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스템(5)
손수건을 노려보던 지호는 태웅이 피워 둔 모닥불 위로 손수건을 던져 피를 토한 흔적을 없애 버렸다.
손수건을 완전히 화염이 집어삼킨 후에야 지호는 한숨을 쉬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잇단 스킬 사용으로 몸 상태는 최악이다.
태웅도 그걸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막판엔 신경을 곤두세워 지호보다 먼저 급습하는 몬스터에게 대응했다.
“후…….”
무리하고 피를 토한 몸이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무겁다.
지호는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후를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쉬어야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대신 복잡한 속을 잡념이 가득 채운다.
‘밖은 지금쯤 난리 났겠지.’
최소 S급 이상의 채집형 던전이 발생했고, 거기 휘말린 헌터는 권장 등급에 못 미치는 헌터 둘이다. 다들 죽어 나온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점치고 있겠지.
희망적인 상황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건 신지호가 아닌 선태웅이다.
신지호가 던전 공략에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게 뻔했다. 심지어 지호의 생환을 바랄 길드원이나 친구, 가족들조차 지호가 아닌 태웅이 힘내 주기를 응원할 것이다.
서운해할 필요 없이, 그들의 생각이 옳다.
지호가 있어서 태웅이 조금 더 손쉽게 던전을 돌파하긴 했으나, 지호가 없었어도 태웅은 혼자 어떻게든 이곳까지 도착했을 테니까.
차라리 어중간한 전투계 헌터인 지호가 아니라, C급이라도 보조계 헌터가 들어왔다면 훨씬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호는 제 하얀 손을 노려보았다. 각성자의 힘은 근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서 신체 강화의 능력을 얻더라도 외모상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지난 날 공부만 해 온 탓에 굳은살 하나 없이 미끈하고 허연 제 손이 오늘따라 더욱더 나약하게 느껴졌다.
물론, 실제로도 약하지.
지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길드는 접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헌터도 그만둘까.’
어차피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번 일은 회의를 느끼던 신지호에게 강렬한 탈출 욕구의 스위치를 눌렀다.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B급 헌터인 신지호는 영원히 자신에게 얽힌 의혹을 벗어 내고 도약할 수 없을 것이다.
괜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지만 슬슬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약해 빠진 몸을 갈아 가면서까지 뭔가 해 보겠다고 고집부리던 것을 관둘 때가.
‘다들 기뻐하겠지.’
신지호를 걱정하던 가족이나 친구들도, 신지호를 못마땅해하던 수많은 헌터도, 신지호에게 붙은 비리의 이미지가 청람에 누를 끼친다고 여기던 사람들도, 모두 다.
아무도 원치 않는데 혼자 바라고 또 바라서 아득바득 달려들던 발악을 멈출 때도 되었다.
정 헌터를 계속하고 싶다면 몇 년쯤 지나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잊힐 때쯤 다시 시작하면 된다.
신지호라는 이름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채 내버려 두고, 그냥 그렇게…….
‘허접. B급.’
사사건건 시비 거는 선태웅이 재수 없지만 그가 한 말 중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 이걸 마지막으로 하자.
지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태웅은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서 일어났다.
애초에 눈만 감았을 뿐 잠들지 못했던 지호가 비척거리며 따라 일어나자, 피곤한 낯을 본 태웅이 혀를 찼다.
“자라니까 잠도 안 자고 뭐 했냐? 하여간 멍청하긴.”
“쉬긴 쉬었어요. 전 선태웅 헌터처럼 무신경하지 않아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재수 없는 B급.”
“네, 네.”
헌터를 때려치우기로 마음먹었더니 평소라면 한마디 쏘아붙여 줄 말에도 별다른 대꾸를 할 의욕이 나질 않는다.
갑자기 얌전해진 지호를 의아한 얼굴로 보던 태웅은 그저 긴장했겠거니 여기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곧 준비를 마친 태웅은 비장한 얼굴로 지호를 돌아보았다.
“B급, 너한테는 큰 거 기대 안 해. 절대 무리하지 마. 그렇다고 손 놓고 있진 말고. 아무리 B급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네.”
“아까 알려 준 신호 기억하지?”
지호는 태웅이 통로를 지나며 부지런히 알려 준 신호들을 떠올렸다.
“큰 스킬 쓰기 전에 준비가 필요하면 스킬이라고 외치거나 오른팔을 들어 흔드는 수신호, 혹시라도 스킬 제한이나 침묵에 걸리면 주먹이었죠. 그리고…….”
지호는 원래 아폴론 길드에서 사용한다는 신호들을 줄줄 읊었다. 기억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태웅은 꽤 놀란 눈치였다.
“그걸 다 잘도 기억하네. 하긴, 한국대생이었지. 넌 헌터 하지 말고 그냥 공부나 계속하는 게 낫겠다. 학교 안 때려치웠지?”
“지금은 휴학 상태예요.”
“그래, 나가면 헌터 같은 건 때려치우고 공부나 하라고. 각성자 관련 연구를 해도 좋잖아. F급들은 그 길로 많이 빠진다던데.”
“하하…….”
지호는 맥없이 웃었다. 여기서 나가면 태웅의 말대로 하는 게 제일 좋은 일이긴 했다.
지호가 언제나처럼 자신의 말을 흘려듣는다고 여긴 태웅이 쯧, 혀를 찼다.
“어쨌든 학교도 여기서 탈출해야 갈 수 있으니 힘내 보자고.”
“네.”
“내가 요구하면 주의를 끌어 주고. 최대한 지시대로 움직이면서 나서지 말고.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성가시니까.”
“알겠어요.”
“넌 딱 그 정도만 하면 돼.”
별 기대를 품지 않은 발언에도 신지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적으로 약한 지호는 당연히 따르는 게 옳았다.
강해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차피 그만둘 텐데 괜한 미련은 갖지 말자.
여기서 살아남는 것이 헌터로서의 최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