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운의 신데렐라 (136/141)

 비운의 신데렐라 <30>   

“하아…”

나는 휘적휘적 기운없는 걸음걸이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어, 보경아! 왠일이야, 이 시간에?”

아직 영업이 시작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홀 안쪽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진이형이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앞에는 누군가와 함께 마셨던듯 반쯤 빈 맥주잔 두 개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과일 안주가 나란히 놓여 있는게 방금 전 누군가가 왔다 간 모양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영업 전에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 진이형이 왠일일까…하고 생각했

겠지만 연이은 실패에 기가 죽어있던 나는 별다른 이상한 기미도 느끼지 못하고

 털썩 맞은편 의자에 앉아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오히려 아무 일도 없어서 문제지. 어떻게든 놈을 넘겨보려고 갖은 수

단을 다 동원해 꼬리를 쳐봐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는 말을 아무리 진이형이지만

 쪽팔려서 어떻게 해? 그리고 형이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겁없이 그런 시도를 했

다는 말을 해 봐. 진이형 성질에 당장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를 게 뻔하다구.

에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참으며 나는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인

 맥주잔만 멀거니 바라다봤다. 진이형은 아직 그 일을 모른다. 보나마나 반대할게

 뻔하기 때문에 윤아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미리 다짐을 받아놨었다.

하지만…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을 때는 형에게 다 이야기하고 싶은데…  

“성욱이는?”

알게 뭐야. 맨날맨날 늦게 들어오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오겠지.”

거친 내 말투에 진이형이 조금 놀란 눈빛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정말 괜챦은 거야?”

“.그래. 아무 일도 없어.”

나는 진이형의 말에 기운없이 대답햇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뭐.”

“온 세상 고민은 너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이쟎아.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냥 일이 좀 힘들어서 그래. 지겹기도 하고.”

계속되는 추궁에 답지않게 조금 짜증스런 어조로 대꾸했더니 진이형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바닥을 쓸고있던 웨이터를 불러 테이블을 치우게 하더니 술 한 잔 할래? 하고 나를 보았다.

“술?”

“그래. 지난번에 마시다 만 게 어디 있을텐데….”

진이형은 자리에서 일어서 바아로 가 안쪽의 작은 냉장고를 뒤지더

니 맥주 대여섯 병과 과일 통조림을 금새 꺼내 들고온다.

“…뭐야?” 

“마시자. 우울할 땐 이게 최고야.”

“형?”

“남은 게 있는 줄 알았더니 없다. 그냥 새 거 마시지 뭐.”

나는 놀라서 맥주병을 따고 있는 진이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자칫하면 인생 망치는 지름길이라며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게 하던 진

이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형 몰래 마셔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 최근에는 입에 대본 적조차 없는데, 갑자기 왠 술?

“그렇게 노려보면 술이 줄어드냐? 얼른 마셔.”

익숙한 솜씨로 잔 두 개에 맥주를 가득 채우며 진이형이 말했다.

“그치만 형…아직 대낮인데?”

얼떨결에 그 중 하나를 받아들며 물었더니 진이형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기분 

안 좋으면 마시는 거지. 마침 나도 기분 안 좋았는데 차라리 잘 됐다.” 그러면서 자

신의 앞에 있던 맥주잔을 들어 먼저 마시기 시작했다. 

우울해서 찾아오긴 했지만….아니 형이 갑자기 왜 이러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는 사이 진이 형은 벌써 한 잔을 다 마시고 두 잔째의 맥주를 잔에 따르고 있었다.

“형! 천천히 마셔.”

“걱정 마. 이 정도 가지고는 안 취하니까. 술장사는 그냥 하는 줄 아냐? 뭐해. 얼른 마시지 않고.”

“형…괜챦아?”

“괜챦아, 괜챦아. 너도 얼른 마셔.”

진이형의 재촉에 나는 형의 얼굴과 내 손에 들린 맥주잔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잔을 들었다.

꿀꺽, 꿀꺽, 꿀꺽.

“크으 ~”

이렇게 쓴 걸 도대체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세 모금 정도 넘겼을까. 입맛이 너무 써서 나는 반도 못 마시고 잔을 입에서 뗀 채 

있는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이 진이형은 벌써 한 병을 다 비우고 다른 한 병을 따고 있었다.

“형! 진짜 큰일나겠다. ”

마시다가 사레나 들리지 않을까 싶어 나는 얼른 진이형 손에서 맥주병을 빼앗았다.

“그만 마셔. 오늘 영업 안 할 꺼야?”

“괜챦다니까. 하루 쉬지 뭐. 그거나 얼른 이리 줘.” 

“우리, 딱, 한 병. 한 병만 마시자, 응?”

“가만 있어봐. 그거 마시고 내가 너한테 할 얘기가 있으니까,”

“할 얘기는 무슨! 안 마셔도 돼. 지금 얘기해.”

“보경아 그게 말이지, ”

“아이 참, 이건 놓고 얘기하라니까!”

우리 둘이 그렇게 맥주 한 병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입구

쪽 문이 활짝 열리면서 파카차림으로 슬리퍼만 신은 윤아가 얼굴이 빨개져서 나타났다.  

“우웃, 정말 춥다. 형, 나 오늘….어? 뭐야! 두 사람! 나만 빼놓고!”

“오. 윤아 왔구나? 너도 여기 앉아라.”

“한 잔 하는 거야? 그거 좋지이~”

“혀엉!”

내가 소리치자 잽싸게 옆에 와 앉은 윤아가 어허, 하면서 내 손에서 맥주병을

 빼앗아 진이형 잔에 넘치도록 가득 따라 주었다.

“고맙다. 윤아야.”

“형. 나도 한 잔.”

“그래, 그래, 너도 마셔라.”

“보경이 쟨 항상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한 번 쯤은 눈 딱 감고! 괜챦쟎아.”

괜챦긴 뭐가 괜챦아! 이러다 가게는 어떡하려구!

위기감을 느낀 내가 어떻게든 말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두 사람은 이미 주

거니 받거니 하며 무서운 속도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아우, 정말….

놈이 오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저녁도 안 해놓고 나와서….

그나저나 진이형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네.

하는 수 없다. 나라도 정신을 바짝차리고 있는 수밖에.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 사아공~”

“휘익! 보경아! 너무너무 멋져!”

역시 노래는 흘러간 가요가 최고야. 이거 봐. 분위기가 팍팍 살쟎아.

“네! 그럼 저의 또 다른 18번  Q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아~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

“ 야! 황보경! 정신 차려!”

분위기에 휩쓸려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진이형

이 갑자기 내 손에서 숟가락 꽂힌 맥주병을 휙 빼앗아갔다.

에이. 뭐야아~ 한참 신나는데.

“혀엉~ 왜 그래에~ 분위기 조~은데~”

“마자. 보경아. 너! 한 곡 더 불러.”

“윤아 너도 정신차려! 승화한테 전화왔는데 너 슈퍼 간다면서 슬

리퍼 끌고 나와서 말도 없이 이리로 온 거라며! 그 동네 다 뒤졌다더라!”

“아아, 승화아? 딸꾹, 그게 누군데?”

“얘가 진짜!” 

“헤헤헤. 혀엉. 걱정 마아. 우리 하나도 안 취했써.”

윤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방글방글 웃었지만 진이형은 오히려 더 걱

정스런 표정으로 <어떡하냐, 보경이 얘. 취했다, 취했어.> 하면서 홀 안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안 취했다는데 정말 정신없게 왜 그래.

“혀엉…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한 잔 더 하자. 응?”

“도대체 얼마를 마신 거야? 너네!”

“이름도 몰라요 ~ 성도 몰라 ♪”

우리 둘이 나란히 앉아 겔겔거리자 진이형은 내가 못살아 정

말! 하고 소리치더니 냅다 전화가 있는 카운터로 달려갔다.

“어? 형이 오늘따라 이상하다아. 끅! 그치 보경아아.”

“취한 거 아냐?”

“그런가아? 마자, 그럴 수도 있지이. 자 마시자 마셔. 쭈욱~”

윤아가 내민 잔에 쨍그랑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 잔을 부

딪친 다음 나는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캬아~”

“기분 좋다아….그치이…”

“우웅…”

내 옆에서 웅얼거리던 윤아가 갑자기 테이블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야아, 너 취했어? 응? 윤아야아….”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로 어깨를 잡아 흔드는데 등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휙 뻗어나왔다.

“한윤아! 너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어라? 이 분은 한윤아의 흑기사 정승화 님이 아니신가. 기척도 없이 언제 오셨수?

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승화의 놀란듯한 말소리가 들렸다.

“진이형, 아니 이 두 사람 왜 이래요?”

“나도 몰라. 둘이 합쳐 다섯 병도 안 마셨는데 저런다. 그나마 윤아는

 좀 나은 거야. 보경이 봐. 완전 인사불성이쟎아.”

뭐? 내가 뭐라구요?

“얼른 데리고 나가. 보경이도 곧 데리러 올 테니까.”

진이형의 말에 윤아를 무슨 공주님처럼 소중하게 양팔에 받쳐

들고 일어서려던 승화는 네? 누가요? 하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래. 나도 궁금해. 도대체 누가 데리러 오는 건데?

“묻지 마. 그 생각만 하면 골치 아프니까.”

진이형은 손을 내저으며 생각하기도 싫다는듯 인상을 썼다.

“혀엉! 걱정 마아! 나 성도 그 자식이랑 끝났다니까아! 끝이야, 끝. 몰라? 쫑! 디 ㅡ엔드!” 

내가 팔을 들어 엑스자를 만들면서 소리치자 두사람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취했네요.”

“그러게 내가 뭐랬냐.”

뭘 그렇게 수근거리는 거야!

내가 비틀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싸늘한 한기와 함께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응? 왜 이러지?

“형. 보일러 고장났어? 갑자기 왜 이렇게 추워어?”

그러나 아무도 내 말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입을 반쯤 벌린 채 내 등 뒤만 응시하고 있을 뿐.

유령이라도 나타난 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미처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나

는 휘익 하고 그 자리에서 들려 짐짝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척, 하니 걸쳐졌다.

“뭐야아아~ 너어~ 누구얏!”

아무거나 손 닿는대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발버둥치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싸늘하게 나를 위협했다.

“시끄러. 너 바닥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하? 이것 봐라?

“던져! 던지면 될 거 아냐! 그럼 누가 무섭데?”

어깨에 걸쳐진 채 마구 머리를 흔들면서 반항하자 진이형이 기겁을 하며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야! 야! 황보경! 너 왜 이래? 미쳤냐!”

미치긴 누가 미쳤다고 그러는 거야? 진이형도 이 자식이 하는 말 들었쟎아!

가만. 그러고 보니….이 싸가지 없는 말투하며 이 비싼 샴푸냄새하며, 너!

너! 강성욱이짓! 

“오냐. 너 잘 만났다. 야! 너 이거 안 내려놔? 내려놔! 당장 내려놔!”

“얘가 정말! 성욱아 미안하다. 취해서 그러니까 니가 이해해라.”

“취하긴 누가 취했다고 그래? 너 셋 셀 때까지 안 내려놓으면 가만 안 둔다! 하나! 두울!”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며 버둥거렸지만 놈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나를 어깨에

 걸치고는 성큼성큼 홀 안을 가로질러 나왔다.

“안 내려놓는다 이거지! 야! 너가 그렇게 잘났냐? 엉!”

주먹으로 넓은 등판을 쾅쾅치고 짖어대도 놈은 요지부동.

차 안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뒷자석에 던져진 채로 운전하는 놈의 시

트 뒤를 발로 차고 반항해도 놈은 끄덕도 없이 차를 몰더니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자마자 또 나를 뒷자석에서 끌어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어깨 위에 둘러멨다.

“야! 똑바로 안 해? 떨어지면 어떡할꺼야!”

꽥꽥거리며 로비로 들어서는데 경비아저씨가 우리를 보더니 벤자민 화분에 물을 주

다 말고 놀란 얼굴로 후다닥 달려나왔다.

“어? 안녕하세요. 아저씨. 헤헤헤헤~ ”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얼굴이라 반가워서 놈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가며 인사를 

건넸더니 뭐에 놀랐는지 아, 예에…하면서 황급히 달려나가 놈보다 먼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준다.

그런 거 과잉 친절이라니까요 아저씨.

상황파악도 하지 못하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집에 도착한 놈은 쾅 하

고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문을 열자마자 기세좋게 거실로 걸어 들어가 나를 소파위로 집어 던지듯 내동댕이쳤다.

물론 쿠션이 푹신해서 하나도 아프지는 않았지만.

이씨… 그래도 이렇게 세게 집어 던지다니! 죽을래! 

꿈틀거리면서 몸을 확 틀어 소파 위에 길게 드러누운 자세로 위를 보았더니 

화를 억누르려는듯 팔짱을 낀 왠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흥, 그래봤자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야! 물 가져와!”

바락 소리치자 잠시 헛점을 찔린 듯 뭐? 하면서 기가 막히다는 말투로 되묻는다.

“물 가져 오라고! 물! 아주 찬 걸로! 아니다, 아예 얼음을 띄워서 갖고 와!”

“너 정말…!”

“너? 너라니. 너라니! 야. 내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너보다 6개월이나 먼저 태어났

어.  너보다 6개월이나 연상이라고! 그런데 어디다가 대고 반말이야? 너 똑바로 안 할래?”

“……”

“물 가져와! 빨리 안 가져와?”

“갖다주면 될 거 아냐!”

마침내 폭발한듯 놈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런 걸로 기가 죽을 나 황보경이 아니지. 

“갖다 드리겠습니다지! 따라 해!”

“……”

“안 따라 할래?!!”

“……제기랄.”

놈은 들릴듯말 듯 낮게 내뱉더니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휙 돌아서 식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진작 그럴 것이지.

쨍그랑 하고 크리스탈 잔에 얼음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만족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등 뒤에 푹신하게 와닿는 스웨덴제 소파의 촉감이 오늘따라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럽지?

“마셔.”

어느새 다가왔는지 놈이 얼음이 찰랑거리는 차가운 물잔을 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찬물이 입술에 닿는 순간 나는 허기진 아기처럼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물잔을 꼭 잡고 단숨에 들이마셨다.

“햐아….”

몰랐었는데 꽤나 갈증이 났었던 것 같다.

“고맙습니다아.”

예의범절을 최고의 미덕으로 치는 시립 고아원 출신답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놈은 하, 하고 기가 막힌듯이 웃는다.

뭐가 웃기냐!

인상을 쓰며 눈을 치뜨자 놈은 내 손에서 물잔을 빼내 테이블 위에 놓고 명령조로 말했다.  

“….씻고 가서 자. 지금은 취했으니까,” 

“나 안 취했써어.”

“취했쟎아.”

“안 취했다니깐.”

고집스럽게 올려다보며 얘기하자 이마에 손을 짚고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뭔가 심상치 않은 제스쳐.

“가서 자. 안 잘래?”

“싫어! 나 안 취했다니깐!”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니가 어떻게 알아!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끝까지 우기자 더 이상 참을 수없다는듯 버럭 소리를 지른다.

흥! 그러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야! 내가 취하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니가 언제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어?”

“뭐라구?”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말야, 너도 인생, 그렇게 살면 안돼. 알았어?”

화르르륵 ~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놈의 얼굴이 정말 말 그대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술에 취했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어.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다 해버렸지.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그랬다, 왜!”

술기운의 힘을 빌어 간이 배밖으로 나왔는지 나는 눈까지 왕방울만하게 치켜뜨고 소리쳤다.  

“뭐가 안된다는 거야!”

“사람이 말야! 들어오면 들어온다! 나가면 나간다! 말을 해야될 거 아냐! 핸드폰은 

뭐 뒀다 국 끓여먹을 꺼야!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전화번호 여섯자리를 왜 못 눌러!”

“야! 그렇게 기다려지면 니가 먼저 전화하면 되쟎아!”

“이게 진짜. 너 그래서 지금 니가 잘했다는 거야?!”

“…….”

으드득. 대답 대신 어금니 가는 소리.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려는듯 놈은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한참만에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서 자.”

그리고는 말하기도 싫다는듯 복도 안쪽의 자기방으로 향한다.

그래 상대하기도 싫다 이거지? 

나도 이제 지쳤다구. 알아?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혼자서 짝사랑하는 거 이제 지쳤어. 그만두고 싶단 말야!

“흐윽….흐으윽….”

내가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기 시작하자 나를 지나쳐 복도로 가던 놈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엉엉…!”

“뭐야. 너 왜 울어?”

“나, 나 말이야…흑…”

“그래. 네가 뭐?”

놈이 내 쪽을 돌아본 순간 나는 비틀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다가 그만 발

이 걸려 크게 휘청이며 놈의 품 안으로 쓰러져 버렸다. 팔이 닿은 순간, 밀쳐버릴 줄 알

았는데 뜻밖에도 놈은 내 팔을 꽉 움켜잡고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야! 너 괜챦아?” 

“흑흑, 괜챦아. 난 다 이해해. 괜챦아.”

“도대체 뭘 다 이해한다는 거야?”

“흑, 흐으윽, 나. 나 있쟎아”  

나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놈의 셔츠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 니가 아무리 싸가지없고 못되고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난 할 수 있어! 나, 나 꼭 그렇게 할 꺼야. 엉엉…!!!”

“뭐?”

“흐으윽. 난 자신있어. 니가 냉혈한이라도 괜챦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

주의자라도 괜챦아!난 괜챦아! 그러니까…그러니까… 흑, 흐흑..”  

사랑하니까. 널 정말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니가 아무리 차갑고 냉정하

고 나한테 무관심하더라도 난 그런 너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니까.

닿지도 못할 사랑고백이 너무 아쉬워 나는 놈의 값비싼 실크셔츠 앞판

을 온통 눈물로 적셔대고 그것도 모자라 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거실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미치겠네. 정말.”

몇 번 나를 떼어내려다 내가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자 포기한 놈은 나를

 번쩍 어깨위로 들어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는 어디로 옮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지칠만큼 울고 난 뒤라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기운이 없어 나는 

놈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끅끅거렸다.

“흐윽, 흑. 나, 나 잘하께. 나 밥도 자 하고 …래도 잘 하고, 서거지도 자 한단

 말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아…응?...”

우는 사이 사이 눈물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린 말을 놈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접착제라도 붙은 듯 죽기살기로 놈의 어깨에 꼭 달라붙어 절대

로 떨어지지 않았다. 방에 들어가서 침대에 눕혀지는 느낌이 들었어도 필사적으로 놈의 셔

츠를 움켜쥐고 매달렸다. 그 서슬에 놈의 셔츠 앞판이 주욱 뜯겨져 나갔지만 울기에 바빠

 그걸 깨달을 여유따위 절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하필이면 너를 …!”

한 시간이 넘게 그렇게 씨름을 했을까, 마침내 손에 힘이 다 빠져버려 축 늘어진 나를 간

신히 침대에 눕히며 놈이 화난다는듯 그렇게 말했지만….나는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술에 취해 너무 깊이 잠들어 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꿈 속에서도 생각나는 한 마디는. 

사랑해. 강성욱. 아주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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