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전과는 다릅니다(5)
청람의 헌터관에서 편의를 봐준 덕분에 지호는 제일 빠르게 경매의 결과를 정산받았다.
‘이런 걸 보면 내가 헌터계의 적폐는 맞는 것 같은데.’
어느샌가 익숙해진 제 별명을 생각하니 잠시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어마어마하게 쌓인 아이템을 보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지호는 구입한 아이템을 모두 길드로 보내 달라고 말하고는, 뒤돌아 나가려다가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이 스태프를 누가 등록한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건…….”
아마 꽤 높은 직급에 있을 직원은 곤란해하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헌터라면 딱 잘라서 밝힐 수 없다고 말했을 텐데, 하필 청람 백화점의 오너 일가인 신지호가 상대라서 곤란한 모양이었다.
직원이 바쁘게 머리를 굴리는 걸 본 지호는 질문을 바꿨다.
“혹시 주이원이나 청람 길드에서 등록한 아이템인지만 말해 줄 수 있어요?”
“그건 아닙니다. 연관 없는 길드에서 등록한 아이템입니다. 죄송하지만, 입찰자는 규정상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라서…….”
어차피 주이원이나 청람 길드와 관련되어 있으면 지호가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으니 말해 줬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하단 뜻이다. 어차피 그 이상은 캐물을 생각도 없었던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지호는 직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밖으로 나왔다.
주이원이 은근히 구매를 부추기기에, 지호에게 팔 용도로 싸게 밀어 넣은 아이템인가 했더니 그건 아닌가 보다.
예전에 주이원이 줬던 장갑 또한 ‘레일레이 애샤’가 만든 물건이라 혹시나 했는데. 우연치고는 절묘하지만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같은 던전에서 나온 장비 아이템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특유의 느낌이 있으니까.
SF풍의 던전에서는 SF풍의 장비가, 중세풍의 던전에서는 중세풍의 장비가 나오는 식이다.
의문을 정리하면서 지호는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부터 시작된 경매가 모두 끝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가 버린 줄 알았던 이원이 지호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호야.”
“왜.”
지호는 잔뜩 경계한 채 짧게 대꾸했다. 경계심 많은 짐승이 털을 잔뜩 세운 것처럼 반응하는 지호를 본 이원이 웃음을 삼켰다.
“이상한 소리 하려는 거 아냐.”
“그럼 뭔데.”
“우리 집 가서 잘래? 가깝잖아.”
충분히 이상한 소리였다. 게다가 목소리도 묘하게 느끼한 게 소름이 돋는다. 친구가 아니라 애인에게나 들려줄 법한 다정한 목소리에 지호는 얼굴을 구겼다.
“내가 뭐 하러 너네 집에 가? 우리 집이 더 가까운데?”
“에이, 친구끼리 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다음에 해. 오늘은 피곤해.”
“가서 어깨 주물러 줄까? 맛있는 것도 사 줄게.”
이원이 허접한 수로 사람을 살살 꾀었다.
이게 사람을 다섯 살짜리로 아나? 지호는 손을 휘휘 저으며 이원을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
“됐거든. 빨리 가서 잠이나 자라. 너 바쁘잖아.”
내일 주이원은 청람에서 관리 중인 S급 던전을 공략할 예정이었다. 자주 공략한 던전이라 위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전날은 푹 쉬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잠깐 한눈팔면 아무리 주이원이 SS급의 유능하고 강력한 헌터라고 해도 다칠 수 있는데.
이런 데서 괜히 기운을 빼는 게 아니라 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이원은 끝까지 지호를 물고 늘어졌다.
“바빠도 지호를 위해서라면 24시간 상시 대기 중이지.”
“네, 전 안 필요합니다.”
대화를 계속하다간 결국 말려들어 간다. 폭풍 같은 이원에게 완전히 휘말려 붙잡히기 전에, 지호는 이원을 피해 차에 탔다.
차의 문이 닫히기 전, 이원이 차 문을 턱 잡았다.
“정말 혼자 갈 거야? 라면 끓여 줄게. 맛있게 끓여 줄 수 있거든.”
“뜬금없이 라면은 무슨……. 나도 라면 정도는 끓일 줄 알아.”
지호는 이원의 말을 자신만만하게 받아쳤다.
아무리 지호가 곱게 자랐다지만 라면도 못 끓이겠는가?
물론 끓여 본 적은 없지만.
“좋게 말할 때 놔라. 마지막 경고다.”
지호가 음산하게 말하자 이원은 못마땅하게 인상을 구기며 손을 뗐다.
“지호 집 박살 났으면 좋겠다. 우리 집 오게.”
“저주하냐?”
“저주처럼 불확실한 것에 매달릴 생각은 없어. 기회 봐서 내가 박살 내야지.”
“미친 새끼.”
“박살 나면 우리 집으로 와, 자기야.”
끝까지 저주를 퍼붓는 이원에게 인사 대신 욕을 해 주고 지호는 문을 닫았다. 억지로 문을 열거나 끌고 갈 생각까지는 없는지 창문 너머에서 이원이 손을 흔들었다.
번화가라 제법 늦은 시간임에도 그리 한산하지 않은 도로 위를 달리며 지호는 마지막에 인사하던 주이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박살 운운하는 이원의 눈은 농담이라기에는 묘하게 흉흉한 살기가 피어 있었다.
설마 진심으로 한 소리는 아니겠지만…….
이런 식으로 ‘별일 없겠지’ 생각한 일을 진짜로 저지르는 사람이 주이원이라 조금은 불안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을 부수는 건 테러지.’
주이원이 또라이 같은 짓을 많이 하긴 해도 그는 타인의 존경을 받는 헌터다. 테러 같은 짓을 할 리는 없었다.
“예전엔 더 착했는데.”
짐이나 다름없는 지호를 정성껏 챙겨 주던 학창 시절의 이원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이원의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고, 지호의 집에서 신세 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아이들 몇몇이 이원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
그들이 이원을 티가 나게 괴롭힌 건 아니다. 이원과 그들만 있을 때 악의적인 말을 지껄이거나, 몰래 이원의 사물함에 쓰레기를 넣어 놓거나, 책에 욕설 적힌 낙서를 해 놓는 등 소심하지만 악질적인 장난이 이어졌다.
이원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묵묵히 모든 걸 감내했다.
지호가 그 괴롭힘을 알게 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그때 지호는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의자를 들고 냅다 다가가서 가해자를 내리치고 책상도 던지고 잡히는 건 모조리 던졌다.
당연히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나름 모범생이었던 지호가 위험한 폭력을 먼저 휘둘렀으니.
몸이 약한 데다 힘도 없는 지호라서 상대가 크게 다치진 않았고, 오히려 열을 내던 지호가 쓰러진 데다, 상대도 이원을 괴롭힌 사실이 발각되어 결과적으로는 흐지부지 없던 일처럼 넘어갔다.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지, 다시 생각하면 진짜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머리를 노리고 의자를 내리쳐?
실제로 이 일이 한창 지호가 인터넷에서 까일 때 문제가 됐던 적이 있다.
그때 이원을 괴롭히다가 지호에게 얻어맞은 이들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었다. 부정을 저지른 신지호는 학생 때 폭력까지 저지른 전적이 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 영웅인 주이원이 직접 사건의 전말을 밝힌 덕에 결과적으로는 폭로한 쪽이 욕을 먹고 끝났다. 하지만 당시에는 무척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지금이라면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눈이 뒤집혀서 폭력을 휘두르기보단 괴롭힘의 증거를 잡아 고발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지호가 먼저 폭력을 행사한 탓에 당시 가해자들의 처벌도 흐지부지됐는데, 조금만 머리를 썼다면 제대로 엿 먹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 발끈하는 성격이 문제다. 특히 지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이젠 어른이니까, 비슷한 일이 있으면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일투성이다. 작은 것도 꼬투리 잡으려는 사람이 많을 테니 앞뒤 재 보지 않고 행동해서는 곤란하다.
‘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흥분하지 말고.’
자기 성찰로 생각을 마무리하며 지호는 대로변에서 골목으로 차를 꺾었다.
신지호가 거주 중인 한적한 주택가가 나타났다.
‘일단 오늘은 푹 쉬어야지…….’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이라도 하면서 피로를 풀고, 푹신한 침대에서 늘어질 거다. 익숙하지만 달콤한 감각을 떠올리며 지호가 들떠 있을 때…….
쿠웅.
지호의 다짐을 짓밟듯,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질적인 굉음이 울렸다.
“뭐야?”
지호의 차가 급히 멈춰 섰다. 일반적으로 날 수 없는 커다란 굉음은 분명 지호의 목적지와 반대 방향에서 들렸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소리가 난 방향으로 운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 굉음이 난 곳과 가까워질수록 각성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별다른 경보는 없었는데?”
길드에서 조금 떨어진 구역이지만 혹시 지원을 나가게 될 수도 있어서, 서울 남부와 근처 경기권의 균열 경보는 매일 체크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일을 하지 못했던 오늘 역시 습관적으로 확인은 해 두었다.
물론 균열 예측은 100%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에 돌발적으로 단발성 균열 대신 채집형 던전의 게이트가 나타났는데, 이건 너무 자주 틀리는 거 아닌가?
“하여간 일 똑바로 좀 하지…….”
불평하면서도 어느새 차로 올 수 있을 만큼 최대한 가까이 다가왔다.
널찍한 골목 위에 벌어진 균열은 크기나 마력의 흐름을 봤을 때 C급 정도. 평범한 일반인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인 등급이었다.
지호의 시야에 대피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은 한 사람이 보였다. 앳된 얼굴의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지호는 학생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
학생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몬스터가 느릿하게 다가온다.
개체 수는 여섯. 균열 틈으로 한 마리가 더 나오고 있다.
움직임은 느리지만 머리에 길게 뻗어 난 더듬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액체가 바닥을 녹였다.
지호는 곧장 몬스터의 정보를 확인했다.
status
이름 | 리퀠 |
등급 | D |
체력 | 64 |
마력 | 52 |
근력 | 81 |
민첩 | 7 |
스킬 | 괴력(D), 산성 용액(D), 접착 용액(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