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5>
그러나 착각은 자유랬다고 내가 도대체 무슨 날고 기는 재주가 있다고 당당하게 이 집을 박차고 나가겠는가.
그럴 능력이 있으면 벌써 예전에 놈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다가 끝장을 냈겠지.
그러니 결과적으로 뭐겠어.
놈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밥 차리라면 밥차리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지.
“어휴우우…..”
잘 다려지지 않는 셔츠깃을 반듯하게 다리기 위해 다리미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는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멀리 창 밖에 펼쳐진 푸른 강물과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맑은 겨울 하늘을 보니 정말 절로 한숨이 나
오는게……대체 내 인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처량한 신세로 전략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한때는 꿈도 많고 희망도
많았는데 어쩌다가 이런 98평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서 열흘 내내 단 한 번도 밖에 나가보질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서 청소다, 빨래다, 다림질이다 꽃다운 청춘을 허비해야 하느냐고.
“….이제 다섯장.”
만지는 것만으로도 사각사각 소리가 날 것 같은 놈의 값비싼 셔츠를 다리미대 위에 펼쳐 놓고 나는 수면부족으로 스
멀스멀 일기 시작하는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미간을 꾹꾹 눌렀다. 예전의 나는 정말이지 편두통이란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이 집에 들어오고부터는 걸핏하면 뒷골이 쑤시고 머리가 아프니 고된 노
동으로 인한 직업병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루종일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
하고 다람쥐 쳇바퀴돌 듯 표시도 안 나는 일의 연속이니 멀쩡한 40대 주부들이 어느날 갑자기 우울증에 걸려버리지.
티브이에 나와 그냥 콱 죽어버리고만 싶다는 전업주부들의 그 마음. 나 충분히 이해한다구.
“….아니 지가 도대체 패션모델이야, 연예인이야? 왜 맨날 공작새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옷은 갈아입어?”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라 나는 칙칙칙칙 네번이나 연달아 물뿌리개로 셔츠에 물을 뿜어댔다. 이 망할놈의
셔츠는 무슨 특수섬유로 만들었는지 한 번의 다림질로는 어림도 없어서 세번 네번 손목이 뻣뻣하게 굳어질 때까지
힘을 주어 다려야 겨우 다림질한 티가 난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오래 다리면 금방 희미하게 눌은 자국이 생기기 때문
에 적당히 손목에 힘을 주면서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리미질 하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거 하나 하는데도 이렇게 까다로우니 다른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나마 놈이 반나절 입고나면 우아하게 휙 벗
어 거실바닥이든 욕실 바닥이든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질 운명이었지만 어찌됐든 칼날처럼 다림질은 해놓아야 한다.
그것뿐이면 내가 말도 안해. 날마다 옷 갈아입는 거? 그거 이해한다 이말이야.
그런데 왜 한 번 걸쳤던 옷은 세탁하기 전에는 다시는 안 입어?
지가 무슨 사우디 아라비아 왕자라도 돼?
“아무리 왕자래도 이보단 덜하겠다!”
안 그래도 내가 젊은 나이에 혈압이 높아서 걱정인데 이러다가 고혈압으로 요절하면 다 너 때문인줄이나 알아. 강성욱.
“하긴. 그래봤자 네가 뭐 눈이나 깜짝하겠냐마는.”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 열 장을 옷걸이에 차례로 걸며 나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정말이다. 내가 거실 창가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거꾸로 매달려 있어도 놈은 아무소리 하지 않고 겉옷을 벗어 소
파에 던져 놓으며 <저녁은 안 먹어.> 따위의 말 한마디 던지고 홱 지 방으로 들어가 버릴 게 틀림없다.
그에게 있어 나는 아마 청소하는 기계나 밥 차리는 기계쯤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니까.
생각해보면 놈은 아침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하루에 그 얼굴을 보는 시간은 기껏 다 합쳐도 일이십분 정
도였지만 이상하게도 놈과 부딪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심한 스트레스였다. 자신외에 다른 사람은 모두 하챦은 존
재라는듯 업신여기는 그 오만한 태도하며 필요한 말 이외에는 절대 하지 않는 냉정한 성격, 게다가 무엇보다도 맘에
안 드는 것은 놈은 나를 무슨 소파나 식탁같은 집안에 놓여져 있는 가구처럼 바라본단 말이다!
그래도 내 딴에는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한다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설레발을 치며 커피를 끓이고 베이컨을 굽고
과일 샐러드를 만들어 대령했더니 <이게 토스트야, 책껍데기야?> 그딴 소리나 하고있고, 졸려죽겠는데도 눈을 부
릅뜨고 기다렸다가 새벽 한 시건 두 시건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만 들리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다녀 오셨어요
?> 하고 인사하면 무슨 덜 진화한 외계 생물체 바라보듯 무시하며 지 방으로 휙 들어가버리니, 내가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토막 버금가는 고운 심성의 소유자라고 해도 버틸 수가 있겠냐!
<성질 드러운 황보경>도 다 옛말이다. 이젠.
“우우…..스트레스 쌓여어….”
나는 최고급 체리나무로 만들어진 놈의 방 붙박이장에 머리를 박고 신음하다 홱 돌아섰다.
이대로는 정말 안되겠다. 하다못해 시장이라도 보러 가야지 여기서 더 참다간 그야말로 쾅! 하고 폭발
해 <너죽고 나죽자> 란 심정으로 밤늦게 돌아오는 놈을 현관에서 습격해 버릴 것만 같아 나는 다림
질이 끝나면 일광욕실 청소를 하려고 했던 아침의 계획을 대폭 수정하고 겉옷을 가지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왜 입고 나갈만한 옷이 하나도 없지?
설마하는 마음에 옷장 안을 살펴보았지만 어제 걷어놓았다가 시간이 없어 그대로 옷장안에
던져 두었던 청바지를 제외하면 그나마 텅텅 비어 문자 그대로 전멸이었다.
“누구는 방안 가득 옷을 채워놓고 사는데 말야.”
급하게 도망을 나오느라 그랬다고 변명처럼 생각해보지만 아무래도 추운 겨울날 입을 겉옷
한 벌 없는 내 처지가 한심스러워 나는 이 집에 처음 온 날 두르고 왔던 목도리를 구석에서
꺼내 입고있던 후드 티셔츠 위에 아무렇게나 칭칭 둘러감았다.
뭐 어차피 쇼핑몰까지는 삼십분밖에 걸리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그러고 보면 유년시절의 혹독한 체험이 강인하게(?)성장하는데 도움이 됐는지도 모르겠
다.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입고 있던 앞치마 주머니를 뒤져 오늘 아침 식탁에 앉아 적
어두었던 메모지를 찾았다. 거기에는 커다랗고 둥근 글씨로 다섯가지 품목이 숫자와 함께 개발
새발 적혀 있었다.
우유(1200) 사과(3000) 베이컨(3000) 섬유 유연제(3200) 식빵(1800)
미리 이렇게 적어놓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충동구매를 하게 돼버린다. 일견 소란스럽고 앞뒤 가리지
않는 성격인 것 같지만 나에게도 이렇게 꼼꼼한 면이 있는 것이다.
‘흠, 이 정도면 되겠지?’
다섯가지 품목외에 더 추가해야 할 건 없는지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 나는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에 메모
지를 주머니에 넣고 테이블 위의 지갑에서 지폐를 몇장 빼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안에는 전날 아침
놈이 생활비 명목으로 주고 간 현금 이백여만원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놈은 도대체가 화폐개념을 들
어본 적도 없는 놈인지 <저...생필품이 좀 필요한데요>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래? 하더니 지갑
안에서 시퍼런 만원짜리 지폐 수십장을 꺼내 식탁 위에 던져 놓았다.
대충 눈짐작으로만 세어봐도 백만원이 넘는 것 같길래 경악한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놈은 뭔가 상
당히 심각한 오해를 했는지 <모자라?> 라고 물으면서 수표 몇장을 더 꺼내려고 들었다. 거기서 내가 기겁
을 하며 말렸기에 망정이지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천만원이 나왔을지 이천만원이 나왔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지막지한 놈 같으니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는 현관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오토락이 등 뒤에서 철컥 잠기는 소리에 내가 과연
비밀번호를 잘 알고 있나….하는 의심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고 문이 열리자마
자 똑바른 자세로 서서 인사를 날리는 경비 아저씨 때문에 그런 의심은 곧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어디 나가십니까?”
첫날과 마찬가지로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
나는 엉거주춤 어쩔 줄 몰라하며 마주선 채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말했다.
“예….요 앞에 잠깐….”
“네에. 그럼 잘 다녀오십시요.”
역시나 깍듯한 인사.
“에에…”
어색한 마음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로비에서 사사삭 뒷걸음쳐 현관으로 빠져나왔다. 역시 이런
대접에는 익숙치가 않다. 물론 그것이 <황보경> 이 아닌 <45층 타워 팰리스에 사는 강성욱의 손님
(사실은 손님도 아니고 가정부지만….ㅡㅡ;;)>에 대한 대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웃! 추워 ㅡ”
밖으로 나오자마자 살을 에일 것처럼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렸다.
역시…놈의 방에서 코트라도 하나 훔쳐입고 왔어야 했나?
바람을 막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드넓은 아파트 단지를 종종걸음으로 뛰며 나는 백화점으로 가
는 버스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