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123/141)

 비운의 신데렐라<17>   

“에…..드라이 크리닝비가 45000원에…..시장 본 게 57000천원….또 세탁기가 고장나서 서비

스 받은게…21000원….복도 청소비 65000원….아니 그럼 도대체 이 5600원은 어디에서 비는 거야?”

드물게도 화창한 수요일 아침.

오랜만에 교외로라도 나가면 기분이 좋을듯한 청명한 날씨였지만 나는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앞치마 차림으로 머릿수건까지 쓴 채 거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바닥에 흩어진 영

수증을 향해 있는대로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다.

아까 오전중에 아침 청소를 마친 후부터 벌써 30분 동안이나 가계부에 매달려 있었지만 도대체

 비어버린 부분이 어디에 쓰여졌는가가 생각이 나질 않아서였다. 하는 수 없이 가지고 있던 영수

증이며 계산서를 모조리 거실로 끌고나와 일렬로 바닥에 쫙 펼쳐놓은 채 하나하나 맞춰봐도 역

시 사라진 5600원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진짜 이상하네….”

가사를 책임지는 가정부로서 제일 신경쓰이는 일은 역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돈의 행방.

가계부에서 일이백원만 비어도 가슴이 떨리는데 하물며 그것이 5600이란 거금(?)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언제나 꼼꼼하게 수입과 지출을 체크하는 나로서는 직업상의 프라이드에 관련된 문제

다. 뭐 다른 데 써버리거나 잃어버리진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섯번이나 계산을 

해봐도 틀리다는 건 어디가 심각하게 이상하다는 증거다.

계산을 잘못했나?

“어디다 떨어뜨린 건 아닐테고…..다시 한 번….음….어제 제일 먼저 세탁소에 갔다가….사만

오천원, 또 그 다음은 슈퍼마켓에서….이만칠천원….그리고 또….”

....?

필사적으로 범인을 쫓는 형사처럼 손가락을 하나 둘 꼽아가며 어제 자신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

다가 나는 문득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놀라 엎드린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한쪽 눈썹을 약간 찌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익숙한 놈의 얼굴. 

금방 샤워를 했는지 기분좋은 샴푸향기가 갓 마른 옷냄새와 함께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레몬향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심장이 또 찌릿, 하고 가볍게 울렸다. 

어떡해. 정말로 내가 병이 있나?

내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저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얹자 놈은 그런 나를 힐긋 보더니 턱

짓으로 자신의 발치에 흩어진 영수증을 가리켰다. 

“뭐하고 있는 거야?”

“가,가계부 쓰는 중인데요.”

이쪽에서 내려다 보이는 시츄에이션에 눌려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

더니 곧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한다. 그 사이에 심장의 통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제기랄. 물어보고 무시할거면 말은 왜 거냐?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나는 잽싸게 놈을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놈은 뒤에서 보아도 한 눈

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나게 재단된 검은색 슬랙스에 소매를 걷은 차가운 청회색 실크 셔츠, 은색 

체인의 구찌 로퍼까지 휴가철의 부잣집 망나니 아들같은 인상이다. 요즘은 그래도 좀 한이틀 얌전하

게 입고 다니나 싶었는데 지 버릇 개 못준다고 사흘도 못 가 다시 저렇게 눈에 띄는 스타일로 돌아와 버렸다.

하긴. 있는 옷 입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냐. 마음 내키는 대로 다 입어라. 다 입어.

내가 뒤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놈은 신발을 마저 다 신고 검은색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막 현관을 열고 나가려하고 있었다.

앗 참! 나가기 전에 얼른 물어봐야지!

나는 놈이 현관문을 잡고 막 나가려는 순간 다급히 등 뒤에다 대고 물어보았다.

“저, 오늘 늦게 들어오세요?”  

쑥스러워서 뒤에서 뭉텅 잘라먹은 말은 <오늘 저녁에는 쇠고기 스튜를 할 건데…..> 

지난 번에 했을 때 맛있게 먹었으니까 오늘 저녁에도….

하지만 수줍은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걸 어떻게 알아? 나가봐야 아는 거지. 넌 집이나 잘 보고있어.”

....ㅡㅡ#

싸가지. 같은 말이라도 꼭 그렇게 해야 돼?!

입을 꾹 다물고 원망스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데 놈은 친절하게도 한 마디 더 덧붙인다.

"저녁하지 마. 오늘 약속있어. 안 들어올지도 몰라."

“네?”

쾅  ㅡ 

깜짝 놀라는 나를 뒤로 하고 놈은 문소리도 요란하게 나가버렸다. 리바이벌은 절대 안 한다는게 놈의 또 하나의 특징.

아니 그런데 뭐?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약속이 있어?

누구랑?

멍하니 현관에 서있다가 찰칵 하고 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에 정신이 들어 나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방금 전의 그 자세로 가계부를 다시 펼쳤다.

…5600원….5600원이라….. 5600…..

…..왠지 기분이 몹시 나쁘군. 

맨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숫자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놈이 나간 것 말고는 그 사이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나는 갑자기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가계부의 공란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잃어버린 돈의 행방이 떠오르지가 않아서인가?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에이 ㅡ”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점점 더 나빠져 나는 가계부를 소리나게 덮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졌던 가계부도 갑자기 시시하게 느껴져 내가 왜 이런 것

을 세시간동안이나 붙들고 낑낑거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돈? 오천육백원?

흥. 그런거야 좀 없어지면 어때! 어차피 이 집에는 차고 넘치고 깔리는게 돈인데!

나는 가계부를 아예 테이블 위로 던져놓고 손가락 끝을 있는대로 씹으며 오전내내

 깨끗하게 청소한 마룻바닥에서 이리뒹굴 저리뒹굴 마음 가는대로 뒹굴고 있다가 어

느 순간 테이블 아래 팔이 걸리자 딱 멈췄다.

……여자랑 한 약속인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더욱 기분이 불쾌해져 나는 다시 테이블 아래 팔이 걸린 자세 그대로 이마를 팍 찡그렸다. 

누군 말이야 아침부터 밤까지 허리도 못 펴고 하루종일 집안일에 이리 치

이고 저리 치여 정신 못차리는데 말야 누구는 여자랑 데이트를 해? 

외박하면 그 상대랑 자고 들어온다는 거 아냐! 그럼 여자지, 남자겠어?

…..그 생각 하니까 진짜 성질나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 안을 성큼성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내가 일개 가정부라지만 지가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아무리 자기 사생활이 있다지만 지킬 건 지켜야지 어디서 감히 외박을 해! 하기를?

“……우우…..”

그 생각을 하니까 심장이 또 욱신거리면서 아파와 나는 거실 한가운데서 웅크리고 주저앉았다.     

칫…..그렇게 차려입고…어딜 나가나 했더니만…..

“두고봐! 내일부터 절대로 밥 같은 건 안 차려 줄 테니까!”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괸 눈으로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쿵쾅쿵쾅 발소리도 요란하게 이층으로 올라갔다.

지키지도 못할 맹세같은 건 하지 않는 법이라지만 성질 나는데 무슨 말을 못 하겠냐.

어차피 놈을 보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 못하고 빌빌거리겠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고 자존

심이 있는 사람이야. 갈 데 없어서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것도 처량한데 너까지 그렇게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야겠냐! 

굳이 생각해보면 놈의 사생활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긴 해도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 어디까지나 모든 일을 명확하게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구분해서 생

각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나는 거다. 

생각해보면 나는 청소나 하고 집안일이나 하면 되는 가정부인데 집주인이 외박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라고 누군가가 묻는 다면 할 말은 없지.

그치만 어떡해. 화가 나는데.

왜 화가 나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나는 거라니까!

결국 한참을 더 침대에 누워있다가 잠이 드는 바람에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해야겠다고 생각해놓은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그건 심신에 입은 타격으로 인해 모조리 내일로 패스. 

널어놓은 빨래나 개어놓고 간단히 저녁이나 먹고 다시 자리에 누워야겠다.

“…..씨이….진이형은 뭐하는 거야. 빨리 나갈 집을 구해주지 않고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보송보송하게 마른 빨래들을 개며 나는 죄없는 진이형을 원망했다.

그 집만 누가 사지 않았어도….아니 애초에 이 집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아니 처음부터 성도 그 자식만 만나지 않았어도…..

“결국은 다 내 탓이야.”

마지막 남은 타올을 개어 놈의 셔츠위에 올려놓으며 나는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항상 내 자신이다. 

처음 성도 그 자식을 피해 집을 나왔을 때 놈을 만나지 않았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 더 밝은 양지에서 훌륭하게 살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닐테지. 나는 아마도 항상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삶을 영위하니까. 

내 성격상 나는 원래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처음 성도 그 자식을 만

났을 때도 나는 주위에서 그 자식의 질나쁜 소문을 조금은 듣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누군가 나눠주는 온기가 필요했었다. 항상 쓸쓸하고 외롭고 그래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이런 감정적인 혼란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나름대로의 추억과 슬픔과 혼자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상대들. 

쉽게 화내고 쉽게 풀어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단순한.

처음에 진이형이 말했던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었나?

“…우…너무 진지한 걸 생각하니까….머리가 아프다…..”

그러면 그렇지.

너무 한참동안 그런 생각을 했더니 편두통이 몰려와 나는 비틀비틀 빨래를 들

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나는 조금만 복잡한 생각을 하면 이렇게 머리가 아

픈게 체질에 안 맞는다는 증거다. 그래도 한참 자고 일어났더니 기분이 아까보

다는 조금,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나는 빨래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꽤 오래 잤는지 창밖은 벌써 어스름하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놈도 지금쯤 어딘가에서 저녁을 먹고 있겠지. 저렇게 화려한 유람선 안의 레스토랑일지도 몰라.

욕실의 페어 글라스 바깥으로 보이는 유람선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바라보며 욕조턱에 앉아나는 문득 쓸쓸해졌다.

….이번에 이 집을 나가서….성도 일이 잘 해결되면…..다른 사람을 다시 만날까……

그 사람은…좀 다정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밑도 끝도 없이 그런 감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딩동 ㅡ 딩동 ㅡ 

갑자기 정적을 깨고 현관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엄마야 ㅡ ”

넋을 놓고 있다가 깜짝 놀라 휘청 ㅡ 하고 균형을 잃고 욕조 안으로 넘어갈 

뻔 한 나는 가까스로 팔을 짚고 정신을 차렸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도대체 누가 온 거지?

“누구세요?”

어차피 놈일리는 없고 진이형이나 윤아도 아닐 것이고.   

나는 슬리퍼를 직직 끌고 기운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새를 못 참고 탕탕하고 현관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문 안 열고!”

잉? 왠 젊은 여자 목소리지?

톤이 높은 하이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인터폰으로 바

깥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은 커다란 모자와 언뜻 비치는 꽃무늬 원피스뿐.  

“저…누구세요?” 

“누구냐니! 그러는 넌 누구니?”

머뭇거리는 내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들리는 꽃무늬 원피스의 반격.

캭! 이 아가씨가 정말!

“문 열어! 문! 팔 아파 죽겠다구!”

쾅쾅쾅쾅! 

여자가 도대체 무슨 힘이 있다고 마치 문을 때려부수기라도 할듯이 두드려대는데 정말

 이 조용한 저녁나절에 다른 사람은 어쩌라고 이렇게 문을 두드려 대는 거야!

“아,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원래 강하게 나오는 상대에게 약하다.

보아하니 여자가 상대인데 강도일리도 없고 아마도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적당히 상대

해서 돌려보내야지. 란 재빠른 상황판단으로 나는 얼른 현관문을 따고 그녀를 집안에 들어오게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는 거야!”

우우…..엄청난 글래머의 미인!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빽 소리부터 질렀지만 나는 그녀의 엄청난 외모에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멍청히 현관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까만 웨이브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에 꼭 고양이과 동물처럼 고

혹적이고 커다란 눈매, 완벽한 형태의 콧날에 새치름한 입술, 새빨간 부겐빌리아 꽃이 프린

트된 유명 디자이너의 대담한 검정색 슬립 원피스가 완벽에 가까운 몸매를 감싸고 있는 모습

이 정말 넋이 나갈 정도의 고혹적인 미인이었다.   

“그런데 성욱이는 어디가고 처음보는 너가 있는 거야?”

그런데 이 미인은 성격이 나쁘시군. 보자마자 반말이라니 그게….응? 지금 뭐라고?

“뭘 그렇게 멍청히 서있는 거야? 성욱이 어딨냐니까?”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눈을 치켜뜨며 허리에 손을 착 대고 묻는데….네가 뭔데 남의

 집주인 이름을 막 부르는 거냐!  (이봐.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쟎아, 황보경군…ㅡㅡ;;)  

기껏해야 나랑 동갑이거나 그보다 어려보이는데!

“집에 없어? 야? 강성욱! 성욱아! 너 어딨어?”

내가 대답을 안해주자 그녀는 제멋대로 샌들을 현관에 집어던지고 집안으로 들어오

더니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놈의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소용없어! 놈은 이 집에 없다니까!

“이, 이봐요! 남의 집에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머?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서 뭐하는 거야?”

참다못해 한쪽 팔을 붙잡고 물었더니 여자가 깜찍하게 눈을 치뜨고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너라니! 너라니! 이 언니가 정말!

“나, 나는 이 집,”

“이 집 뭐? 니가 강성욱이 애인이라도 돼?”

캑.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나? 나 강성욱 전처다. 왜?”   

펑 ㅡ 

뭐, 뭐, 뭐, 뭐, 뭐라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컬쳐쇼크!

제멋대로 내뱉은 여자의 말을 이해한 순간 나는 경악해서 입을 떠억 벌

리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 뭘 그렇게 놀래? 왜, 강성욱이 결혼했었다는게 그

렇게 충격이야? 설마 너 진짜 성욱이 애인이니?”

뻐금뻐끔.

너무나 큰 충격에 아직도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 강성욱 전처야, 전처야, 전처, 전처, 전 ㅡㅡㅡㅡㅡ

여자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방금전까지의 나의 고민은 저멀리 하늘로 흔적도 없이 날아간 상태.

여자는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 그대로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난 이미 얘기했고. 그러면 다음은 니가 대답하는게 순서지? 넌 누구야?”

“…..가정부인데요.”

“호호호! 그럼 그렇지! 아유. 하루종일 쇼핑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얘. 집에 딸기하고 키위 있지? 얼음 좀 넣어서 시원하게 갈아와. 설탕은 넣지 말고.”

남이야 정신을 잃고 금방이라도 현관에서 쓰러지던 말던 내 대답에 아주 만족한

 여자는 사뿐사뿐 거실로 가 한가운데의 커다란 소파에 길게 드러눕더니 대뜸 그렇

게 명령한다.그 바람에 밀려 올라간 원피스 밑단의 검은 레이스 사이로 드러난 허벅

지의 라인이 너무도 완벽해서 내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내가 미쳤냐! 너한테 그런 걸 해주게!

“아, 그리고 크루아상 같은 것도 있으면 좀 가져올래? 갓 구운 거면 더 좋겠는데.” 

웃기지 마. 갓 구운게 아니라 열흘쯤 전에 구운게 있어도 너한텐 안 줘.

그러나 그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나도 모르게 거실로 가 냉장고 문을 열고 야채박스를 뒤지고 있었다. 

물론 여자의 말대로 야채박스에는 키위와 바나나, 딸기가 가득 차 있었고 오븐 안

에는 내일 아침 놈에게 먹이려고 만들어 두었던 빵도 들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저렇게까지 말을 하니 놈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 사실이겠지.

제정신이 아닌 이상 생판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수돗물을 틀고 흐르는 물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씻어 믹서에 넣고 버튼을 누르자 믹

서기는 값비싼 일제답게 조용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딸기와 키위가 섞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전처래….전처….전처….

서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놈의 전처를 위해 이 따위 주스나 만들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그래서 눈물이 막 났다. 

“흐으으윽…..흐윽…흐으으윽….”

컵에 따르던 주스 속으로 눈물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나는 계속 훌쩍댔다. 

이건 정말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너무하지 않은가? 전처라니! 전처라니! 

“말도 안돼…”

내가 그렇게 울먹이며 하얀 사기 접시에 크루아상을 담아 막 거실로 내가려 할 때였다.

딩동 ㅡ 딩동 ㅡ 

갑자기 현관에서 또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머? 성욱이 왔나보다! 누구세요? 성욱이니?”

나보다 한발 빠르게 여자가 원피스 자락을 휘날리며 날듯이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놈의 목소리.

“뭐야? 집 안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으흐흐흐흑. 성욱아아!

그때처럼 놈의 목소리가 반가워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식당을 나가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놈은 내 얼굴을 보고는 갑자기 소리치듯 말했다. 

“뭐야, 넌? 왜 울어?”

나, 나 있쟎아, 흐으으윽….이 여자가 말이지….흐윽….

“어머? 정말이네? 세련이 너! 니가 또 울렸지?”

이 여자는 또 뭐야!

나는 울다말고 놀라서 놈의 뒤를 따라 현관문을 닫고 들어오는 또 한 사람을 멍하니 바

라보았다. 단정한 베이지색 슈트에 머리를 틀어올린 생김새가 어디서 많이 본듯한….

헉! 저 여자랑 똑같이 생겼쟎아!

나는 깜짝 놀라 금방이라도 흘러내릴듯한 검은색 슬립 원피스의 여자와 못마땅한 얼굴로

 그 녀를 바라보고 있는 베이지색 슈트의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하고있는

 스타일만 다르다 뿐이지 두 여자의 얼굴을 국화빵처럼 똑같았다. 

“뭐냐니까. 너 왜 울어.”

뜻밖의 사실에 놀라 멍하니 서있는 나를 보고 놈이 몹시 기분나쁜 얼굴로 나를 채근했다.

“저, 그게….”

“그게 뭐?”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게 말이지 저 여자가 니 전처

라고 했다고 해서 울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냐! 

내가 망설이고 있자 성질급한 놈이 한 번 더 닥달을 하려는 사이 조금 전의 그

 사악한 여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나에게 놀리듯 말했다.

“너 보기보다 순진하다. 얘. 좀 괴롭혔다고 그깟 일로 울기까지 하니?”

그러고는 호호호홋! 하고 웃어댔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세련이 너!”

베이지색 슈트의 여자가 책망하는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흥, 하고 고개를 돌리

더니 라라라, 하고 다시 소파로 향했다. 그랬더니 놈이 갑자기 그 뒤를 이어 버럭 소릴 질렀다. 

“큰누나! 자꾸 그런 짓 하지 말랬지?” 

“어머, 얜! 왜 그렇게 소리는 지르고 그래. 깜짝 놀랐쟎니? ”

“누나가 자꾸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쟎아! 이번엔 또 뭐라고 그랬어?”

잘한다! 계속 소리질러!  

그런데….어! 뭐가 어쩌고 어째? 누나라고! 

“정말…세련이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뉴욕에 큰오빠한테 전

화가 와서 편지 한 장 없이 없어졌다더니 말도 없이 한국에 오면 어떡해!”

“동생집에 온게 그렇게 잘못이야?”

“누가 성욱이한테 온게 잘못이래? 말도 없이 왔으니까 그러지! 다른 사람한테 폐만 실컷 

끼치고 이게 뭐야?” 

똑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베이지색 슈트의 여자는 어른스러운 태도로 야단을 쳤다. 그 조리

있는 공격에 결국 처음에 기세등등했던 그녀는 나중에는 완전히 풀이 죽어서 소파 위에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치…..나도 다 생각이 있었단 말야, 도착하면 전화할 생각이었어….”

“잘도 했겠다. 잔말말고 너 이리 나와. 지금 당장 데리고 돌아가야겠어.”

“싫어! 다시는 안 가! 나 여기서 성욱이랑 살거야!”

“누구맘대로! 너 정말 이럴래! 강세련!”

맞아! 누구 맘대로 여기 산다는 거야!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놈의 뒤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데  별안간 놈이 

"시끄러워!"

하고 소릴 질렀다.

그와 동시에 조용 ㅡ 해진 거실 안.

"골치 아프니까 시끄럽게 떠들지 마. 알았어?"

살벌한 놈의 어조에 한참동안 언성을 높이던 두사람은 언제 그랬냐는듯 침묵했다.

역시...놈의 파워는 만인이게 다 통하는 구나....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거실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사람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놈은 피곤하다는듯 재킷을 벗어 소파 위로 던지고는 차갑게 말했다. 

"20분 내로 씻고 올테니까 그 사이에 둘이서 깨끗하게 해결해. 그리고, 큰누나. 나 누나 때문에 

오늘 중요한 약속까지 취소했어. 그러니까  더 이상 피곤하게 하지 마. 알지?" 

끄덕끄덕.

놈이 누나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나까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좋아. 그리고 너."

"네?"

뒤돌아보며 건넨 놈의 말에 나는 네? 하고 눈을 크게 떴다.

"누나들한테 커피 좀 타줘. 난 샤워하고 이십분 뒤에 나올테니까."

나는 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깨달은 것은 저 두 여자들은 놈의 누나라는 것.

(전처가 아니고! ) 그리고 아마도 저 두사람은 쌍둥이라는 것.  

“아아…정말 다행이야.”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ㅠㅠ

앞으로 닥쳐올 난관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야채박스를 뒤지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모든 작가분들 화이팅!! 멋진 소설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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