 소리를 할 수도 없고….

“하아….답답하네. 정말….”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집에서 나오고 싶지는 않다.

넓지, 깨끗하지, 볕 잘 들어오지, 뜨거운 물 펑펑 나오지, 조건만으로 치자

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는데 내가 집 나와서 무슨 호강을 그리 하겠다고 기를 

쓰고 그 집에서 뛰쳐나오려고 하겠냐고.

이유는 단 한 가지.

얼마 전 윤아가 말한 그….일말의 가능성 때문이다.

맨 처음 윤아가 그런 말을 꺼냈을 때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조금 냉정해진 상태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는 의심이 마구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건 다른 악바리 고아들과는 달리 근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

도 없는 나 황보경이 한 달 사이에 휙 하고 마음이 뒤집어져서 놈을 좋아하게 되

었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소리다.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세상에 나 황보경이 그런 비인간적이고 냉정

하고 쌀쌀맞은 놈한테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사실 얼굴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떨린다는 건 TV연

속극 대사에나 나오는 얘기아냐? 

그런데 내가 왜! 어째서! 놈을 상대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거냐구!

장담하지만 분명히 이전에 애인들과 살 때에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호감이

 있어서 같이 살긴 했지만 그 누구의 앞에서도 놈을 대하듯 그렇게 긴장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나의 예전 애인들 모두 놈과는 외모나 재력 면에서 비교가 안될 만큼

 빈약했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면은 있었지. 아, 그렇다고 놈이 비인간적이라는 얘

기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 본다면 한참 떨어지지만 그

래도 아주 가끔, 나한테 잘해준 적도 있다. 지난 번 커피숍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

준 것도 놈이었고 생전 처음 나에게 옷을 사준 것도 놈이었다. 뭐 생각이 얕은 나로서는

 놈의 의도가 뭔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놈이 보이는 것 만큼 그렇게 차갑지는 않다는 

것이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놈이 나한테 쬐금이라도 그런 쪽으로 관

심을 보이거나 그럴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여야 내가 미친 척하고 대쉬라도 한 번 해보지.

이건 나를 무슨 집 안에 있는 세탁기나 냉장고같은 전자제품 수준으로 생각하

고 있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일이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가 없지 않은가. 

세상에 냉장고나 세탁기랑 연애하는 사람 봤냐고.

놈의 눈에 그것들과 내가 다른 점은 말을 하고 움직인다는 것, 그 두 가지 뿐일텐데. 

자꾸 생각을 하다보니 나 스스로가 더욱 비참해져서 나는 하루라도 빨리 방을 

구해서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뭐 내가 놈을 쬐끔, 아주 쬐

끔 좋아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크게 걱정할 문

제는 아니고 집을 나와 혼자서 생활하다 보면 모든 문제가 조금은 단순해지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아침에 집안을 치우고 청소를 끝내자마자 공과금을 낸다는 핑계로 집

을 나와서 하루종일 돌아다닌 건데…. 가는 곳마다 그런 대답만 들었으니 정말 맥이 빠진다.

“그래도 가야지….거기 아니면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나는 3대의 버스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온 네 번째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아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차창에 비친 내 모

습을 보니 왜 그렇게 마음이 처량하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정도였

다. 하지만 그렇게 울고 싶을 때마다 울 수 있다만 나는 아마 옛날에 눈물로

 다 녹아서 흘러내렸을 것이다. 

참아야지. 울고 싶어도 꾹꾹 눌러 참을 거야.

나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않는 맨 뒷자석의 창가에 앉아 금방이라도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으니 언젠가는 나에게도 찬란한 날이 올 거야. 라고 스스로를 억지로 위로하면서.

하지만 그 볕이 언제 들지는 정말 모르겠어서 그게 더 나를 슬프게 했다.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네? 아, 저 공과금 좀 내고 시장도 좀….”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저…은행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뭔가 상당히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듯한 기분을 느끼며 비닐봉지를 양 손에 바

리바리 든 채 들어가지도 못하고 허리에 손을 짚은 채 현관에 서있는 강세련 앞에서 주춤거렸다. 

아직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왜 저렇게 난리지? 

이게 소위 말하는 그 슬럼프 상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쨌든 할 일은 해야겠기에

 우울한 기분으로 집 근처의 하이퍼 마켓에서 마지못해 장을 보고 집에 도착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이 난리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어?”

그때 이층에서 막 계단을 내려 거실로 들어오던 작은 누나가 나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이쪽으로 뛰어왔다.

“보경씨 왔어요?”

“예에…”

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나를 반기는 작은 누나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첫날의 그 초미인은 어딜 갔는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이리저리 뒹굴어 구깃구깃해진 옷

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만은 십 년 전에 잃어버렸던 엄마라도 찾은 양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왠지 나의 출현에 좀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야…. 

하루종일 둘만 있어서 심심했나?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강세련이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나 배고파 죽을 뻔 했단 말야.”

어휴우…..그럼 그렇지. 

나한테 밥을 맡겨놓은 것도 아니면서 툭하면 밥 달라, 과일 깎아달라, 커피 타달라. 

내가 다방 레지도 아닌데 말야 앞치마 두르고 찻쟁반이나 들고 왔다갔다 하게 생겼어?

하지만 얼마 전 아쉬우면 자기가 직접 해 먹던지! 란 배짱으로 안해주고 버티다가 강세

련이 과도에 엄지 손가락 베고 발등에 뜨거운 물 엎지르고 식당 바닥에 커피병을 깨뜨리는

 걸 보고 나는 아무 말없이 요구하는 즉시 갖다 바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세시간내내 바닥에 엎어진 커피 알갱이 치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나으니까. 

아아….날이면 날마다 밥만 차리는 내 신세에 언제 볕이 들려는지….

“손 씻고 금방 준비할께요.”

나는 한숨을 쉬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장 본 걸 들고 식당으로 향했다. 들어오면서 슬쩍 

놈의 방 쪽을 곁눈질해봤지만 조용한 게 아마 오늘도 12시가 넘어야 들어올 생각인가 보다. 

“쳇. 일찍일찍 좀 다니면 누가 잡아먹나?”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성질나네. 

그래도 예전에는 가끔 일찍 들어오는 날도 있었는데 요즘은 툭하면 열 두시 아니면 새벽 두세시에 들어오고.

“도대체가 사람이 집에서 기다리는 줄 알면 전화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전화를!”

나는 사온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냉장고 앞에 주저앉아 있다가 눈앞에 놈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열린 냉장고 문에 대고 눈을 부라렸다.

“내가 여태껏 그 비싼 핸드폰 쓰는 걸 한 번 못봤어. 그건 뭐 아껴뒀다가 국 끓여 먹으려고 그러냐?”

하여튼 이 자식은 예절교육을 처음부터 다시 시켜야 돼. 

남들은 유치원에서 인생에 필요한 모든 걸 다 배웠다는데 이 자식은 도대체 유치원에서 뭘 배운 거야? 

내가 뭐 그렇게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냐. 전화번호 여덟개 누르는데 손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해? 

나는 앞치마를 찾아 두르고 식탁에 앉아 지난번 윤아한테 빌려온 요리책을 신경질적으로 뒤적이기 시작했다.  

뭐 놈한테 직접 짖어댈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그러다 쫓겨나면 곤란하니까.

“그나저나…오늘 저녁은 뭘로 하지?”

놈 못지않게 입맛이 까다로운 누나들을 둘이나 먹여 살리려니 정말 하루하루

 반찬걱정으로 머리가 아프다. 식은 거 안 먹지, 짠 거 안 먹지, 인스턴트 안 

먹지. 이런 걸 생각하면 진짜 윤아말대로 시집살이가 따로 없다니깐.  

“탕수육은 어제 했고….계란탕에….스테이크? 아냐, 아냐….”

턱을 괸 채 한숨을 쉬며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는

 문득 입구에서 심상치않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 왜요?” 

거기에 붙어있는 건 애처로운 표정의 누나 둘.

“밥 언제 줘? 배고파아.”  

“나도 좀 배고픈데.”

아아…..정말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들 심정을 알겠구나.

하루종일 집안에서 비디오다 잡지다 모노폴리 게임이다 온 거실을 어지르며 놀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할께요.”

요리책을 덮은 뒤 억지로 웃는 표정으로 말했더니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강세련이 눈을 반짝이며 한 마디 더 거들었다.

“난 지난번에 먹은 신선로가 좋더라. 그거 버섯많이 넣고, 음 또,”  

이보세요. 그게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 요리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재료 준비만도 두시간이 넘게 걸린다구요!

거기다 정작 먹이려고 했던 놈은 새벽 두 시에 들어와 밥도 안 먹고 다시 나가버리고….으으…그 생각하니까 또 스팀받네.

“아, 난 보경씨가 해준거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

내 얼굴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눈치빠른 작은 누나가 강세련의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거실로 질질 끌고 나갔다. 

<왜에~>

<우리 다 될 때까지 TV나 보고있자. 응?.>

<쳇. 난 식당에 있고 싶은데.>

<아, 글쎄 참으라니까.>

이쪽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속닥속닥 거리더니 둘은 곧 거실

의 TV앞에 길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CNN 뉴스를 틀어놓고 보기 시작했다. 쌍

둥이답게 카핏 위에 반쯤 드러누운 포즈도 똑같다.

“하여튼.”

가만히 보면 서른 살이 아니고 세 살짜리들 같다니까.

…..시끄러우니까 밥이나 먹여서 얼른 재워야지.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요리책을 보면서 일 이분 더 고민하다가 비교적 손이 덜 가는 김초

밥을 만들기로 결심하고는 냉장고를 뒤져 요리재료를 모조리 꺼낸 다음 분량을 세심하게 재서 쌀

을 씻기 시작했다. 재료가 신선하고 간이 약한 것은 역시 일식이 제격이다. 뭐 놈에게는 그다지 먹

여보지 않았지만 두 누나들은 김초밥이나 회덮밥 같은 걸 해주면 아무 말 없이 잘 먹는 편이다. 

쳇, 그러고 보면 내 신세도 처량하지.

집주인만으로도 모자라서 집주인의 누나들까지 먹여 살리는 신세라니.

첫날에는 금방이라도 돌아갈 것처럼 난리법석을 떨더니 이 주일이 지난 지금, 두 사

람은 언제 그랬냐는듯 자기집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있었다. 물론 오랜 외국생활

의 영향인지 세탁만큼은 자기 손으로 하지만 요리나 청소는 거의 놈과 같은 수준. 

그러니 어쩌겠어. 

하루종일 내가 이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봐서 밥 해먹이며 뒷바라지 하는 거지. 

나는 정말이지 낳지도 않은 딸이 둘이나 생긴 기분이라니깐.

그렇다고 여기가 내 집도 아닌데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놈은 도대체 무슨 공부를 그렇

게 엄청나게 하는지 집에만 들어 왔다하면 얼굴 볼 새도 없이 후닥닥 다시 나가버리니.

“식사하세요.”

생각을 하면서도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시각을 차린 다음 나는 아직도 거실에서 놀고있는 두 사

람을 불렀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식당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와아, 오늘 저녁은 초밥이

야?> 하면서 자리에 앉더니 보는 사람이 입맛을 다실 정도로 행복한 표정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요? ”

“응. 우리 하루종일 배고팠다구.”

강세련은 손가락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그렇게 말했다. 

“맞아. 금방 올 줄 알았는데 보경씨는 소식도 없고.”

“그래서 올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지, 뭐. 아 참. 나 물 좀 줘.”

“네, 네.”

나는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두 사람의 컵에 따라준 후 싱크대 앞에 기대서서 밥을 먹는데 열중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똑같이 스누피가 그려진 핑크색 박스 원피스를 입고 강아지 두 마리처럼 고개를 나란히 하고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왠지 흐뭇하군.

아마 엄마들이 이런 재미에 자식을 키우는게 아닐까 싶다. 다른 때는 시끄러워도 밥 먹을 때만은 이렇게 깜찍하니….

여기다 놈까지 한 세트로 끼워넣으면 더 좋을텐데… 

도대체 왜 올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접시를 반쯤 비운 작은 누나가 물을 마시다 생각난듯 나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보경씨는? 안 먹어요?”

“예에. 저는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왜? 맛있는데.”

“많이 드세요.”

나는 작은 누나에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어보인 후 아까 냉장실에 넣어두었던 고기와 계

란을 꺼내 조리대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빵가루를 찾아 싱크대를 뒤지고 있는데 그 사이 

밥을 다 먹고 식탁에서 일어서던 강세련이 궁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뭐하려구?”

“내일 먹을 돈가스 좀 만들려구요. 하루 전에 해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되거든요.”

“그거 나도 할래!”

“네?”

“나도 평소에 그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내 대답도 듣지않고 강세련은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작

은 누나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그 옆에 앉더니 소매를 걷으며 말했다.

“나는 뭐 할까?”

“두 분 다 안 하셔도 되는데….”

“아냐. 우리도 해볼래. 이런 맛있는 음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항상 궁금했었어.”

고집 센 거는 정말 둘 다 똑같다.

두어차례 난감한 표정으로 거절을 하다가 나는 하는 수 없이 강세

련에게는 밀가루 접시를, 작은 누나에게는 빵가루가 담긴 볼을 넘겨줬다.

“우선 제가 이렇게 고기에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뿌리면….”

내 말에 두 쌍의 눈동자가 내 손끝에서 왔다갔다 했다.

“밀가루를 묻힌 다음, 계란을 적시고….그 다음에는 빵가루를….”

“이렇게 해?”

“아니,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야 해요. 더 세게.”

“이렇게?”

“네. 아니, 너무 세게는 말고요. 너무 세게 하면 나중에 맛이

 없어요. 빵가루가 골고루 묻혀지도록 적당히 꾹꾹 눌러주세요.”

“아, 그렇구나.”

“나는? 이렇게 하면 돼?”

“네. 얇고 고르게 묻혀 주시면 되요. ” 

“야. 진짜 재밌다. 그치?”

그거 날마다 하면 재미 없을텐데….

나는 조리대 주위가 온통 밀가루와 빵가루로 범벅이 되는 광경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다 나중에 치워야지, 뭐. 하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건 오래두면 안 좋을텐데….차라리 이따 오면 다시 만들까?

놈의 몫으로 남겨둔 초밥을 바라보며 고민하다 나는 흥, 하고 뒤돌아섰다.

오늘 들어올 지 안 들어올 지 그걸 누가 알아. 꼭 기다리다 지쳐서 잠들면 오던데.

나는 입을 삐죽이며 식탁을 치우고 조리대 위에 올려져 있던 김발이며

 도마, 어질러진 반찬통들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누나

들은 조리대 위를 더 이상 어지를 수가 없을만큼 어지르며 너무 힘을 줘서 너덜

너덜해진 돈가스를 쟁반 위에 산처럼 올려놓고 있었다. 

ㅡ 모양 이상한 건 나중에 다 먹으라고 그래야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남은 접시를 마른 행주로 닦아 건조기 위

에 엎어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거실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때르르릉 ㅡ 때르르릉 ㅡ 

엇, 혹시!

그 전화벨 소리를 듣는 순간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에 나는 행주도 팽개치고 얼른 거실

로 달려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보다 거실 가까운 조리대 앞에 앉은

 강세련의 행동이 한 박자 더 빨랐다. 

“헬로우. 여기는 강성욱의 집입니다. 집주인은 지금 외출중, 아, 너니?” 

역시 말하는 걸로 봐서는 놈일 가능성이 100%.

그치만….

신경 안 써. 신경 안 써. 절대 신경 안 쓴다구!

그러나 이미 다 닦은 접시를 수십번도 더 행주로 문지르면서 나를 귀를 쫑긋한 채 거실쪽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응. 그런데 왜 전화했어? 뭐? 아 참. 내가 깜빡 잊어먹고 있었다. 어쩌니? 그렇게 중요한 거였어? 응. 그래? 알았어. 끊어.”

그러더니 뚝,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씨이….내가 거실에 나가있을 걸.

그런데 놈이 무슨 일로 집에 전화를 다 했지?

“무슨….전화예요?”

“응. 아까 성욱이가 너한테 전화었는데 내가 깜박 잊고 있었어.”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강세련은 조금 전 하던 일을 계속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태연히 대답한다.

“전화요? 왜요?”

왠지 불길한 예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더니….

“응. 오후에 중요한 세미나 들어가야 하는데 책을 안 가져왔대. 그래

서 너보고 도서관으로 좀 와달라고 했는데 내가 깜박 잊고 말을 안 해줬네?”

“그, 그게 언제쯤인데요?”

“글쎄….한 두 시간쯤 됐나?”

뜨아아아ㅡ 

“그걸 지금 얘기해주시면 어떡해요!”

“그러게. 성욱이 무지 화났나봐. 목소리가 음산하다. 얘.”

크, 큰일났다!

나는 창백한 얼굴로 앞치마를 벗고 놈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후닥닥 안으로 들어가다 다시 방향을 돌려 식당으로 뛰어들어갔다.

“무슨 책인데요!”

내 다급한 재촉에 얼굴에 밀가루를 묻히고 있던 강세련이 글쎄…하고 생각을 하

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맞은편의 작은 누나가 얼른 생각해봐! 하고 강세련을 재촉하자 

“….무슨 물리학 책이라고 그랬는데? 책상서랍에 있대. 영어 원서랬어. ” 라는 성의없는 대답을 해준다.

“영어 원서, 원서가… 물리학이라구? 그게, ….” 

나는 바람처럼 놈의 방으로 돌아와 책상서랍을 여기저기 열어보았다. 청소를 하

면서도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놈의 책상 서랍 속은 온통 제목도 읽기 힘든 어려

운 내용의 책들 로 가득해서 나는 뭐가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세번째

 서랍 속에서 유일하게 내가 아는 한자인 <리>자가 씌여있는 두꺼운 책을 발

견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춤이라도 출 것처럼 기뻐서 펄쩍 뛰었다.

“찾았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택시를 타고 가면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 책을 꺼내 소중하게 품에 안고 목도리를 손에 쥔 채 날듯이 현관으로 향했다.

“너 그렇게 갈 꺼야? 밖에 무지 추워.”

그때 식당 문턱에까지 밀가루를 날리며 나와있던 강세련이 나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지금 추운 게 문젭니까! 정말 늦어서 놈이 버럭 화라도 내면 어떡하냐구요!

“괜챦아요.”

“그치만 옷에 밀가루 묻었는데?”

그 말에 나는 끼이익, 하고 현관 앞에서 브레이크를 걸어 다시 방으로 뛰어갔다.

진작 좀 얘기 해주시지!  

나는 책을 침대에 던져놓은 채 그저께 새로 빨아놓은 조금 두꺼운 후드티를

 찾아 아무렇게나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다시 후다닥 방을 뒤쳐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어딘지는 알죠? 조심해요.”

“네, 네. 아 참! 책!”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나는 단번에 다시 방까지 뛰어들어가  책을 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빨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면서 나는 45에서 1로 변하는 숫자를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늦으면 안되는데….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냥 집에 있을 걸….하다못해 전화만이라도 받고 나갈 걸…..

정말 화났으면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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