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 <19>
꿈을 꾸었다.
언제였었나……그다지 오래지 않은 기억인데…..
꽃무늬 벽지…..?
아….신림동의 그 지하 단칸방이다…….
저 벽지….처음 이 방으로 이사오던 날 내가 손수 사서 바른 거였지….
이사하던 그 날도 성도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바람에 내가 밤새 혼자서 다 했었는데.
두서없이 떠오르는 어지러운 생각들 사이로 어디선가 희미하게 라임향 셰이빙 로션의 향기가 났다.
….라임향? …..성도가 라임향을 썼었나?
…….뭐 어쨌든…..
나는 몸을 뒤척이며 잘 움직여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에 턱을 약간 치켜든 채 거울을 보며 셔츠의 단추를 채우
고 있는 키 큰 남자의 뒷모습이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아…..저건…..성도다…..
……또 오전 출근인가…..지난 밤에도 새벽에 들어와놓고.
나는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성도는 부쩍 새벽녘에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다. 말로는 클럽의 뒷청소
를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밤마다 지하의 나이트 클럽 직원들과 포커를 치고
다닌다는 소문을 나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치만 별로 그런 걸 뭐라고 하려는게 아니고…..
….나 혼자서는 쓸쓸하니까…..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 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시야는 조금도 맑아지지가 않았다.
……이상하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나는 이제는 단추를 다 채우고 타이를 매기 시작하는 남자의 뿌연 형체를 바라보다 의아한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히 눈 앞에 보이는데도 시선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기만 하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그런건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을 더 거울 앞에 서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또 있다.
언제나 셔츠를 입을 때면 휘파람을 부는 내가 질색하는 그 버릇이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저 머리…. 뒤에만 노란색 물을 들여 기르는 바람에 맨날 싸우곤 했었는데….
언제 저렇게 뒷덜미가 드러나게 깨끗하게 잘랐지?
꿈결처럼 나른하기도 하고 조금 둔중하기도 한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 돌아보았다는 건 내 생각 뿐인지도.
“깼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다정한 목소리.
내가 어…하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자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이마를 쓸어올렸다. 못이라고는 하나도 박혀있지 않은, 촉감만으로도 길쭉하고 모양좋은 손
가락의 느낌은 여느 때와는 몹시도 틀린 것 같았다.
보통 때는 돈을 달라고 누워있는 나를 발로 툭툭 걷어차거나 셔츠가 제대로 다려져 있지 않
다며 한바탕 짜증을 내곤 했는데. 오늘따라 성도는 몹시 이상하다.
“….헤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뭔가 기분이 좋아져 나는 가만히 웃었다. 그러자 이마를 쓰다듬던 손
이 뺨 근처에서 멈추었다.
“왜?”
“돈…..없어서 그러는 거지?”
“응?”
내 말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순간 닿을듯 말듯 어렴풋하던 라임향
이 조금 더 강해졌다. 비누향이 살짝 섞인듯한, 산뜻하고 기분좋은 체취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돈….없으니까….달라고 그러는 거쟎아.”
베개에 파묻혀 웅얼거리는 내 말에 그가 하하, 하고 낮게 웃더니 내 머리 위에
양팔을 짚은 채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내가 너보다 천배쯤 더 돈이 많을텐데?”
…그런가…….?
“….어젯밤에 포커해서 그렇게 많이 땄어?”
“응?”
아 참. 그건 비밀이었지.
아래층 미스양이 나한테만 살짝 알고있으라고 가르쳐 준 거였는데!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잠결에도 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 것도. 나 졸려…..”
“그럼 더 자.”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말만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
만 침대가 출렁 하고 움직이는 느낌에 나는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셔츠자락을 움켜잡았다.
“….왜?”
“…..오늘은….일 안 나가면 안돼?”
내 말에 그가 눈에 띄일 정도로 동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 자세에서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는 것도 아니고 사물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을만큼 시야가 맑은 것도 아니었
지만 내게는 왠지 그 동요가 손에 잡힐 듯 확실하게 와 닿았다.
역시 싫은 거겠지.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로 한 번도 나와 같이 있어준 적은 없으니까.
우리는 서로가 사랑해서 함께 사는게 아니고 단지 쓸쓸하고 외롭기 때문에 같이 있는 것 뿐이니까.
“왜?”
“……쓸쓸해서.”
"쓸쓸해?"
"....응."
나는 솔직하게 대답해 버렸다.
평소같으면 이런 말은 잘 하지 않을테지만 오늘의 성도는 평소때보다 훨씬 다정
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혼자 있는 건 너무 쓸쓸해서 네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 너 아닌 다른 누구라도.
내 마음속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대답대신 그는 시트 위로 몸을 숙여 감은 내 눈 위에 얼
굴을 댔다. 속눈썹 위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가벼운 입술의 촉감이 묘하게도 현실적이었다.
지난밤 싸우다말고 <너같은 건 어디서 죽어버려도 찾아올 부모형제 따위 없쟎아?> 라면
서 나를 울게 만들었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 예기치않은 상냥함에 나는 바보처럼 몹시도 행복해져서 그의 몸에 팔을 감고 바싹 매달렸
다. 순간 그의 몸이 가볍게 경직됐지만 그는 이내 긴장을 풀고 내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내 옆
에 누웠다. 한숨처럼 부드럽고 엷은 키스. 분명히 꿈속일텐데도 뺨에 닿는 셔츠깃에서는 언제나
처럼 짙은 담배향 대신 잘 마른 햇볕의 냄새와 가벼운 섬유린스 향기가 풍겨와 나는 포옥
기분좋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안에서 둥글게 몸을 말았다.
아아….기분좋다…..
들릴듯말 듯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이라도 좋아.
그가 언제나 이렇게 다정하다면.
깨어나면 슬플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행복하니까.
……….그치만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
*
제6장: 행복은 저 하늘 너머
콰당 ㅡ
“어?”
나는 바닥에 누운 채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값비싼 꽃무늬 그라데이션 벽지의 천장.
어라….뭔가 이상한데?
그제서야 나는 목과 등 뒤에 닿는 푹신한 카펫의 촉감으로 내가 침대에서 떨
어져 상반신부터 거꾸로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우우우….”
어쩐지 팔, 다리, 허리, 목까지 삭신이 안 아픈데가 없더라니!
나는 누운 자세에서 간신히 몸을 뒤틀어 카펫 위에서 떽떼구르 반바퀴 구른 다음에야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우처럼 몸을 구부린 채 어깨를 주먹으로 팡팡 두들기다 저
만치 발치를 보니 어젯밤 내가 덮고 잤던 러그가 반으로 접혀서 구석에 던져져 있었다.
……맞아! 그러고보니 나 어젯밤에 분명히 바닥에서 잠들었었는데?
“이 자식!”
간밤의 상황이 기억난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황망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시트가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넓은 침대 위는 창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만 가득할 뿐 싸늘하게 비어 있었다.
맞은편 붙박이장이 활짝 열려 있는 걸 보니 놈은 벌써 옷을 입고 나간 모양이었다.
벽시계를 보니 오전 6시 30분.
평소같으면 벌써 일어날 시각이긴 하지만….가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자다말고 침대로 기어올라갔나?
놈이 갑자기 없던 친절을 발휘해서 잠든 나를 침대 위로 옮겨줬을리도 만무하니 놈이 잠든 사이,
아니면 놈이 일어나서 나간 후에 나 스스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고 하는 얘긴데?
“….우우. 쪽팔려어….”
사태가 어떤지 대충 감을 잡은 순간 나는 목덜미까지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안봐도 번하다. 불편
한 잠자리는 참지 못하는 내가 밤새 뒤척거리다 잠결에 침대 위로 올라간게 분명하다. 뭐 놈이 있는
데 옆자리로 파고 들어갔는지 놈이 나간 후에 기어 들어갔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생각해보니 무지
쪽팔리는 상황아냐!
분명 놈이 나보다 먼저 일어났으니 내가 침흘리며 자는 얼굴까지 다 봤을텐데.
게다가 어디 그것뿐인가. 간밤에 무슨 꿈을 그렇게 파노라마로 꿨던지 잠결에 뭐
라고 중얼중얼 잠꼬대까지 요란하게 했을지도…..
“아아…그만! ”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이 달아올라 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카펫위에 주저앉았다.
간밤에 무슨 배짱으로 이 방으로 들어와 미친척하고 놈의 발치에서 잠들었는지 몰라도
날이 새고 해가 뜨고 나니까 이보다 더 쪽팔릴 수는 없지 않은가.
“….흑. 그냥 거실에서 잘 걸.”
난 항상 저지르고 난 뒤에 후회한다니깐.
그나저나 놈은 이미 이 방에 없는 것 같으니까 재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보자.
뛰어난 순발력(?)으로 상황판단을 끝마친 후 나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 발치에 밀
려난 러그를 집어서 흔적없이 제자리에 깔아둔 후 사사삭 날렵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왔다. 가는 도중에 놈과 부딪칠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놈은 그림자조차 비치질 않았다.
거실에도 어젯밤 내가 던져놓고 간 과일접시만 그대로 놓여있을 뿐, 집안은 평소처럼 쥐죽은듯 조용했다.
……다들 자나?
성욱의 누나들이 생각나 이층쪽을 기웃거려봤지만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긴 어제 밤늦게까지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늦게 일어나는게 당연하지.
차라리 잘됐다. 이 틈에 재빨리….
그런 생각을 한 것과 동시에 나는 한달음에 식당으로 달려가 싱크대의 물을 틀어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서 서둘러 앞치마를 찾아 입었다. 등 뒤에서 앞치마끈을 단단하게
리본모양으로 묶고나니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게….
난 역시 가정부 체질인가봐.
중얼거리면서 나는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낸 다음 가스렌지를 켜고 달궈진 후라이팬에
정확히 짝 소리를 내며 깨뜨려 넣었다. 그 다음 재빠른 동작으로 장식장 안에 넣어두었던
핫소스와 접시, 은식기를 꺼내 테이블 셋팅을 한 다음 렌지 앞으로 가 후라이팬 위의 달걀을 다
시 한 번 뒤집었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달걀이 익어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싱크대 아
래를 열어 믹서기를 꺼내 전날 씻어둔 키위며 딸기, 얼음을 한데 섞어 갈다가 적당히 설탕을 첨가하면
이제 준비완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치마에 손을 슥슥 문질렀다.
이제 슬슬 내려올 시간들이 됐는데….뭐 아무리 얄미워도 아침은 먹여 보내야 하는 거 아니겠어
. 분명히 놈이 오늘 돌아가라고 했으니까 아침을 먹으면 알아서들 출발하겠지.
오늘 아침의 일을 생각하면 놈의 얼굴을 보기가 좀 쪽팔리기는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뭐 자고 싶어서 거기서 잤나? 잘 데가 없으니까 그랬지.
한가지 문제를 가지고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정말 타고난 낙천가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일전에 한 번 말한 바 있듯이 아무리 고민해봤자 해결되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속을 끓여서 뭐해. 게다가 놈 앞에서 쪽팔린 일이 어디 한 두번이었나?
아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다 익은 달걀을 접시 위에 올린 다음 나는 기분좋은 얼굴로 가스렌지 앞에서 돌아섰다.
그런데 그 순간,
“난 완숙은 딱 질색이야.”
“엄마야!”
나는 깜짝 놀라 한 손에는 지글지글 끓는 후라이팬을, 다른 한 손에는 달걀 프라이가
담긴 접시를 동시에 떨어뜨릴 뻔 했다가 가까스로 붙잡고서는 숨을 헉헉 몰아쉬며 식탁 끝
쪽을 응시했다. 거기에 서있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네글리제에 나
이트캡까지 쓴 아슬아슬한 차림의 초미인(초미인) 강세련양. 분명히 맨얼굴인데도 눈에서
반짝반짝 광채가 나고 입술도 새빨간게 이젠 예쁘다기보다 괴기스러울 정도였다.
아니 그런데 이 여자가 도대체 언제 와서 앉아 있었지? 방금 전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낼 때
까지만 해도 분명히 없었는데?
“까, 깜짝 놀랐쟎아요!”
“왜? 내가 유령이라도 돼?”
냅다 소리치자 완벽한 아몬드형의 눈을 치켜올리며 그렇게 말하더
니 우아하게 의자에 앉아 식탁위의 냅킨을 무릎 위에 편다.
“배고파. 밥 줘.”
그 잠옷이나 좀 어떻게 하고 올 것이지. 자기가 무슨 마릴린 몬로도 아닌데
팔을 들 때마다 속살이 비치는 가운을 그렇게 보란듯이 입고 다녀야겠냐!
내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오늘이면 간다는 생각에 말없이 그 앞에 주스잔을 내
려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이층 복도의 계단이 울리더니 비틀비틀 하
며 사람의 인영이 하나 걸어나왔다.
“아우우 ㅡ 머리 아파아 ㅡ ”
헉! 저, 저건 도대체 누구야?
나는 깜짝 놀라 들고있던 접시를 꽉 움켜쥐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겉모습을 보아하니 어제 본 성욱이놈의 작은 누나가 분명한데?
그러나 어제의 그 산뜻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잠에서 덜 깬듯한 부스스한
얼굴에 산발을 하고 파자마 한쪽은 발목까지 걷어 올라가 있어 꼭 어디서 싸우다
나온 사람같았다.
쿵 ㅡ
“아야야야.”
거기다 식당턱에 부딪쳐서 바닥으로 나뒹굴기까지!
“괘, 괜챦으세요?”
“아우우 ㅡ”
“내버려둬. 쟤 저혈압이라서 아침엔 원래 그래.”
내가 얼른 달려가서 부축하려 하자 딸기쥬스를 마시고 있던 강세련이 언제
싸웠냐는듯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래도,
“저, 커피 드릴까요?”
“응, 응, 아무거나.”
정신없이 중얼거리더니 또 쿵하고 식탁에 머리를 박는다.
“우왓! 조심하세요!”
“아아, 괜챦아. 괜챦아.”
부딪힌데가 새빨간데 괜챦긴 뭐가 괜챦아욧!
“얼굴 좀 들어보세요. 괜챦아요?”
내가 식탁 위에 쳐박힌 작은 누나의 얼굴을 살펴보려고 할 때였다.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작은 누나의 뒤를 따라 놈이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들고 이층계단을 내려왔다.
어? 그런데 오늘따라 왠 청남색 정장? 거기다 흰 셔츠에 타이까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
늘 결혼식이라도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놈은 완벽하게 성장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한 달이나 같이 살았지만 이런 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놈은 줄곧 <노는
남자>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이렇게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이건 또 뭔가가 신선했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돼.
오늘 아침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내가 조금 넋을 잃고 있던 사이 두사람은 놈을 보고 차
례로 아침인사를 던진다.
“성욱아 좋은 아침!”
“아아 ㅡ 성욱이 내려왔니?”
나도 질 수 없지!
“안녕하세요.”
세 명이 한꺼번에 아침인사를 하니 식당안이 금새 시끌벅적해졌다. 익숙치 않은 소란스러움
에놈은 이마를 찌푸리더니 털썩 식탁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세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새벽에
배달된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저, 커피 드릴까요?”
“아니.”
“나 줘.”
“아, 나도 한 잔.”
나는 얌전히 두사람 앞에 커피를 따라 내밀고 휴우, 하고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 힐긋 세사람의 동정을 살펴보니 성욱의 작은 누나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커피잔을 입에 물고있고
강세련은 성욱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왠지 짜증스러운듯한 놈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열심히 신문을 같이 읽고 있었다.
“더워. 옆으로 가.”
“얜. 한겨울에 덥기는 뭐가 덥니?”
“옷을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니까 그렇지.”
“내가 뭐 하루이틀 이렇게 입니? 난 원래 이런 옷밖에 없어, 얘.”
역시…
놈의 면박에도 꿈쩍않는 걸 보니 제멋대로인 것도 집안 내력인가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토스터기 안에 식빵을 집어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는 사이
에도 강세련은 계속 놈에게 말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성욱이 너 셔츠 어깨부분이 왜 그렇게 구겨졌어?”
“몰라.”
그녀의 말에 놈은 자신의 어깨부분을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신문의 사회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말에
나도 덩달아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런데 정말 강세련의 말대로 놈의 셔츠 오른쪽
어깨부분이 구깃구깃해져 있는게 아닌가.
마치….누군가가 얼굴을 대고 문지른 것처럼.
“정말이네? 성욱아. 여기 젖은 자국까지 있는데? 물 흘렸어?”
“아니.”
작은 누나의 말에 놈은 귀찮다는듯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식탁 한가운데의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
러자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었다.
“성욱아. 내가 해줄께. 피치 크림이지?”
“아냐. 내가 해줄래.”
“시끄러.둘 중 아무나 해.”
소란스럽지만 다정한 분위기.
냉정한듯 보이지만 두 누나들을 대하는 놈의 태도에도 알게 모르게 온기가 깃들어져 있었다.
가족….이라는 건 저런 거겠지.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져 나는 식탁에서 조금 떨어진 다이닝 테이블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서 가만히 토스트를 찢어 입에 넣었다.
조금 탄 듯도 했지만 이미 맛 같은 건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힐긋 식탁쪽을 보니 세사람은 뭔가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집을
부리는 것은 아마 큰누나인듯. 놈이 마침내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하고 있는 것을 나는 조금 쓸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부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은 빨리 포기하는데 이력이 붙은 나였지만 그래도 저런 풍경은 익숙치 않아 가슴이 저리다. 가족이라
는 것을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무의식중에 나도 저런 풍경속에 낄 수 있기를 항상 바라고 있었
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간밤에 그런 꿈을 꾼 건가.
생각해보니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성도를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런 꿈을 꿨을까……
나.... 뭔가 불안해 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빵을 물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나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놈의 얼굴.
어….?
“나가자.”
당황한 나는 아랑곳없이 놈은 한 팔에 겉옷을 걸치고 그렇게 말했다.
“어, 어딜요?”
“가보면 알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나는 놈에게 한쪽 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야, 야! 아침밥 먹다 말고 어딜 가는 거야!
야!
모든 작가분들 화이팅!! 멋진 소설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