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14>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오세나의 스페셜 쿠킹 시간입니다. 요즘 생선 많이들 좋아하시죠?
이번 시간에는 저번 시간의 광어 뫼니에르에 이어 페이퍼 소스를 얹은 도미 버터 구이를 만들어 보
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재료는 싱싱한 도미와…..>
이상해….
나는 TV 화면에 자막으로 올라온 음식의 재료와 분량을 노트에 적으며 등뒤에
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그치만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아까부터 목덜미가 따끔거리는게…
“우선 도미를 손질할 때에는….”
이상해…..
“석쇠는 항상 신경써서 손질을 해 주어야 하는데요….”
이상하다아..….
“여기서 불을 잘 조절하는 것이…..”
도대체 왜 안 나가고 저러고 있는 거얏!
결국 나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홱 몸을 비틀어 힐끔 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고있
는 놈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정장차림이 아닌 낡고 빛바랜 진에 늘
씬한 상체에 착 달라붙은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놈은 거대한 한 마리 치타처럼 햇빛이
비치는 거실 바닥에 유유히 앉아 한가롭게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마치
CF속의 한 장면처럼 너무나 평화로와 보이는 그 모습이 <외출할 마음 따위는 전혀 없
다> 라는 놈의 생각을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볼펜 끝을 자근자근 씹으
며 다시 TV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있는데도 한 팔
로 바닥을 짚고 옆으로 길게 다리를 뻗은 채 앉아있는 놈에게서는 끊임없이 시트러스 계
열의 고급샴푸 향기가 흘러나와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볼펜 끝을 씹으며 있는대로 놈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같은 거실에 있다 해도 거실이 너무 넓어 끝과 끝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저렇
게 떡 버티고 앉아 있으니 답답해서 숨쉬는 것도 불편하쟎아! 다른 때 같으면 새벽같이 일
어나서 휘리릭 챙겨입고 나가버리는 놈이 왜 아침 열 시가 넘도록 저러고 있는 거냐구!
나는 마음이 너무나 불편해 초조하게 엎드렸다 바로 앉았다 옆으로 앉았다 하면서 계속
놈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놈은 그런 내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펼쳐진 신문에 고개를
숙인 채 이따금씩 페이지를 넘기는 것 외에는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거냐….
생각같아서야 당장 이층으로 올라가 버리고 싶지만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에만 하는 이
프로는 꼭 봐야하겠고, 내 방에는 TV가 없으니, 이 무슨 얼어죽을 상황이냔 말야.
이 프로가 끝나면 거실 청소도 해야 하고….일광욕실에 빨래도 널어야 하는데 저렇게 버티
고 앉아있으면 나는 어떡하라구!
……하는 수 없다. 장이라도 보러 가야지.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다 마지못해 그런 결론을 내리고는 쓰고있던 노트를 덮고 슬슬슬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TV를 껐다. 전원이 꺼지며 시끄럽던 소음이 뚝 그치는 순간, 움찔해서
놈을 보았지만 놈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앉아 고개조차 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신경이
무쇠로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잘났어. 정말.
나는 입을 삐죽이며 놈을 한 번 흘겨본 후 노트를 옆구리에 끼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뭐 놈에
게 무시당하는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은 특히 더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아 기
분이 나빴다. 이럴 거면 차라리 놈이 집밖에 나가있는게 마음이 편하겠다. 요즘은 집안일에도
어느 정도 이력이 붙고 그래서 이 집에 있는게 슬슬 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저렇게 나의 섬세한
신경줄을 괴롭히니 (누가 섬세하냐…ㅡㅡ;;) 내가 아무리 무던한 성격이라 해도 견딜 수가
있겠냐구.
….그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앞으로 열흘만 참자.
옷장에서 가지고 있던 티셔츠 두 장 중 더 두꺼운 것을 꺼내입다 말고 나는 침대 맞은편에 걸린
12월 달력에 20여개의 가위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바라보며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성도 그 자식
이 나를 찾는 걸 포기했는지 진이형도 아무 말이 없고 다행히 몰래 들어뒀던 적금 만기일도
이달 말이니 돈을 타면 작은 단칸방이라도 구해서 이 집을 나가는 거다. 형이 이달 말에 계약이 끝
나는 싼 건물을 알아두었다고 했으니 열흘만 꾹 참으면 드디어 놈에게서 해방!
…..우우우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오다 계단 중간에서 우뚝 멈춰섰다. 그리고는 눈을 깜박이며
계단 아래를 내려다 보다 주먹으로 눈가를 슥슥 비볐다.
….시력이 나빠졌나? 왜 갑자기 헛것이 보이지?
그런데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계단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게 놈이라는 걸 확인한 순
간 나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실에 앉아 신문을 읽고있던 놈이 왜 계단 아래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지?
“나가는 거야?”
“예..….저기…시장을 좀 봐야할 것 같아서….”
알 수 없는 그 박력에 기가 죽어 묻지도 않은 말까지 대답하자 놈은 그래? 하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거실로 가 커피 테이블 위의 차키를 집어 들었다.
“나가자. 가는 길에 데려다줄께.”
잉?
“안 가?”
“아니, 지, 지금 가요.”
멍청히 있다가는 나를 두고 그냥 문을 잠글 것 같은 분위기길래 나는 이것 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황급히 계단을 뛰어내려가 놈의 뒤를 따라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놈은 항상 나를 다급하게 만
들거나 화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 후 일분도 되지 않아 엘리베이터에 놈과 단둘이 타게 되자마자
나는 금방 조금 전의 행동이 후회스러워졌다. 사방이 밀폐된 공간에 놈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담스러워서였다. 게다가 바로 옆에 선 놈에게서는 샴푸향기와 햇볕에 말린 듯한 옷냄새가 섞인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나와 상대를 의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놈이 눈치채지 못
하도록 움찔움찔 뒤로 물러나 슬그머니 구석에 기대섰다.
‘휴우…..’
그러자 조금 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져 나는 방금 전 거실에서처럼 안 보는 척 하면서 슬쩍 눈동자를
굴려 층수를 표시하는 불빛에 고정되어 있는 놈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앓은 탓인지 다소 수척해지긴 했지만 다문 입매에서부터 날카로운 눈빛까지 여전히 오만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잘생기긴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아마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이었을거야.
입을 삐죽거리며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디리링 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눈앞에 드넓은 지하 주차장이 펼쳐졌다. 바로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는 놈의 차를 보니 도대체 무슨 의도
로 나를 태워주겠다고 하는지 새삼 놈의 생각이 두려워져 나는 입구에 서서 주춤거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혼자서 가겠다고 말해볼까?
아니면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할까?
“타.”
그러나 내가 이 궁리 저 궁리 하는 사이에 놈은 벌써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더니 나를 재촉해 조수석에
몰아넣고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부웅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로 갈꺼야?”
“….이, 이마트요.”
내 말에 놈은 아무말없이 주차장을 빠져나와 시내 중심가로 차를 몰았다. 지난번에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몰
랐지만 집안과 마찬가지로 호화스러운 내부가 그렇쟎아도 불편한데 거기다 말 한 마디없이 목적지까지 가려니 이건 정말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냥 셔틀버스 타고 간다고 할 걸.
후회해도 이미 소용없었다. 별 수 없이 나는 가죽시트에 몸을 깊이 묻은 채 스쳐 지나는 창밖 풍경만 죽어
라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괴로운 10여분을 보내고 근처의 할인점에 도착하자 나는 새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해서…
“네. 네. 감사합니다. 저쪽으로 주차시켜 주십시오.”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문 손잡이를 움켜쥔 순간 놈이 갑자기 커브를 틀더니 주차장으로 올라가는게 아닌가!
그러더니 안내요원의 지시대로 정확하게 한쪽 구석에 주차를 시키고 시동을 껐다.
“내려.”
야! 니, 니가 왜 여기다 차를 세우는 거얏!
“저기…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도…”
뒷덜미의 솜털이 일렬로 서는듯한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최대한 용기를 그러모아 그렇게 말했지만…
“어디로 갈꺼야. 1층?”
캭! 그렇게 사람 말을 무시하지 말란 말야!
그래봤자 매장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이미 올라선 놈에게는 하나마나한 말이었다.
도대체 여기까지 따라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저렇게 성큼성큼 바람을 가르며 식품 매장으로 들어서는거얏!
게다가 분명히 <나가는 길에 데려다줄께.> 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저, 약속은?”
“안가도 돼.”
마지막으로 놈을 저지하려는 미약한 시도를 해보았으나…..결과는 비참하게도 실패로 끝나고
.결국 나는 매장 한쪽에 비치된 카트를 밀며 울며 겨자먹기로 놈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뭘 살 건데?”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곳에는 생전 처음 와보는 것처럼 놈은 전에 없는 흥미를 보이며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할인점이 다 그렇듯 엄청나게 쌓인 식료품들과 사람들로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놈은 전
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얼굴을 보자 이게 정말 슈퍼마켓에 처음 오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장보는 내내 놈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보아하니 놈이 나
를 위해 파 한뿌리 들어줄 것 같지도 않은데.
뭐, 지치면 알아서 지 갈 길 가겠지.
나는 알아서 신경끄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오기 전 적어두었던 메모지를 꺼내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카트 안으로 던져넣기 시작했다. 뭐 어쩌다 놈이 여기까지 따라올 마음을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놈의
행동에 일일이 신경쓰다 보면 노이로제에 걸리기 십상이니 아예 처음부터 무시해버리는게 상책이다.
밀가루…당근……홍차….버터…에…또…
하나하나 확인하며 차례로 던져넣다보니 어느새 가장 안쪽의 유제품 코너였다.
이제 갔나?
주위가 조용하길래 고개를 돌려 놈을 찾았지만 놈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키가 커서 단번에 눈에 띌 텐데 아
이를 데리고 온 부부들만 가득할 뿐 근처에 없는 걸 보니 아마 내 짐작대로 싫증이 나 먼저 간 모양이었다.
“하여튼 지 멋대로라니까.”
아니 맘대로 따라올 때는 언제고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리는 거야?
왜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놈이 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이유없이 화가 치밀어 올라 들고있던
우유팩을 카트 안에 난폭하게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곧장 뒤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사과가 가득 쌓여있는 판매대로 향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사나운 기세로 비닐봉투를 찍 뜯어 사과를 넣기 시작하자 옆에 서있
던 젊은 여자가 움찔 하며 비켜섰지만, 지금 그런게 문제야?
두고봐! 내가 이 집을 나가기 전에 기필코 버릇을 꼭 고쳐주고 말 테니까!
분노한 나머지 나는 평소보다 두배나 더 많은 양을 샀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
고 사과가 담긴 비닐봉지를 저울 위에 내던지듯 팽개쳤다.
“4250원입니다.”
헉. 너무 많이 샀나?
조금 전의 대범한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아르바이트 생이 스티커를 붙이며 한 말
에 나는 움찔 하고 놀라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4250원이면 평소보다 배는 많은 양이쟎아?
어쩌지…조금 꺼내달라고 할까….
나는 다시 평소의 <근검절약하는 가정부>의 자세로 돌아와 눈치를 보며 사과를 반쯤
덜어놓을까 어쩔까…하고 잠시 고민했다.
뭐 굳이 따진다면 내 돈으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반을 덜어놓는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사과봉지를 내려놓으려는데 문득 코
너 안쪽에 과일 바구니와 함께 가지런히 쌓인 멜론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멈칫 했다. 멜론은 예전부터 나와 진이형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었다. 하지만 워낙 비싸서 먹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공짜로 들어온다면 몰라도 쓸데없이 비
싸기만한 그런 과일을 돈을 주고 사먹는다는 건 거의 범죄에 가까운 짓이라는게 나와 진이
형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했다. 그치만 오늘따라 연녹색의 껍질이 무척이나 마음을 끄는게…
하나 살까…. ?
그치만 하나에 만팔천원은 너무 비싼데….그 돈이면 사과가 서른개….
나는 평소의 단순한 성격답게 방금전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팔짱을 낀 채 한참을 고
민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손 하나가 쑥 튀어나오더니 멜론을 집어 휙 하
고 카트 안으로 던져 넣는게 아닌가!
“무, 무슨,!”
깜짝 놀라 홱 돌아보자 등 뒤에 서있는 것은 뜻밖에도 청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넣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이었다.
“그거 하나 사는데 뭘 그렇게 오래 생각해?”
잘났다, 정말.
나는 너랑 달리 소시민이라서 이까짓 과일 하나 사는데도 수백번도 더 생각한다! 왜!
집에 간 줄 알았더니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거얏!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있는데 갑자기 놈이 손을 뻗어 쌓여있는 멜론
중 두 개를 집어 더 던져 넣었다.
세, 세개씩이나!
하나도 살까 말까 고민 중인데 너 정말 이게 무슨 짓이야!
“가자.”
그러나 남이사 경악하던 말든 언제나 제멋대로인 놈은 나를 뒤로 한 채 카트를 밀며 앞장섰다
. 그러더니 눈에 띄는 건 닥치는 대로 집어 카트 안으로 던져넣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는 비싸서
손도 안 대는 키위며, 파인애플, 수입와인, 게다가 쓸데없는 콘플레이크까지!
“저, 저기요, 저기!”
“왜?”
다급한 내 말에 놈이 가구 광택제를 한 손에 든 채 나를 내려다보며 반문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그딴 건 다 필요없어!
가구는 귤껍질 삶은 물로 닦으면 반들반들 잘 닦여진단 말야! 그러니까 얼른 내려놔!
라고 빽 소리치고 싶었지만….나는 왜 놈의 얼굴만 보면 말문이 막히는 거냐구.
결국 나는 아니에요, 라고 모깃소리만 하게 대답하고는 그 커다란 카트안
이 별의별 물건으로 가득차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니 돈으로 사겠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냐. 사고 싶은대로 다 사라. 다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