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스템(4)
태웅이 미쳤냐는 눈빛으로 지호를 쏘아 보았다. 하지만 지호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여기서 포기하고 자살하실 거면 아이템이랑 포션 좀 주고 죽으세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저는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 말고 도망가느니 발악이라도 해 봐야겠으니까.”
퉁명스럽게 말하며 지호는 인벤토리 포켓을 열어 자신이 가진 아이템을 점검했다.
다행히도 외근 나올 때 전투 상황을 대비했기 때문에 가진 아이템은 꽤 많았다. 헌터 협회에서 권장하는 기본 셋업을 충실하게 따르다 못해 넘치도록 지급한 보람이 있었다.
문제는 식량이 별로 없다는 건데, 수용 인원이 고작 두 명인 채집형 던전이라면 던전의 크기도 크지 않을 터였다. 굶어 죽는 것보단 몬스터에게 찢겨 죽는 게 빠를 테니 아사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멀쩡한 낯으로 장비를 점검하는 지호를 멍하니 보던 태웅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누가, 포기하고 죽는다고…….”
“죽겠다고 삽질하고 있었잖아요. 제 말 틀려요?”
“아니, 내가 언제…….”
“언제기는요, 계속 그랬으면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호의 말에 수긍하고 싶지는 않은지 태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한번 해 볼 거예요?”
“그래, 씨발. 하면 되잖아, 하면!”
“네, 발악할 의지라도 있으시면 다행이고요.”
태웅에게 비꼬듯이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찌른 대로 따라오는 그에게 안도했다.
솔직히 지호 혼자서 이 던전을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은 제로였다. 던전에 돌아다니는 일반 몬스터는 어찌어찌 처치한다고 해도, 보스 몬스터는 B급 헌터인 지호에게는 역부족이다.
그나마 S급 보스 몬스터를 죽일 가능성이 있는 건 선태웅뿐.
자존심 세고 단순한 태웅은 조금만 성질을 긁어 줘도 금세 기운차게 튀어 올랐다. 헌터로서의 능력이야 꽤 좋으니 메인 전력으로서의 화력은 충분하다.
일단 두 사람의 인벤토리 포켓을 털자 꽤 많은 아이템이 나왔다. 문제는 선태웅이 포션 등의 소모 아이템을 많이 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각성자가 발명한 인벤토리 포켓은 게임처럼 아이템을 넣을 수 있게 만들어 주지만, 가짓수에 한계가 있다. 선태웅은 그리 부지런하게 보충하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다. 뭐, 그럴 것 같았지만.
지호는 태웅에게 자신이 가진 소모품의 3분의 2를 넘겼다. 태웅은 얼떨떨하게 아이템을 받았다.
“나한테 거의 다 주면 넌 어쩌려고.”
“저보다는 선태웅 헌터가 주 전력이잖아요. 그냥 가지세요. 그리고…….”
지호는 이원이 선물한 이후 쭉 끼고 있던 장갑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태웅에게 건넸다.
“이것도 받아요.”
“뭐냐? 이건.”
“쓰세요. 좋은 거니까. 신체 능력을 대폭 강화해 줄 거예요. 쓰시는 스킬 화력도 올라갈 거고.”
얼결에 장갑을 받아 들어 착용한 태웅이 시험 삼아 스킬을 써 보았다.
화륵!
시험 삼아 쓰기에는 제법 큰, 사람의 몸통만 한 불꽃이 눈앞에 타올랐다가 사그라든다. 순식간에 태웅의 눈에 이채가 떠오른다.
“야. 이거…….”
“주는 거 아니고 빌려주는 거예요.”
탐욕스레 반짝이는 태웅의 눈을 보며 지호가 코웃음 쳤다. 그러자 태웅이 제법 짓궂게 씩 웃는다.
“내가 돌려줄 것 같아?”
“돌려주시리라 믿는 거죠.”
망설임 없는 지호의 말에 태웅의 표정이 묘해졌다.
원래 이 정도로 높은 급의 아이템은 효력을 가진 계약서를 쓰고 건네준다. 계약서 없이 빌려준 아이템을 꿀꺽하는 경우는 흔하다.
선태웅을 믿어서 빌려준 건 아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빌려줄 뿐이지만 말이라도 좋게 해서 나쁠 건 없다.
게다가 저 장갑은 주이원의 선물이다.
자신이 준 선물을 선태웅이 꿀꺽했다는 걸 알면 녀석이 아폴론 길드를 뒤집어서라도 다시 회수할 테니 손해 볼 확률은 없었다.
뜯겼을 때의 상황까지 대비했지만, 그런 뒷이야기는 모를 태웅은 선뜻 아이템을 내어 준 지호에게 퍽 감동한 눈치였다.
“야. 내가 쓰다 뒈져도 돌려줘야 되냐?”
“끼고 죽으시면요. 가시는 길에 같이 묻어 드릴 정도로는 베풀어 드릴게요.”
“그럼 돌려줘야겠네. 이 정도면 해 볼 만하겠다.”
자신만만하게 씩 웃은 선태웅이 앞서 나간다. 하지만 뒷모습은 평소보다 묘하게 경직되어 있다.
‘허세 부리긴.’
물론 허세를 부리는 쪽이, 조금 전처럼 절망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야 낫다.
선태웅의 심정을 이해한다. 지호도 알고 있다. 살아남을 확률이 무척이나 낮다는 것쯤은. 그래도 얌전히 자살하는 것보단 희박한 확률에 걸어보는 게 낫다. 확률이 0이 아니라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두 사람이 처음에 빠졌던 작은 굴을 빠져나가자 천연 암석 동굴처럼 생긴 던전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회색의 바위로 이루어진 동굴의 중간중간에 희미한 빛을 내는 돌이 박혀 있어서 주변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연 상태 거의 그대로를 유지한 바위로 된 벽면이나 천장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나 문양이 드문드문 인위적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출구가 없는 던전의 특성상 바람은 거의 불어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바닥을 밟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던전은 내부마다 분위기가 모두 제각각 달랐다. 던전에 들어간 경험이 없는 지호는 영상으로만 봤을 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싶은 욕망을 꾹 누르며, 지호는 조심스럽게 태웅의 뒤를 따랐다.
한 번에 서너 사람 정도가 나란히 걸어갈 수 있는 너비의 통로는 구불구불 이어졌고, 간간이 갈림길이 존재했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표시를 한 선태웅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개체 수가 아주 많은 던전은 아니야. 많은 곳이면 진작 두셋 정도는 나왔어야 하거든.”
좋은 신호였다. 몬스터의 개체 수가 많다면 두 명에 불과한 인원으로는 방어가 불리했다. 그리 넓지 않은 통로 또한 두 사람에게는 이점이었다.
조금 걸어가던 선태웅이 멈춰 섰다. 한발 늦게 멈춰 서서 집중한 후에야 지호는 기척을 느꼈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갈림길에서 몬스터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이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웅은 더 나아가는 대신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점화.]
간단한 시동어지만 효과는 강력했다. 갈림길의 벽면에서 기름 부은 곳에 불씨를 던진 듯 강한 불길이 타올랐다.
「끼이이익!」
통로에서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불에 타오르는 쥐를 닮은 몬스터가 비척거리며 튀어나왔다.
불이 붙은 몸으로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선태웅은 한 번 더 점화를 사용했다.
그리고 선태웅이 불타오르던 몬스터에게 스킬을 사용한 그 순간, 갈림길 뒤편에서 다른 개체가 소리 없이 튀어나왔다.
불에 타오르는 개체와 닮았지만 꼬리가 짧고 더 날렵한 체형의 몬스터는 생김새답게 움직임도 훨씬 날쌨다.
태웅이 곧장 점화를 사용했지만 몬스터가 피한 채 달려드는 게 더 빨랐다. 부상을 각오한 태웅이 이를 악문 그 순간.
퍼억!
북을 때리는 것처럼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지호의 주먹이 새로 달려든 몬스터의 몸체에 꽂혔다.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었지만 몬스터가 몇 미터 물러났고, 그걸로도 태웅이 마지막 타격을 날리기에는 충분했다.
[점화.]
쾅!
처음에 썼던 점화보다 조금 더 강렬한 위력이었다. 몬스터는 단번에 불타올라 더는 움직이지 못한 채 쓰러졌다.
그리고 곧, 몬스터 두 마리는 완전히 새카맣게 타 버렸다.
한 번에 쓰러트려 좋긴 한데……. 마력을 지나치게 펑펑 쓰다가는 나중에 마력 고갈이 와서 고생할 수밖에 없다.
지호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조언했다.
“마력 좀 아끼는 게 낫지 않아요?”
“아냐. 처음에는 시험 삼아 약하게 써 본 거야.”
태웅이 얼떨떨한 듯 제 두 손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이거, 화염 저항이 전혀 없는 모양인데? 아니, 그 수준이 아니라 아예 불이 약점 같은데…….”
보통 던전은 하나하나가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불이 약점인 몬스터가 둘이나 나왔다면 이 던전의 몬스터는 대부분 불이 약점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선태웅의 스킬 속성은 불이다.
서서히 선태웅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야. 이거…….”
“잘하면 진짜 되겠는데요.”
선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속성이 유리하다면 등급 한두 단계 정도는 무시하고 비벼 볼 만하다.
그저 발악에 불과했던 던전 공략에 희망의 불씨가 던져진 순간이었다.
* * *
던전 공략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두 사람의 희망과 예상대로 이 던전은 대부분의 몬스터가 화염 저항이 없거나 화염에 취약했다.
속성 덕에 몬스터를 죽이기 수월한 태웅이 주로 공격하고, 지호는 기습하는 몬스터가 태웅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지금까지 바깥에서 눈만 마주치면 싸웠던 것치고는 놀랍도록 합이 잘 맞았다.
본의 아니게 비슷한 구역에 길드를 두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꽤 지켜본 덕분이었다.
갈림길이 많아 헤매게 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길 또한 비교적 단순했다. 갈림길마다 표시를 하고, 지호가 길을 통째로 외워 가며 헤매지 않고 길을 찾았다.
수용 인원이 고작 두 명인 던전이라 예상대로 던전의 크기는 넓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났을 때, 두 사람은 수월하게 보스 몬스터가 자리한 문 앞에 도착했다.
자연 상태에 가깝던 지금까지의 통로와 달리 마지막 방은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 굴곡 없이 미끈한 문으로 막혀 있었다. 단단히 닫힌 문은 이쪽에서 열기 전까지 열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이 너머에 던전 보스가…….’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위압감이 넘실거렸다. 두꺼운 문이 사이에 있는데도 강렬한 기운을 감지한 피부가 따끔거렸다.
이 앞의 적은 지금까지의 적보다 몇 배는 강할 것이다.
“야.”
태웅이 잔뜩 긴장한 채 각오를 다지던 지호의 어깨를 툭 쳤다.
“여기서 조금 쉬다 가자.”
지호는 긴장된 어깨를 늘어트렸다.
옳은 판단이었다.
아무리 상처나 바닥난 마력을 포션으로 회복한다 한들, 누적된 피로까지는 해소해 주지 않는다. 지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망을 볼 테니 선태웅 헌터는 좀 쉬세요.”
“됐어, 너도 피곤하면 그냥 자라. 네 수준에 굳이 망을 보는 거나, 내가 졸면서 감지하는 거나 비슷비슷하니까.”
이전처럼 적대적으로 날을 세우진 않았지만, 여전히 얄밉게 툭 말을 던진 태웅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30초도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태웅이 확실하게 잠든 걸 확인한 지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지호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숨을 죽여 조금 전부터 한참 참고 있던 기침을 내뱉었다.
“쿨럭, 큭…….”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익숙한 비린 맛과 함께 손수건이 피로 젖는다.
‘빌어먹을 약해빠진 몸.’
익숙한 상황이지만 오늘따라 더 짜증이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