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16>
그날 나는 결국 김밥을 다 먹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디 김밥 뿐인가.
시켜놓은 음식이 테이블 위에서 그대로 차갑게 식어 면발이 생생우동처럼 될 때까지 놈의 얼굴도 제
대로 보지 못한 채 바닷가재처럼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버벅거리기만 했는데.
속모르는 남들이야 나한테 둔하기가 나무 늘보보다도 더하다는 둥 옆에서 보고 있으면 복장이 터진
다는 둥 말들이 많지만, 흥. 이거 왜 이러셔. 나도 눈치가 있다면 꽤 있는 사람이셔. (니가 도대체 무슨 눈치가 있냐….ㅡㅡ;;)
그러니까 뭐야, 사실은 놈이 생각만큼 나를 싫어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거 아냐.
겉으로야 나를 무시하고 틈만 나면 나한테 눈썹을 찌푸리지만 알고보면 놈에게도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다감한 구석이 있다는 거.
모두들 그걸 말하고 싶은 거 아니냐구.
뭐 사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뭔가 좀 이상한 비유….ㅡㅡ) 저도 인간인데 그 정도 양심은
있어야지 어디가서 제대로 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비록 성장과정에서 주어진 지나
친 특혜로 인해 그런 반사회적이고 비상식적인 인물이 되었다 해도 저도 고등교육을 받은 이상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
내가 그동안 놈을 이기적이고 건방지고 오만한 부잣집 막내아들 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
만 그래도 이렇게 늦게라도 놈의 소박한 진심(?)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쟎아?
역시 세상에 아주 나쁜 놈은 없는 거더라구.
놈은 여전히 도도하긴 하지만 그것도 성격이라면 성격인데 하루아침에 다 뜯어고치라고 할 수
는 없고, 뭐 그동안 나에게 저지른 수많은 만행(?)들을 생각하면 괘씸하기도 하지만 좋은게 좋은
거라구 그건 놈이 나 대신 뜨거운 라면국물을 뒤집어 쓴 걸로 모두 잊어버려야지.
어차피 이제 이 집에서 살 날도 열흘밖에 남지않았는데 새삼스레 집주인의 비위를 건드려서
좋을 일이 뭐가 있어?
그냥 있는듯 없는듯. 쥐죽은듯 살다 가야지.
일단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 나는 열흘동안 세심하게 몸을 사렸다.
놈도 그 뜨거운 라면국물을 뒤집어 쓰더니 뭔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내 말에 이따금씩 한두마디
정도는 대답하는 기특한 성의를 보여주고 있고.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침에 놈이 나갈 때면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배웅을 하다 아래층 아줌마를 마주쳐도 배시시 웃게 되고, 밤이면 이따
금씩 바에 앉아 테라스의 야경을 바라보며 진토닉을 마시는 놈에게 치즈와 과일 따위의 안주를 날라
다 주다가 슬그머니 거실 한 구석의 TV 를 틀어 좋아하는 드라마도 보고, 일광욕실에 침대 시트를
널러 갔다가 햇빛이 내리쬐는 안락의자에 앉아 그대로 잠이 드는, 그야말로 모든 주부들이 꿈꾸는
해피한 일상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놈과 나 사이에는 왠지 조금은 조심스러운 기류가 형성되었지만 예전보다 훨씬 우호적이어서 나는
예전처럼 놈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놈 앞에서 실실거리거나 농담을 던질 수
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먼저 말을 걸 수도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알고보니 놈
은 진짜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스타일이어서 그 목소리를 들으려면 내가 꽤 많이 말을 걸어야 했지
만 어쨌든 매일아침에 마룻바닥을 닦는 것처럼 놈에게도 조금씩 익숙해져 놈이 말이 없어도 나는
그러려니하고 옆에서 과일을 깎고 거실청소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만 더 일찍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어쨌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물처럼 흘러
드디어 진이형과 약속한 한 달이 다 되었다.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지 딱 29일째 되던 날 밤.
나는 침대에 앉아 다음날 가져갈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짐이래봤자 옷가지 서너벌과 세면도
구, 책 두어권 정도지만 그래도 잠들기 전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아야 가뿐한 마음으로 이 집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방도 안녕이구나.”
마지막으로 남은 옷가지를 가방에 넣고 난 다음 나는 푹신한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쓸
며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비록 내 힘으로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 생
전 처음으로 가지게 된 내 방에 대한 마음은 애틋했다. 내 평생 이런 좋은 방을 다시는 가
져볼 수 없을 것이기에 나는 방 안 풍경을 모두 기억해 두려는듯 하나하나 찬찬히 돌아보았다.
작은 화분이 줄지어 놓인 창가에서부터 깨끗이 닦인 마룻바닥, 옅은 꽃무늬의 하늘색 스트
라이프 벽지, 하얀 쿠션이 다섯개나 놓인 침대까지.
생각해보니 놈과는 별도로 나는 처음부터 이 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었던 것 같다. 한 사
람이 혼자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청소하는 것도 현기증이 날만큼 힘들었지만 어쨌든 이
집은 그동안 내가 전전했던 월셋방이나 다세대 주택과는 다른 의미의 <집>이었다.
…… 다음엔 누가 이 방을 쓰게 될까?
불현듯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짐을 싸던 손길을 멈추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니 놈이 직접 집안일을 할 리도 없고, 그렇다면 내 뒤를 이어 새로운 가정부가 온다는 얘긴데…..
그 사람은 여자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지끈했다. 그 통증이 얼마나 선명하고
예리했는지 나 스스로도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심장이 미쳤나봐.”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잠옷을 가지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들어 이렇게 심장이 지끈거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게 언제냐면….기껏차린 밥상을 놈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나갈 때나….밤이 깊었는데
도 돌아오지 않을 때나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말을 걸었는데 눈 앞에서 쾅 문을 닫아버렸을 때.
그러고 보니 죄다 놈과 관련된 상황에서만 그렇쟎아?
“….하여튼.”
욕조의 온수를 틀며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심장병이 다 생겼겠냐. 이십평생
남한테 자랑할만한 거라고는 튼튼한 체력밖에 없는데 그나마 팔자에 없는 가정부 생활
한 달 하다가 그것마저 거덜나게 생겼으니.
반쯤 물이 찬 욕조에 입자가 가느다란 하늘색 입욕제를 풀며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나중에 누가 마누라가 될는지…참…..”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인내심이 엄청나게 강하고 요리도 무지막지 잘 하고 성격도 엄청나게 좋아야 할 거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세상에 있으려나?
나는 놈과 어울릴만한 스타일의 여자를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
도 놈과 결혼을 한다거나 사랑에 빠진다거나 할 여자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고 대신 심장만
지끈거리며 계속 아파왔다.
“아야..…진짜 병원에 가봐야겠네.”
부디 큰 병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뜨거운 물에 풀린 입욕제가 일으키는 투명한 물색 거품을 바라보다 나는 물이 거의
다 차자 등 뒤의 샤워커튼을 치고 티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욕실 안이
춥지 않을만큼 수증기가 차려면 물을 다 받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이 집은 욕실까지 완벽하게
스팀이 들어오기 때문에 맨몸으로 다녀도 감기에 걸릴 염려따윈 없을 것이다. 게다가 놈의 욕실
보다는 덜 하지만 이 방에 딸린 욕실도 보통 사람들의 눈에 비춰본다면 꽤나 사치스럽게 꾸며
져 있었다. 겨울에도 찬물에 손을 씻는 것에 익숙해있던 나에게는 오히려 낯설었지만 나도 나중에
성공한다면 이렇게 장미향기가 나는 좋은 욕실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으…뜨거워….”
온도를 잘못 맞춰 김이 펄펄 나는 욕조 안에 고양이처럼 한쪽 발만을 슬쩍 담가봤다가 너무 뜨거워
나는 작게 이마를 찌푸린 채 그 안에서 살살 발을 휘저었다.
제기랄. 따스한 물에 세수나 할 걸.
영화에서 보면 거품나는 욕조에 팔등신 미녀가 누워서 샴페인을 마시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서 한
번 흉내 좀 내보려고 한 건데 이렇게 구색을 맞추기가 힘들어서야, 원.
“그래도 전망은 멋지구나.”
한참 후 찬물을 틀고 휘휘 물보라를 일으켜서야 겨우 알맞은 온도가 된 욕조 안에 편안하게 몸을 담
그고 나는 놈의 욕실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세로로 길고 폭이 좁은 욕조 근처의 창가에 붙어서 턱을 괸 채
근사한 도시의 야경을 넋을 잃고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보니 정말로 한강을 지나는 유람선들의 불빛이 벨벳에 박힌 다이아몬드처럼 강물에 비쳐 아름답
게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맨 처음 이 집에 와서 놈의 욕실타일을 닦을 때 흥분하던 생각이 나 나는 절
로 쓴웃음이 나왔다. 그때 보란듯이 방을 구해서 이 집을 나가겠다고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결국은 처음
약속했던 한 달을 다 채우고서야 이 집을 나가게 되다니….. 놈한테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던 게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이제 이 집을 나간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 놈에게 어제 아침먹는 사이 더듬더듬 말을 꺼내긴
했는데 놈은 듣는둥 마는둥 뭔가 몹시 바쁜 일이 있거나 아니면 정신이 딴 데 가있는 것 같았다. 그 태
도가 왠지 서운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뭐 울면서 잡아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수고했다, 든지 어디가서든 잘 지내. 라든지 그런 말은 할 수 있는 거쟎아?
놈은 그래? 하고 한 마디 하고는 말없이 먹던 국만 계속 퍼먹었을 뿐이었다.
“에휴…..”
생각하니 서러워서 나는 야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긴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뭐. 기껏해야 같이 지낸 시간도 한 달 뿐인데 지가 서운해봤자 얼마나 서운하겠어.
내가 이 집을 나가게 되면 또 새로운 사람이 올텐데….
그치만 나는….
이 집을 나가게 되면 어떤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지금은 피해다니고 있지만 언젠가는 성도 그 자식도 다시 만나야 할 거고….직업도 다시 구해야 하는데
….모아놓은 돈은 없고….윤아한테 말해서 바텐더라도 다시 해야 하는걸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아아…머리 아파…..”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해야지.
복잡한 것은 정말 딱 질색이다.
평소 성격대로 앞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나는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물 속으로 푹 잠겼다.
지금은 당장 이 집을 나가는게 최우선이니까 그 다음 일은 내일 또 생각하자.
케세라세라.
산 입에 거미줄 치란 법은 없다고 될 대로 되겠지. 뭐.
그치만 말이지, 나는 항상 그게 문제다.
모든 일이 항상 될대로 안된다는 거.
팔자가 사나운 건지 운명이 기구한 건지 하여튼 무슨 일 하나를 해도 제대로 되는 법이 없다니까.
인생.
정말 왜 이렇게 내 맘대로 되는게 없는 거냐구.
*
*
*
“뭐?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멜론을 씹다말고 목에 걸릴 것 같아 황급히 꿀꺽 삼킨 다음 눈을 휘둥그
렇게 뜨고 맞은편에 앉은 진이형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그 바람에 진이형이 깜짝
놀라 마시던 주스에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콜록, 아니, 저, 그게, 콜록! 콜록!”
“형! 괜챦아? 응? 미안해. 미안. 물 마셔. 물!”
나는 놀라서 얼른 냉장고로 달려가 찬물을 꺼내 진이형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진
이형이 물 한 모금 마실 동안도 참지 못해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는 진이형을 닥달했다.
“자세히 말해봐. 자세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얘기야? 이게!”
“나도 모르겠어,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이 없었는데 어제 알아보러 갔더니
부동산 할아버지가 갑자기 팔렸다고 그러는 거야.”
내 시퍼런 서슬에 기가 죽은 진이형이 죄인처럼 식탁 위에 몸을 수그리더니 난처한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지만…
“아니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안 팔렸었다고 그랬쟎아! 싯가 7억이 넘는 건물을 누가
사흘만에 갑자기 샀다는 거야! 누가?”
나는 핏대를 세우며 금방이라도 식탁 위로 뛰어오를 듯한 기세로 날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 갑자기 짐까지 다 싸놓고 기다리고 있는 나는 어쩌라고 그런 소리를 해대는 거냐구.
“그러니까. 싯가 7억이 넘는 건물을 어느날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와서 홀랑
사버렸다. 그래서 나는 그 방을 계약할 수가 없다. 이 얘기하는 거지? 지금?”
“그러게. 그 일대가 개발계획이 없어서 투자가치도 전혀 없거든? 그런데도 엊그젠가
갑자기 사람이 오더니 시세의 두배를 주고서라도 자기가 사겠다고 그러더래.”
내가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며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끊어 말하자 분위
기 파악 못하는 진이형이 덩달아 또박또박 내 말에 맞장구를 쳐댔다.
“시세의 두 배를?”
내가 반신반의하며 묻자 진이형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그래. 그 자리에서 바로! 그리고 자기는 세를 놓을 생각도 전혀 없다고 그러더래.”
“아니 그럼 나는 어떡하라구! 나 2층에 짐까지 다 싸놨단 말야!”
“쉿, 야, 야. 성욱이 듣겠다. 성욱이 듣겠어. 목소리 좀 낮춰.”
내 발악에 진이형이 얼른 내 입을 막으며 거실에서 TV를 보고있는 놈을 흘끔거렸지만…
..아 지금 그게 문제야? 내가 이 추운 겨울날에 맨 몸으로 길거리로 쫓겨나게 생겼는데!
“아니 어떤 정신나간 놈이 그런 낡은 건물을 시세의 두배나 주고 사들였다는 거야? 어떤 정신나간 놈이!”
내가 칼등으로 식탁을 탕탕 두들기며 소리치자 진이형도 질새라 포크로 접시를 치며 박자를 맞췄다.
“내 말이 그말이라니까. 나도 그 자식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야.”
“세도 안 준다고 그랬다며! 아니 그게 무슨 가정집도 아닌데 세를 안 놓으면 지가 뭐할려고 그 건물을 산 거야? 뭐 할려고!”
“그래. 기막히지? 나도 기막혀. 근데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
“아우우 ㅡ 내가 정말 미치겠네!”
“참아. 보경아. 너 고혈압이쟎아. 흥분하면 안 좋아. 너.”
내가 당장이라도 식당 바닥에서 뒹굴 것처럼 흥분하자 진이형이 내 손을 꼭 움켜잡으며 나를 위로했다.
“형. 나 이제 어떡하면 좋아. 혀엉….”
나는 진이형의 손을 마주잡으며 울먹였다.
나는 정말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도대체 이 추운 겨울에 이 집을 나가면 어떡하라고. 서울시내 그 많은 건물들 중에 하필이면!
“그 건물 말고 다른데 급히 들어갈만한 곳은? 없을까?”
“…글쎄…그 돈으로는….가게 뒷방도 아직 수리 중이고….”
진이형이 나 못지않게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긴. 그렇겠지.
천만원밖에 안 되는 돈으로 오늘 갑자기 방을 구하라고 한다면 무리겠지.
그치만? 그치만 나는?
“어떡해…..”
살면서 별의별 고생을 다 해봤지만 오늘처럼 황당한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내가 절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자 진이형이 옆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그런 내 어깨를 안고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마. 보경아. 형이 어떻게든 잘 해결해 줄께.”
“미안해. 형….난 정말 재수가 없는 놈인가봐…어쩌면 이렇게…!”
나는 훌쩍거리며 크리넥스 휴지를 뜯어 팽, 하고 코를 풀었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내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처럼 보이자 진이형이 뭔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묻긴 했지만 나도 진이형이 말한 방법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스으윽 ㅡ
우리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거실에서 TV를 보고있는 놈을 향해 음산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소파에 앉아있던 놈이 감쪽같이 사라진게 아닌가!
“뭐해?”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우리 둘의 머리 위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왓 ㅡ ”
우리 둘은 깜짝 놀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놈은 그런 우리에게는 관심없다는듯
냉장고 쪽으로 가 문을 열고 콜라를 꺼내더니 캔을 땄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기분이 굉장
히 좋은 건지 어떤 건지 놈은 학교에도 가지 않고 오전 내내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오색 에네르기를 내뿜고 있었다.
“저…..”
나는 안절부절하며 놈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맞은편
에서 진이형이 눈짓으로 하지 마,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저, 성욱아.”
“왜?”
진이형이 머뭇머뭇 놈의 이름을 부르자 놈이 콜라를 마시며 캔 너머로 형의 얼굴을 응시했다.
“저기…있쟎아….너…다른 가정부….구했니?”
“아니.”
형이 어렵게 말을 꺼낸 것과는 달리 놈은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진이형을 내려다 보았다.
휴우 다행이다 ㅡ
진이형과 나는 동시에 안도의 숨을 쉬며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저기….아무래도 이, 인력난이 심해서 이렇게 갑자기 다,다른 사람을 구하는 건 무리겠지?”
더듬거리긴 왜 더듬거려, 진이형!
“그렇겠지.”
놈은 진이형의 말에 선선히 수긍하더니 남은 콜라를 마저 다 마시고는 캔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서….보경이가 며칠 더 있는게….좋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드는데…..”
형! 그건 너무 속 보이는 발언이쟎아. 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러나 나의 예측은 항상 빗나가나 보다.
놈은 진이형의 말에 아무 생각없이 그러던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핫, 저, 점심 먹어야지? 진이형도 밥 먹고 가. 저번에 사다놓은 생태가 어디 있을텐데,
내, 내가 찌개라도 끓일께. 그, 그게 어딨더라? ”
숙련된 가정부답게 그 눈길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린 나는 금방 가정부의 자세로 되돌아가
앞치마를 찾아 두르고는 수선스럽게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까?”
“아냐. 아냐. 형은 나가있어. 내가 할께.”
사인을 보내는 투수처럼 나는 눈짓으로 거실 쪽을 가리키며 필사적으로 진이형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야아. 성욱아, 참 아까 보니까 테라스에 난 화분도 있더라? 그거 니가 키우는 거야?”
그랬더니 역시 진이형은 나와 10년을 함께 보낸 사이답게 그 눈짓의 의미를 금방 알아차리고는 거실 쪽으로 놈을 유인해 나갔다.
“크흐흐흑…..”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것도 잠시, 그 두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나
는 냉동고 문을 부여잡고 머리를 박으며 비탄의 눈물을 흩뿌렸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기약없는 가정부 생활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내 이 자식! 누군지 잡기만 해봐! 정말! 7억이 아니라 70억짜리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다!”
소리쳐봤자 대답없는 메아리.
결국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우껍질을 벗기는게 언 마이웨이. 나의 갈길이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