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34>
그날은 내가 명규형네 가게에 취직한 지 꼭 4주째 되는 3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원래 내가 쉬는 날은 화요일이지만 두 사람이 갓 태어난 아기를 데리고 소연
씨 친정이 있는 태백에 갔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휴일이 하루 생긴 셈이었다.
느지막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뭘 할까 고민하다 나는 창틀 청소를 하기로 마음
먹고 방 안에 있는 작은 창문 네 개를 모두 떼어냈다.
그리고는 주방 한구석에 붙어있는 세면대에서 세제를 물에 풀고 있는데 별안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보경이니?>
“아아, 형….”
예상했던 일이지만 왠지 온몸의 맥이 풀려 나는 세제 거품을 손에 잔뜩 묻힌 채 방문 턱에 주저앉아 버렸다.
<밥 먹었어?>
“…으응, 지금이 몇 신데. 벌써 먹었지. 그런데 나 쉬는 날인거 어떻게 알았어?”
<가게에 전화했더니 아무도 안 받쟎아. 그래서 전화해본 거야.>
“…그랬구나…”
<너 오후에 뭐하니?>
“그냥…할 일 별로 없는데, 왜?”
<이따가 가게에 좀 오라구. 음…한 네 시쯤. 괜챦지?>
“응…그래, 알았어. 이따 갈게.”
무슨 일이지….
전화를 끊으며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무슨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형이 나한테 오라고 전화를 하는 일은 무지 드문데….
물론 내가 쓸쓸하거나 외로울 때 수시로 찾아가는 이유도 있지만.
할 얘기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창틀 청소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궁금해져서 나는 형이
말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형의 가게로 찾아갔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 <개점전> 표지가 걸려있는 문을 조심스레 밀고
들어가니 형은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심각한 얼굴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진이형, 나 왔어.”
“아, 왔어? 거기 앉아라.”
이름을 부르자 생각에 잠겨있던 형은 좀 놀란듯 했지만 이내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주스 마실래?”
“아냐. 됐어. 오기 전에 마시고 왔어. 근데….무슨 일이야?”
내 말에 진이형은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보경아.”
“응?”
“너 혹시…요즘 성도소식 들은 거 있어?”
형이 갑자기 꺼낸 말에 나는 뻣뻣하게 자세를 굳히며 긴장했다.
그 자식 이름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데 왜 또 다시…!
“왜? 그 자식이 또 형 찾아왔어?”
내 불안한 얼굴에 진이형은 아냐, 아냐, 하고 손을 내젓더니 말했다.
“엊그제 볼보에 있는 우진이한테 우연히 들었는데 지난번 그 일로 아주 구속이 된 것 같
더라구. 성욱이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아예 형을 살게 될 것 같다구 그러더라.”
“으응….그랬구나….”
형이 지나가듯 말한 성욱의 이름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나는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진이형은 지난번 성도가 나 있는 곳을 알게된 게 자기 가게앞에서 며칠을 숨어서 뒤
를 밟았기 때문이라며 미안해했지만 그건 어차피 알려질 일이었기 때문에 형에게 그 이
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려질 사실이 조금 더 빨리 알려진 것 뿐이었다.
다만…아쉬운 것은….
도망치듯 그렇게 그 집을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야?”
“응.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 자식이 들어가 있어야 네가 마음편히 지낼 거 아냐.”
“...그거 말고….다른 소식은….없어?”
내 말에 진이형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미안하다, 하면서 내 어깨를 두들겼다.
“아냐, 형. 나 그냥 물어본 거야. 윤아는? 오늘 안 불렀어?”
“응, 전화했는데 승화랑 같이 친구들 모임에 간다길래.”
“그렇구나.”
“저녁 먹고 갈래? 오늘 좀 일찍 끝내고 애들 데리고 저기 정류장 앞에 새로 생긴 갈비집 가서 고기 좀 먹일 생각인데.”
“아냐, 형. 나 원래 고기같은 거 안 좋아하쟎아….그리고 집안도 막 어질러 놓고 나와서 들어가봐야 해.”
내 말에 진이형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그래, 그럼 좋을대로 해. 하고 대답했다.
아무래도 성도 얘기를 꺼내서 내가 우울해진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전화로 할 걸 괜히 오라고 그랬네. 그럼 얼른 들어가라. 가서 푹 쉬어.”
“응, 알았어. 형. 나오지 마. 내가 전화할께.”
“그래.”
나는 진이형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타박타박 거리로 나오자 아직 해가 질 시간은 아닌데도 공기가 서늘했다.
집에 가야지….
얇은 봄코트에 얼굴을 파묻다시피하고 나는 천천히 번화가를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려면 이 위로 올라가서 육교를 지나 한참을 더 걸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그 생각을 하자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십분쯤 걷다보니 저 앞에 육교와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이제 저 육교만 건너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문득
지금 막 정차했다가 떠나려는 버스의 번호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놈의 집 쪽으로 가는 버스…!!!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것 뿐인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다리가 움직였다.
“아저씨 잠깐만요!!!”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막 떠나려는 버스에 뛰어올라 헉헉 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나를 이상한듯 바라보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무 자리나 눈에 띄는대로 창가에 털썩 몸을 던지다시피 한 채 나는 점
차 창 밖으로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들을 굶주린듯 바라보았다.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그 집에 가보고 싶어.
“아아…..”
막상 집 앞에 오기는 왔지만….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혹시나 해서 오기 전에 공중전화로 집이 비어 있는지 확인도 해봤고 전용 주차장
에 가서 놈의 차가 빠져나갔다는 사실도 확인했지만 혹시라도, 만의 하나라도 놈과 마주칠
가능성을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이 창백해져 나는 한참을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사실은 정말 놈과 마주치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우연이라도 놈의 얼굴이 보고싶은 건지 나조차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건물 기둥 뒤에 숨어있다가 이러다간 아무 것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 나는 심호흡을 하며 억지로 용기를 냈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놈은 분명히 학교에 갔을 거야. 전화해도 아무도 안 받았쟎아.
“한번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안내 데스크를 노려보았다.
다행히 그 붙임성 좋은 경비 아저씨는 커피라도 마시러 갔는지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나는 번개처럼 유리문을 벌컥 밀고 들어가 두 눈을 질
끈 감고 두다다다 엘리베이터까지 전속력으로 줄달음쳤다.
쿵 ㅡ
“아얏!”
너무 전력질주를 한 나머지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간다는게 잘못해서 그만 그
옆의 대리석 벽에 머리를 부딪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우우…
그러나 아픈 것도 잠시, 나는 오직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일념
으로 이마를 두손으로 감싸쥐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45층 버튼을 눌렀다.
….설마 집에 있진 않겠지?
엘리베이터 불빛이 순식간에 바뀌는 동안 떠오른 별의별 불안한 상상에 디리링 하고 엘리
베이터 문이 열리고 불빛 가득한 복도로 나온 후에도 나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나온 후로 많이 변했을까?
그 사이에 비밀번호를 바꿨으면 어쩌지?
두 손을 맞잡은 채 초조하게 붉은 카핏 위를 서성대다 나는 육중한 검정색 문 앞으로 다가
가 문고리 위의 작은 버튼 아홉개 중 내가 기억하고 있는 숫자 여덟자리를 망설이며 하나하나 눌렀다.
철컹 ㅡ
그러자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오토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여, 열렸다!
그 순간 너무 기뻐 펄쩍 뛰어오르고 싶었지만 나는 간신히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
집 안은 내가 나올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내가 매일매일 깨끗이 닦던 마룻바닥과 이따금씩 성욱이 길게 누워 신문을 읽던 창가의 스웨덴제 소파, 집을 나오기 전날 테라스에 널어놓은 수건까지 그대로였다.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거실과 식당 사이의 유리 파티션이 없어져 휑한 느낌을 준다는 것뿐.
거실에 산산조각 나 있던 깨진 유리며 크리스탈 장식품의 파편은 흔적조차 없이 치워져 있었다. 잘 살펴보니 피묻은 호피무늬 양탄자도 보이지 않았다.
“성욱이가…치운 건가….”
나는 거실에 서서 조금 쓸쓸하게 중얼거렸다가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어쩐지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듯한 기이한 느낌.
쭈볏쭈볏 손을 내밀어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두달 전 내가 만들어 놓았던 밑반찬이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칸칸마다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뭘 먹고 산 거야?”
반쯤 울음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정리를 하고싶어 저절로 뻗어나가려는 손을 코트 주머니에 꼭 찔러넣은 채 이번에는 복도 안쪽의 침실로 향했다.
놈의 방은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였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는 목욕 가운, 방바닥에 수북히 던져진 스웨터와 셔츠, 테이블 아래 휴지처럼 떨어져 있는 시계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처음 이 방에 들어왔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 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가 발치에 떨어져있는 셔츠 중 하나를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손 끝에 닿는 차갑고 사각거리는 그 감촉에 갑자기 참을 수 없이 놈이 보고 싶어졌다.
견딜 수 없이 놈이 보고 싶어졌다.
한 번만이야.
딱 한 번만.
얼굴만 보고 바로 돌아오는 거야. 잠깐이면 돼.
오르막길을 초조하게 뛰다시피 걸어올라가며 나는 주머니 안에서 차가운 손을 쥐었다 폈다 하
기를 반복했다. 멀리 우뚝 서있는 도서관 건물을 본 것뿐인데도 성욱이가 그 안에 있을 거라는 생각
만으로도 주제할 수 없이 심장이 떨렸다.
난, 난 정말 어쩔 수 없나 봐.
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이 천 개는 되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계단을 올라 찾아간 지난번 그 도서실에서 나는 제일 먼저 지난번 놈이 앉아있던 그 자리를 찾아 보았다.
하지만 창가의 그 자리는 텅 비어있고 흘겨쓴 메모 한 장만이 책상 위에 남아 있었다.
<유민서. 열람실에 있을 테니까 논문 정리 끝나면 텍스트는 내 책상 위에 놓고 가.>
익숙하고도 그리운 글씨체.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놈이 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열람실, 열람실에 있다구…?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열람실을 찾아 도서관 안을 헤매었다.
삼십분이나 헤매인 끝에 6층 구석에 있는 열람실을 발견하고 그 문을 밀고 들어가
는데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아, 저기…!
안 본 사이에 놈은 조금 더 마른 것 같았다. 두달새 조금 길어진 머리가 셔
츠깃에 닿아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턱선이 조금 더욱 뚜렷해 보였다.
놈의 눈에 뜨이지 않는 책장 뒤에 숨어서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책을 읽고 있는 놈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흑, 놓친 고기가 더 커보인다더니…
불공평하쟎아.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꿈 속에서도 네가 나타나는데.
너는 나 없이도 이렇게 멋지고 근사한 모습이라니.
“너무해….”
놈을 본 것만으로도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 위해 나는 옷소매로 눈가를 슥
슥 문질렀다. 참으려고 했지만 너무 슬퍼서 코도 몇 번이나 작게 훌쩍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고 가야지.
이번에 보면….이제 우연히 만나지 않은 이상 죽을 때까지 영원히 못 만나는 거야.
죽을 때까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욱씬욱씬 아파왔지만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마지막으로
놈의 얼굴을 가슴 깊이 새겨놓을 결심으로 책장 사이로 눈물젖은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놈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 어디 갔지?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책장 사이로 고개를 길게 뺀 채 아까까지 놈이 앉아있던 자리 주위를 마구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놈은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놈이 읽다만 책만 펼쳐져 있었다.
…벌써 가버린 거야?
“조금만 더 있지…”
그 새를 못 참아서 그냥 가버리냐….
내가 서럽게 훌쩍거리며 돌아섰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 하고 붙잡았다.
헉 ㅡㅡㅡ!!!
심장이 뚝 소리내어 떨어질 것 같은 충격에 깜짝 놀라 주저앉아 뒤돌아보니
그렇게나 찾아헤매던 놈이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은 채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너 왜 기분 나쁘게 사람을 훔쳐보고 그래?”
흑,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인상쓰는 저 모습도 너무나 멋지구나.
“아뇨, 제가 훔쳐본 게 아니구요….”
“안되겠어. 너 이리 와!”
뭐라고 변명할 새도 없이 나는 놈에게 손목을 붙잡혀 도서관 뒤의 소나무 숲으로 질질 끌려갔다.
“너 왜 왔어?"
난데없는 대결모드로 바람부는 소나무 숲 속에 나를 세워놓고 놈은 처음의 그 살벌한 인상을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저기…그게요….”
그 얼굴이 얼마나 차가와 보였는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하지만 보고 싶어서 왔다….라고는 죽어도 말할 수 없어.
“저…”
몇 분동안이나 내가 입만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놈은 하, 하고 짧은 한숨을 쉬더니 뭔가를 꺼내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받아.”
익숙한 명령조에 얼떨결에 손을 내밀어 받고 보니….
“그거 받으러 온 모양인데 안 그래도 진이형한테 줄 생각이었어. 액수가
너무 적으면 나중에라도 다시 얘기해. 더 줄 테니까. 됐지?”
뭐라는 거야 지금…?
너…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멍한 눈으로 놈의 말을 듣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손 안에 쥐고 있는 것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 손 안에 있는 것은….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실한 수표 수십장이었다.
“이걸 왜….”
놈이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손 안에 쥔 것이 돈이고 놈이 내가 돈을 받으러 왔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
달은 순간 나는 충격으로 굳어진 얼굴을 들어 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왜. 액수가 너무 적어? 그럼 이 자리에서 얘기해.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아니….왜…..이런 걸 나한테….”
“너 그거 필요해서 나 찾아온 거쟎아. 아니야?”
“아니에요…나 이런 거 때문에 온 게…”
“아니야? 그럼 뭣 때문이야? 새삼스럽게 니가 이제와서 뭣 때문에 나를 찾아와?”
그렇게 말하는 놈은 너무나 낯설어 보였다.
나를 보는 눈이 너무나 차가워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돈 같은 거 필요없어요….이런 거…”
“그래? 그래도 받아둬. 그거라도 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니까. 그리고 너 앞으로 두 번 다시 나 찾아오지 마. 알았어?”
뭐라구?
너 지금 뭐라구 그러는 거야? 그거 받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구?
내가 정말 돈 때문에 너를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정말 그래?
“필요없어! 이런 거 필요없다고 했쟎아! 돈이면 단 줄 알아?! 이 나쁜 놈아!”
나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면서 놈의 얼굴을 향해 손에 들고있던 수표 뭉치를 내던졌다.
사람을 정말 뭘로 보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린 종이들은 놈의 어깨에 맞고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놈은 그 수표조각에 얼굴이라도 맞은 것처럼 무서운 기세로 소리쳤다.
“니가 왜 화를 내!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흑…흐윽…”
참다못한 내가 울어 버렸지만 놈은 내가 울던말던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게 소리쳤다.
“너 내가 찾아갔을 때 어떻게 했어? 얼굴도 보기 싫다며 가라고 그랬쟎아! 한 두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이래? 너 지금 사람 가지고 노는 거야?!”
“……뭐?”
별안간 불어오던 바람이 뚝, 멎어 버렸다.
“너 지금 뭐라고….그랬어?”
당황한 나머지 항상 놈에게 쓰던 존댓말이 반말로 바뀌어 버렸지만
놈도 나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런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찾아왔다고….? 나를….?”
“그래! 몰라서 물어?”
“….언제? 니가 나를 언제 찾아왔어? 거짓말 하지 마!”
“거밋말이라니!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너야말로 갑자기 모르는 척 하지 마!”
“거짓말이야….흑….니가, 니가 나를 언제 찾아왔어….흑….맨날 맨
날 기다려두….오지두 않아 놓구서….흑….니가 언제 왔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훌쩍거렸다.
사태가 이쯤 되자 놈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조금 전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몰라? 너 정말 모르는 거야?”
“내가 뭘….!!!”
“세번이나 찾아갔었단 말야. 니가 집 나가고 난 뒤에 진이형 가게로 세번이나 찾아갔
었다구! 그런데 그 때마다 진이형이 네가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보기 싫어한다고 그래
서 번번이 되돌아 왔단 말야! 그렇게 무시당한 건 당한 건 생전 처음이었어! 알기나 해?!”
“나, 나 몰랐어…진짜…알았으면…흑, 알았으면…내가 어떻게 그렇게 해…나 맨날 울면
서 너만 기다렸는데….기다렸는데…..흑, 알았으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하냐구….!!!”
내가 엉엉 울자 놈도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럼 진이형이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왜? 아니 그것보다도…기다려? 니가? 니가 날 왜?”
“ 엉엉….왜긴 왜야!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아아….
말해버렸다…..
드디어 말해버리고 말았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놈을 보니 그 포커 페이스가 나 못지않게 패닉 상태였다.
강성욱 이 바보 멍청아! 내가 그런 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그러니까, 뭐야. 좋아한다구? 나를?”
“그래….”
“좋아한다는 거야?”
“그래…!!”
“날?”
“그래! 그렇다니까!”
몇 번이나 그걸 묻는 거야!
“그럼 왜 집을 나가고 그래! 이 바보야!”
이번에는 놈이 내 대답을 듣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긴 왜야…흑…얼굴 볼 면목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울지 좀 마! 누가 죽었어? 왜 그렇게 우는 거야!”
누군 울고 싶어서 울어? 눈물이 나오는데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구!!!
내가 억지로 눈물을 그치려 애쓰는 사이 놈은 뭔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대답해봐.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흑…..”
아까보다는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질문이야?
하지만 어차피 다 고백한 거 남김없이 끝까지 다 말해버릴테야.
“흐윽…나 있쟎아…”
“그래, 말해.”
“흑, 흐윽…나는…니가 마, 만약에…사업을 하다…흐, 흐윽, 망해서….돈
이 하나도 없게…되면…내가 파출부를 해서라도…머, 먹여 살릴 거고….”
“또.”
“니가, 마, 만약에…사고를 당해서…흑, 식물인간 같은게 되도…흑…평생 안 떠나고 옆에서 간호할 거고….”
“또.”
“니가 화가 나서…흑, 나를 때리고, 막, 발로 차도 다 이해,”
“내가 널 왜 때리냐! 그리고 그딴 걸 왜 이해해! 미쳤어?!”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놈이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버럭 소리쳤다.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무섭게 왜 화는 내고 그래에…
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훌쩍이며 자기를 쳐다보자 놈은 하, 하고 기가 막힌듯 고개를 돌리더니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이리 와.”
“……”
“이리 오라니까.”
두 번이나 재촉당한 후 놈의 목소리에 화난 기색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머뭇머뭇 놈에게로 한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놈은 내 손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기더니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쥐고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눈 똑바로 쳐다 봐.”
“……”
“고개를 들지 못하자 뺨을 감싼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쳐다 봐.”
그제서야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놈의 눈을 올려다 보았다.
흘러내리는 감정으로 어두워진 눈이 나를 똑바로 내려보고 있었다
.
놈과 함께 살면서….그렇게 놈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본 건 처음인 것 같았
다. 그런 식으로 자제력을 잃은 놈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놈은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감정이 격해진듯,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냥하게 해준다거나 항상 다정하게 해준다거나 그런 약속은, 못해.”
알고 있어. 알고 있다구.
나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놈의 눈동자를 보며 알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을 보며 놈은 계속 말을 이었다.
“기념일 같은 거 잘 챙겨주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너만 위해줄 수도 없어.”
이번에는 조금 더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내 뺨을 감싸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대신 평생 너 하나만.”
“……”
“죽을 때까지 너 하나만 데리고 살 거야.”
“……흐, 흐윽…. ”
“무슨 뜻인지 알아들어?”
알아 들었어, 알아 들었어. 알아들었다구…!
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놈의 품을 향해 몸을 던졌다.
놈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엉엉….내가, 내가 잘못했어…다시는 안 그럴께….엉엉…!”
내 등에 두른 놈의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이 바보야. 나는 너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한단 말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단 말야. 그걸 왜 몰라? 바보같이…!”
니가 나한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쟎아!
항상 나한테 차가왔는데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꿈은 아니겠지.
내 뺨에 닿는 놈의 셔츠의 온기까지 그대로 느껴지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
아무 것도.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성욱이를 무지 사랑한다는 것 뿐.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는 혼자 외롭고 쓸쓸하지않을 거라는 것 뿐.
*
*
*
“자, 닦아.”
한참을 울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놈은 나를 소나무 숲 근처의 테니스 코
트 벤치로 데려가더니 수돗가에서 물을 묻힌 손수건을 가져와 코 앞에 내밀었다.
“너 지금 니 얼굴이 어떤지 알아?”
투, 퉁퉁 부었겠지….ㅡㅡ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가 보면 내가 너 때린 줄 알겠다. 어서 닦아.”
“으응…”
나는 눈치를 보다가 놈이 내민 시원한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조심스레 문질렀다.
“이리 줘!”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놈은 내가 닦는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손수건을 빼앗더니 얼굴로 벅벅 문질러댄다.
“아, 아야…!”
“가만히 있어!”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저 어리둥절할 뿐.
무지 기분좋은 꿈을 꾸고 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벤치에 고개를 젖히고 앉아 놈이 하는 대로 얼굴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닦던 놈은 손수건을 내리다 부어오른 이마를 보고는 또 목소리를 높였다.
“너 이마는 또 왜 이래? 시뻘겋쟎아!”
“아, 저, 그게요….”
거기까지 말하다가 나는 별안간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상에! 그걸 잊고 있었다니!
“야! 너 어디 가!”
놈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미친듯이 소나무 숲으로 달려갔다. 조금 전까지 놈과 얘기하고 있던 자리를 찾아보니….
저기 있다!
“내가 미쳤어, 미쳤어! 이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횡설수설하며 나는 바닥에 하얗게 떨어진 수표조각을 황급히 주워올렸다.
정말 다행이다. 그 사이 아무도 숲에 들어온 사람이 없었나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열 다섯,….아니 처음에 이게 몇 장이었지?
“뭐야, 그거 찾으러 온 거야?”
내 뒤를 따라온 놈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흙묻은 손으로 수표를 세고있는 나를 보더니 기가 막힌 표정이다.
캇! 그런 소리 하지 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내가 잊고 있었으면 너라도 챙겼어야 할 거 아냐!
나는 놈에게 보이지 않게 눈을 부라린 후 손 안의 수표를 세는데 열중했다.
아니 그런데 이거….히이이이이이익--------!
배, 백만원 짜리쟎아!
미쳤어! 미쳤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
“스무장이야. 이리 줘.”
나를 보고 있던 놈이 답답하다는듯 내 손에서 수표를 가져가더니 탁탁, 하고 정리해서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됐지?”
“….네에….”
“이제 가자.”
한쪽 손에는 흙묻은 수표를 쥐고 다른 손은 놈에게 맡긴 채 나는 놈의 뒤를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놈을 따라가고 있는데 한 열발자국쯤 가다 우뚝 멈춰선 놈은 마지막으로 나를 위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번만 더 그딴 식으로 말도 없이 뛰쳐나가면 너 정말 두 번 다시 집에 못 들어올 줄 알아. 알았어?”
“네? 네,네….”
움찔하는 내 대답을 듣고 놈은 만족한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도 믿을 수 없지만, 뭐가 뭔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