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신데렐라<21>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햐아아....
"진짜 열두벌이야....."
나는 믿을 수 없다는듯 중얼거리며 침대 위에 펼쳐진 색색의 옷들을 바라보았다.
내거라기에 들고오긴 했지만
그 푸른색 스웨터를 선두로 해서 하얀색 패딩, 연회색 모직바지, 베이지색 더플코트, 크
림색 터틀넥, 밝은 오렌지색 후드 티셔츠, 소라색 니트, 흰색 후드 반코트등등.
"이, 이 정도면 한 오 년은 거뜬히 날 수 있을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옷들을 처음 가져왔을 때처럼 택도 떼지않은 채 고이 잘 접어 쇼핑
백 속에 넣어 옷장 구석에 잘 넣어두었다.
아까는 당황하는 바람에 미쳐 그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저 스웨터 하나만도 40만원씩 하는
건데....그런 게 열두벌씩이나 된다면...최소한....사,...사,...
.....생각하지 말자. 심장 떨리니까.
나는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옷장문을 달칵 소리나게 닫았다.
뭐 놈의 옷이 워낙 많아서 그 안에 있는 저 쇼핑백은 잘 눈에 띄지도 않겠지만.
살아 생전 저렇게 값비싼 옷을 다 갖게 될 줄이야.
놈은 선물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생일도 아니고 친하지도 않은데 저런 걸 받기는 좀....
"다시 돌려줄까...."
그치만 아까 차에 타기 전에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까지 했단 말야.
돌려 줄려면 진작에 돌려줬어야 했는데.
난 꼭 저지르고 난 뒤에 후회한단 말야. ㅡㅡ;;
"그치만 이 옷 너무 맘에 드는데...."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옷장문을 다시 열어 그 속에 쭈그리
고 앉아 쇼핑백 맨 위에 들어있던 스웨터를 만지작만지작거렸다.
햐아, 무지 부드럽다아....
내가 눈을 감고 얼굴에 댄 스웨터의 촉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였다.
별안간 문이 콰당, 하고 열리더니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보경씨 왜 거기 들어가 있어요?"
깜짝 놀란 내가 옷장 안에서 후닥닥 기어 나오자 은색 리본이 묶인
작은 상자를 들고 들어오던 작은 누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에...그냥, 옷정리 좀 하느라구요."
"아아, 그랬구나. "
대충 둘러댔는데도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
더니 아, 이리 와봐요. 하고 내 손을 끌어당겨 침대에 앉힌다.
"자, 이거."
"이게....뭔데요?"
나는 내밀어진 상자를 보고 조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열어봐요."
"...?"
"얼른."
그녀의 재촉에 나는 머뭇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세, 세상에...!
"맘에 들어요? 아까 백화점에서 보경씨 생각나서 샀어요."
"이, 이건...."
"보메 메르시에의 <캣 워크 스틸>이에요. 우리 성욱이도 하나 갖고 있죠.
내가 보경씨가 있는 걸 알았으면 프랑스에서 나오면서 선물을 사왔을텐데. 미처
준비를 못해서 미안해요. 조금 약소하긴 하지만. 받아줄거죠?"
약소하긴...이 으리으리한 백금시계가 어디가 약소하단 말입니까...!!!
거절해야 돼. 이렇게 비싼 것을...!
"저, 그게..."
차마 입이 열리질 않아 내가 망설이자 작은 누나는 다른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맘에 안 들어요? 그러면 다른 거로 바꿔다 줄까요?"
"아뇨. 그게 아니구요!, 어, 저기..."
"됐어요. 그럼."
그러더니 흐뭇한 얼굴로 내 손을 꼭 잡는다.
"저기요 보경씨. 이제껏 내 직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거든요?"
"....."
"보는 순간 난 알았다니까. 후후, 힘내요. 보경씨."
수수께끼같은 말만 남겨놓고서 작은 누나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무슨 뜻이지 그건....
보는 순간 알았다니, 뭘?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나는 문득 아직도 손에 쥐어진 상자를 깨닫고는 헉, 하고 뒷걸음질쳤다.
어쩌지....이것도 엄청나게 비싼 것 같은데....
순식간에 고민이 두 배가 되었다....ㅡㅡ
바보같은 나...ㅠㅠ
"일단은 그냥 잘 놔두자..."
시계케이스가 무슨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면서 나는 케이스를 아까 옷이 들어있던 쇼핑백 맨 위에 잘 올려놓았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선물한 거지?
무진장 기쁘기는 하지만....역시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돌려줘야겠다.
생전 처음 받은 선물인데. 돌려줘야 하다니.
아쉽지만 말야.
*
*
*
"라라라.라라라"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무릎을 꿇고 앉아 테라스와 거실 사이의 문틀을 걸레로 싹
싹 문질렀다. 그렇쟎아도 매일매일 닦으니까 깨끗한 테라스지만 오늘따라 더 새하
얗게 반짝이는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하다.
“락스를 풀면~ 문틀이 반짝반짝~ ”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지만 뭐 어때. 나만 즐거우면 됐지.
문틀부터 시작해서 거품이 이는 물로 테라스의 타일을 문지르고 마른 걸레로 물
기를 싹 닦아낸 다음 전날 내다놓은 화초를 햇빛이 비치는 안쪽 거실에 들여놓으면 테라스 청소는 대충 끝이 난다.
“자, 그럼, 이제는 거실을….”
물에 젖은 옷소매를 대충 걷은 다음 나는 거실 한 구석에 놓아두었던 스프레이 광택제
를 찾아 마룻바닥 위에 듬뿍 뿌렸다. 처음에야 요령이 없어서 한 번 닦기 시작하면 세시간
이고 네시간이고 끝이 안났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숙련된 솜씨로 한시간이면 완벽하게 해치운다.
“후훗. 역시 난 베테랑이야.”
아무도 듣지않는 자화자찬까지 해가며 엎드려서 빙글빙글 거실을 닦다보니 나는 어느새
놈의 방으로 통하는 복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 백화점에 다녀온 뒤 놈은 피
곤하다며 차를 마시자는 누나들의 제의도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지.
그리고는 두시간 내내 감감무소식.
……..자나?
나는 잠시 주위의 동향을 둘러보다 슬슬슬 낮은 포복자세로 기어가 문틀을 닦는 척하며 놈의
방문에 귀를 바싹 갖다댔다. 하지만 이 집의 캘리포니아 목재인지 뭔지가 방음이 얼마나 완벽
한지 방문 너머에서는 개미새끼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점심도 안 먹어놓구선….”
가뜩이나 위도 나쁜 놈이 저러니까 속이 안 좋지.
중간에 한 번 깨워서 죽을 먹일까?
내가 유치원생 아들을 둔 엄마처럼 안 먹는다는 밥을 일일이 억지로 쫓아다니며
먹일 처지는 아니지만 말야 그래도 사람이 같이 살면서 그렇게 무관심하면 안되는 거라구.
뭐 이건 내가 아까 놈한테서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하고는 전혀, 절대로, 관계가
없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순수한 동거인으로서의 관심일뿐이라니까.
(그렇게 강조하는게 더 수상해. 보경양….ㅡㅡ;;)
‘그나저나 얼굴이나 어떻게 봐야 한 번 말이라도 건네보지. 이건 죽었는지 살았는지 원…..’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방문 앞을 기웃거렸을 때였다.
갑자기 등골을 울리는 심상치 않은 인기척과 함께 쾅 ㅡ 하고 문이 열리더
니 순간적으로 눈앞이 번쩍했다.
“아야야야 ㅡ”
아이고. 눈앞에 별이 막 반짝이네.
“뭐야, 너 왜 방문 앞에 있어? 인기척도 없이!”
방문에 부딪혀서 복도에 나뒹구는 나에게 놈은 화가 난듯 버럭 소릴 질렀다.
그건 내가 할 소리란 말야. 너야말로 왜 소리도 안 내고 걸어오냐?
“그, 그게…”
내가 아직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놈은 얼굴을 확 찌푸리더니 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싸쥐었다.
“손 치워! 어디 안 부러졌나 보게.”
으윽, 가뜩이나 낮은 코 완전히 평면되겠다.
얼굴을 가린 손을 억지로 치운 놈은 내 코를 살펴보더니 다시 버럭 소리쳤다.
“피 나쟎아!”
아유, 깜짝이야.
나는 그 즉시 질질질 놈의 방안으로 끌려들어가 침대에 턱하니 던져졌다.
나쁜 놈. 아파 죽겠는데 좀 살살 다루면 안되냐!
“너 꼼짝말고 거기 누워있어!”
야. 꼼짝하라고 해도 아파서 못 움직이겠다.
놈은 대충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들어 내 얼굴에 대주더니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며 명령하고는 다시 방 밖으로 사라졌다. 얼굴에 와닿는 이 황홀한
촉감으로 미루어보아 이건 틀림없이 놈의 값비싼 실크셔츠.
이 자식! 핏자국 빼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걸로 코피를 막냐!
나는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희미하게 라임향이 나는 놈의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 그딴 생각들을 하며 인상을 썼다. 놈이 나가면서 문을 덜 닫고 나갔는지 쿵쿵
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놈의 목소리가 온통 집안을 울렸다.
<누나! 누나! 얼음 어딨어! >
<갑자기 얼음은 왜?>
<글쎄 어딨냐니까! 아, 그리고 구급상자 어딨지?>
<니 집인데 니가 알지 우리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데?>
다시 쿵쿵쿵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리고 얼음을 가득 채운 샴페인통과 흰
타월을 손에 든 놈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 뒤를 잇는 시끄러운 목소리들.
“어디 봐. 피 많이 났어?”
“어쩐지 덜렁거리더라니. 뼈가 부러진 건 아니지?”
아아…저 목소리들을 들으니 머리가 막 흔들리는 것 같아.
욱씬욱씬 통증이 일기 시작하는 콧날에 얼음을 싼 타월이 와닿는 차가운 감촉
을 느끼며 나는 아픔에 눈을 꽉 감았다.
“고개 너무 들지 마. 기도로 피가 넘어가면 안 좋아.”
그 정도는 나도 잘 알아.
내가 성도 그 자식한테 맞아서 코피 터진게 어디 한 두번인가. 한 번
은 부러진 이가 목으로 넘어가 질식사할 뻔한 적도 있었다구.
뭐 지금은 다 지난 일이라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내가 아무리 겁이 많아도 성도랑 같이 살 때는 싸우다가 두들겨 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입안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할 말은 하고 살았는데 왜 이 놈 앞에만 서면
고양이앞의 쥐처럼 숨이 턱 막히고 말이 안 나오는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가린 타월 사이로 놈의 옆얼굴을 슬쩍 올려다 보았다.
놈은 화가 난 건지 걱정스러운 건지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침대옆에 앉아 구
급상자에서 꺼내온 <응급처치 요법>이라는 소책자를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까….왠지 가슴 속에서 뭔가가 뭉클해지는게….
“야, 얘 눈이 풀린 거 보니까 사태가 심각한가봐.”
"그 정도는 아닐거야."
"아냐. 정말 이상하다니깐?”
하여튼….강세련은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니까.
수선스럽게 이마를 짚어오는 손에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하며 눈을 감았다.
“조용히 해. 얼굴 찡그리쟎아.”
“붓기가 안 가라앉으면 어떡해. 병원가서 엑스레이 찍어봐야 하는 거 아냐?”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아. 최소한.”
그렇게 말하며 놈은 다시 얼굴을 가린 타월의 한쪽을 조심스럽게 들어 콧날 근처를
가만히 만졌다. 콧날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길고 감각적인 손가락의 촉감.
나는 다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긴장시킨 채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우웃! 어떡해!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 같애!
남이야 토마토처럼 얼굴이 시뻘개지든 말든 놈은 무슨 희귀동물 해부라도 하
는 것처럼 콧날을 여기저기 세밀하게 만지작거리더니 뼈가 부러진듯한 징후
가 없자 안심했다는듯 다시 얼음을 싼 타월을 내 얼굴 위에 올려놓았다.
“몇시간만 누워있으면 통증은 가라앉을거야. 멍은 좀 남겠지만.”
우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냐….
아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제대로 엿듣지도 못하고 …..
난 몸이 잽싸지못해 큰일이라니까.
그 옛날 배고프던 시절에도 어설픈 도둑질 하나 제대로 못해 맨날 진이형을 고생시키더니
그나마 놈이 방문 앞에서 뭐하고 있었냐고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놈이 주는대로 순순히 약을 받아먹고 나서 눈을 감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성욱아.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하다 얼굴을 부딪친 거야?”
“그러게. 설마 만화처럼 막 문앞에 다가간 순간 니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것도 아닐테
고.” 하며 두사람이 의아한 어조로 놈에게 묻는 게 아닌가.
뜨아아아 ㅡ 이걸 어째!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내가 당황해서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차키와 함께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놈의 핸드폰이 타이밍도 좋게
디리리링 ㅡ 하면서 울리기 시작했다.
“네. 강성욱입니다.”
내키지 않는다는듯 전화를 받은 놈은 네, 네, 하는 짧은 대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상대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럼 제가 지금 가죠. 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 너 어디 가는 거야?
“성욱아 지금 나갈 거야?”
“응. 좀 급한 일이 생겨서. 갔다올테니까.”
놈은 두사람에게 그 말만 남기더니 붙박이장에서 겉옷을 꺼내 입지도 않고 급하다는
듯 나가버렸다. 뭐 그 위기의 순간에 핸드폰이 울려서 구해준 거는 고맙지만 말야, 내가
이렇게 아픈 상황에서 어제 처음 본 사람들이랑 뭘 어떻게 하라고 나 혼자 버려두고 나가는 거야!
하지만 그런 내 마음 속의 절규는 곧바로 놈이 나간 방문을 보며 두 누나들이 나누는 대
화내용에 밀려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쟤 또 학교가는 거지? 그렇게 공부하고 지겹지도 않나?”
“요즘도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산대쟎아. 저번에 베니스에 여행가서도 호텔방에서 하루종일 책만 읽더라.”
“나중에 교수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저렇게 미친듯이 공부만 하는 거야?”
“죽을 때까지 공부만 한대쟎아. 저번에 위장경련으로 실려간 것도 밤새우다 그런 거래.”
“내 동생이지만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니까.”
저…여보세요?
방금 그 대화는….설마….
나는 누운 채로 그 대화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보고 있다가 그만 오싹해졌다.
그러니까 뭐야. 설마 놈이 그…학생….이란 얘기는 아니겠지?
일반적으로 학생이란 건 두꺼운 뿔테안경에…낡은 쌕 가득 들어있는 책…. 유행
엔 전혀 신경쓰지 옷차림의 대명사….아닌가? (70년대 사고방식의 황보경 ㅡㅡ)
그런데 뭐야! 학생이라니? 놈이? 매일매일 칼날같이 새로 다린 셔츠만 입고 다니는
호스트바 출신의 제비 뺨치는 저 놈이?
그럼 그동안 나는 매일매일 도서관에 나가는 놈을 위해 그렇게 죽어라고 셔츠를
빨고 다림질을 하고 세탁소에 다니느라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단 말인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지구가 두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난 믿을 수 없어. 나이트클
럽 사장이라면 또 몰라도 학생이라니 학생이라니! 그것만은 절대 믿을 수 없어!
내가 갑자기 알게된 청천벽력같은 사실에 격분하고 있는데 두사람은 태연하게 그
런 대화를 나누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너 배고프지 않니?”
“글쎄. 왜. 배고파?”
“응. 식당가서 뭐 좀 가져올 테니까 얘 좀 보고있어.”
“알았어.”
“저기…..”
간식은 냉장고옆 간이식탁위에 올려놨구요 빵은 오븐속에 들어있어요!
먹을 거 찾는다고 식당 막 어지럽히면 안되요!
그 와중에도 나는 방을 나가는 강세련이 성격대로 식당안을 엉망으로 어지럽힐까봐 걱정이 되서 침대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어머. 아픈데 왜 일어나요? 걱정하지 말아요. 알아서 찾을 테니까.”
알아서 찾을까봐 더 걱정이 되는 거라구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억지로 만류하며 작은 누나는 놈 못지않게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다시 침대위로 눕혀놓았다.
“지금 일어나면 현기증나서 안되요. 더 누워 있어요.”
“저…”
“왜? 할 말 있어요?”
“저….”
내가 말을 못 꺼내고 망설이고 있자 작은 누나는 뭔데 그래요
? 라고 말하면서 내 얼굴을 보고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하지만,
저 놈이 학생이었어요? 진짜로? 란 말은 무서워서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 네. 그래요> 라고 대답하면 어떡해…엉엉….ㅠㅠ
“어머. 얼굴이 창백하다. 누워있어요. 얼른.”
비통한 내 심정을 뭔가 잘못 오해했는지 작은 누나는 그렇게 말
하며 내 어깨에 덮여있던 시트를 목 위에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우리 오늘 오후에 티켓팅하려고 했는데 안되겠다. 성욱이도 없는데 보경씨 누가 돌봐줘요?"
그건 지금 문제가 아니랍니다.
크흐흐흐흑.
정말로 학생이라면 너 진짜 가만 안둘꺼야. 강성욱.
들어오기만 해봐랏!
내가 그렇게 끙끙대며 속으로 분노의 눈물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이것 밖에 못찾겠어. 무슨 냉장고에 먹을만한게 하나도 없니? 우리 성욱이 맨날 굶고사나봐.”
라면서 강세련이 문을 열고 하드롤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그, 그거 내일 아침에 먹을 건데…
재주도 좋아. 그걸 도대체 어디서 찾아낸 거야?
작은 누나는 그런 강세련을 보자마자 나를 가리키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떡하니? 보경씨 더 아픈가봐.”
“그래?”
그 말에 강세련은 바구니를 테이블에 놓고 내 쪽으로 다가오
더니 아까보다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손이나 좀 치워줘요! 갑자기 그렇게 만져대면…창피하쟎아!
아아 나는 놈이 만지는 것에만 반응하는게 아니었나봐.
어떻게 이사람 저사람 돌아가면서 만져대도 다 빨개지지?
“성욱이 없는 동안에 더 나빠지면 안되는데.”
“의사를 부를까?”
두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수근거리길래 나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저…괜챦은데…”
“시끄러. 너 얼굴이 지금 어떤지 알아? 금방이라도 쇼크사할 것 같은 얼굴이라구. 잔말말고 가만히 누워있어.”
그게 누구때문인데 지금!
나는 놈과 똑같이 건방진 어조로 말하며 테이블 옆 소파에 앉아 빵을 뜯는 강세련을 분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치만 그래봤자 눈만 아프지 별 효과도 없어 나는 이내 포기하고 얌전히 누웠다.
놈이 돌아오면 어떻게 복수를 해야하나…란 생각을 하며.
그치만 전에도 얘기했듯이 나는 근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게 문제다.
약기운이 도는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서서히, 서서히…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잠들면 안되는데.
놈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서 그동안 그 수많은 셔츠를 다림질시킨 대가를 받아내야 하는데…..
테이블에 앉은 두사람의 실루엣이 조금 어렴풋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눈을 반쯤 감았다.
흐릿해져가는 의식사이로 두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나저나 별일이네. 성욱이가 그렇게 다정할 때도 있고.”
“그치? 나도 놀랐어.”
“생각보다 쟤를 마음에 들어하나봐.”
어….그거 혹시 제 얘긴가요…?
아직 완전히 잠들지 않은 의식의 어느 한부분이 쫑긋 고개를 들었다.
그치만 다정하다니…어디가?
“설마. 너 생각 안 나? 성욱이 유치원 때 쫓아다니던 여자애한테 돌 던진 적도 있었쟎아.”
작은 누나의 말에 강세련은 손에 들고있던 하드롤을 던지는 시늉까지 하며 말했다.
“하하하하. 맞다. 그렇지 참. 그때 무지 웃겼는데.”
그, 그건 성격파탄자쟎아요…ㅠㅠ
그 말을 끝으로 두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잠시 어…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가 그만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내가 모르는 놈에 대해 더 듣고 싶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뜨고있을 수가 없었다.
언뜻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도 같고
<잠들었어? 자?>
<응, 아까부터 잠든 것 같은데?>
<에이, 뭐야. 시시하게. 하이라이트가 아직 더 남았는데.>
라고 두사람이 속삭이는듯한 목소리도 어렴풋이 들은 것 같지만.
“…어….”
나는 뺨에서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뜬 채 잠시 멍하니 누워있었다.
침대 위로는 창백한 달빛이 한줄기 가느다랗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방 안은 칠
흑같이 어두워 나는 이상하다, 하고 생각을 했다가 뺨에 와닿는 감촉이 사람의 머
리카락과 몹시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것을 만져보았다.
매끈매끈.
어휴, 누군지 머릿결도 참 좋네.
란 생각을 할 때가 아니쟎아! 지금!!! 이게 도대체 누구야!!!
나는 기겁을 하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자고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
해 번개처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나는 직감적으
로 코끝에 와닿는 라임향 셰이빙 로션의 향기로 한 팔을 나에게 두른 채 잠들어 있
는 사람의 정체를 알아냈다.
뭐야, 너 니가 도대체 왜 내 옆에서 자고있는 거얏!
밀어내려 했지만 놈이 어찌나 곤하게 잠을 자고있는지 억지로 팔을 풀면 깨어날
것 같아서 나는 차마 놈을 떼어내질 못하고 엉거주춤 반쯤 경직한 상태로 잠
들어있는 놈옆에 나란히 누워 숨을 죽였다.
아까 분명히 대낮에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제서야 낮의 상황을 기억해내고 더듬더듬 어둠속에서도 손을 올려 코를 만지작
거렸지만 붓기도 그리 심하지 않고 통증도 전혀 없다.
그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되는 상황이야….
놈이 아까 전화를 받고나갔었다는 것만 기억나는데. 그리고 또….
맞아! 너 이자식! 너 학생이라면서!
두 누나들이 나누던 대화가 생각나 순간적으로 잠들어있는 놈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깨울 뻔 했지만 놈이 너무 곤하게 자고있어서 나는 으음…하고 곤란한 신음만
내뱉으며 불편한듯 몸을 뒤틀었다.
조금 있다가 놈이 돌아눕거나 뒤척이면 살짝 풀고 일어나야겠다. 뭐 그 일이야
아침에 추궁해도 늦지는 않으니까.
잠은 자야겠는데 내가 이미 침대에 있으니까 하는 수없이 올라온 모양이지.
그나저나 잠버릇이 도대체 왜 이모양이냐.
내가 아니고 다른 여자면 어쩔거야. (어쩌긴 ㅡㅡ;;)
아마 지금 누구 옆에서 자고 있는지조차 모를 거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놈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다 놈이 뒤척이는 바람에
조금 틈이 생기자 놈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해 슬며시 몸을 빼냈다.
그러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놈이 잠든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달빛 아래 반듯한 콧날과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잠든 상태에서조차 오만하게 보이는 입매까지.
와아, 속눈썹 무지 까맣다아.
나는 달빛에 비친 놈의 완벽한 얼굴에 감탄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지금 빠져
나가야할 상황임을 잊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자세히 놈을 관찰했다.
길지는 않지만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촉촉하고 새까만게 눈밑에 음영이 드리울 정도로 짙다.
깊은 잠에 빠져있으면서도 입조차 벌리지 않고 눈을 감은 것처럼 잠들어있는 모습이라니.
“….어.”
갑자기 뺨 위로 뚝 떨어지는 따스한 눈물에 나는 놀라서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자 그 몸짓을 신호로 후두두둑, 눈물이 연달아 흘러내렸다.
어, 내가 왜 이러지?
마음은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어째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나는 그저 잠들어있는 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이상하다. 아까 부딪친 코가 아직도 아픈가?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은 조금도 그칠 것 같지 않다. 마치 댐이
터진 것처럼 펑펑, 그냥 막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눈물이 난다.
눈물샘이 고장났나봐.
하나도 슬프거나 서럽지 않은 마음으로 나는 어찌할바를 몰라 그
냥 눈물이 흘러내리는대로 내버려두고 잠들어 있는 놈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보니 성도의 잠버릇이 어땠더라.
잠버릇…잠버릇이라….그런데. 성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지?
이상하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당연하지. 육개월이나 같이 살았는데 내가 그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없쟎아.
아니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내가 미쳤나봐.”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고는 그 소리에 놈이 깨어날까봐 흠칫했다.
하지만 놈은 으음, 하고 작게 신음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조금 더 붙이고는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 숨죽인 채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나 네가 깨어나면 너한테 묻고 싶은게 많아.
넌 어째서 나에게 그런 선물을 해준 거야?
나 몹시 기쁘긴 했지만 아직도 네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
이건 내가 단순히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건가?
나랑 같이 살았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해준 사람은 없었어.
그들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지금 너에게 묻고 싶어.
나는 어떤 사람인 것 같냐고. 나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고.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비밀.
푸른 달빛 아래의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