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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체불명의 무언가(15) (42/283)

4. 정체불명의 무언가(15)

어릴 적, 이원은 지호보다 훨씬 성장이 느렸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이원의 키는 평균보다도 작았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콩나물처럼 쑥쑥 크더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완전히 추월해 버렸지만.

하지만 예전 사진을 보면 어릴 적의 이원은 확실히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여린 아이였다. 어딘지 창백한 낯빛과 우울한 얼굴.

어릴 때는 무척 오지랖 넓었던 지호가 신경 쓰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어릴 때, 상대를 졸졸 쫓아다닌 건 오히려 지호 쪽이었다.

이원은 어린애가 만사 다 귀찮은 노인처럼 늘어져 있는 일이 잦았다. 지호는 그런 이원에게 꼭 달라붙어 재잘재잘 떠들거나, 어딘가로 끌고 다녔다.

부모님이나 형, 누나의 말에 따르면 ‘이원이는 내가 지켜 줘야 해!’라면서 꼭 붙어 다녔다던데.

지호는 어린 자신에게 지금의 이원을 꼭 보여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걔 이렇게 크니까 안 지켜 줘도 된다고.

이원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이원이 혼자가 되었을 때 어린 지호의 고집은 한층 더 세졌다. 어릴 적의 지호는 순한 아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지호는 열이 오를 때까지 울며불며, 이원과 자신이 계속 함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모님은 진지하게 고민했고 나름 빠르게 결론 내렸다.

부모님은 전혀 모르는 아이도 아니던 이원을 기꺼이 받아들여 줬고, 친자식처럼 키웠다. 두 사람은 그 후로 늘 붙어 있게 되었다.

과거를 기록한 사진에서는 이원을 지호가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는 티가 폴폴 났다.

시큰둥한 이원이 지호에게 잡혀 있거나, 지호가 늘어지려는 이원을 끌어안아 붙잡고 있거나, 지호가 지쳐 쓰러져 잠들 때야 이원 역시 피곤한 듯 옆에서 완전히 곯아떨어지곤 했다.

형제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두 사람 역시 사이좋을 때도 있었고, 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친구이기도 했던 두 사람은 으르렁거리면서도 곧잘 화해하고 늘 함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이원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이원이 아침을 먹고도 매점에 두세 번은 더 들른다는 것, 축구를 좋아하고 해외의 축구팀을 응원한다는 것, 직접 공을 차는 걸 좋아한다는 것, 아무리 피곤해도 수업 시간에는 누구보다 집중한다는 것, 여유로운 듯 보이지만 항상 누구보다 노력한다는 것,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하는 이유가 지호를 이겨 먹기 위해서라는 것까지.

마지막은 생각하니까 또 빡친다. 한 번쯤 져 주면 어디 덧나나? 이제 앞으로 평생 이원이 이겨 먹을 것 같은데.

물론, 일부러 져 줬다면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때는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내며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둘이서만 같이 살게 되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왜 경현을 쓸데없이 경계하는지, 지금 왜 화가 났는지…….

아무것도.

침묵으로 시위하는 상대가 지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원의 말마따나 오늘은 둘이 함께 지내게 된 첫날이다. 더 목소리를 높이고 싶진 않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으러 가려던 순간, 이원이 지호를 홱 붙잡았다.

“뭐야?”

의아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얼결에 벽에 밀어붙여진 지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이원을 올려다보았다.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것도 맘에 안 드는데 거기에 더해 꽤 자존심 상하는 구도였다.

십의 자릿수가 2나 차이 나는 키답게 이원의 시선은 높았고, 드넓은 어깨가 만드는 그림자가 지호를 쉽게 덮었다.

밖에서 침묵하던 건 집에 와서 화내기 위함이었나. 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밀어내려 애썼지만 오히려 이원의 손은 더 억세게 지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결국 지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파, 멍청아!”

“너희 하는 이야기 들었는데.”

이원의 말에 지호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너, 남의 이야기 훔쳐 들었냐?”

“방문 앞으로 돌아왔는데 들린 거야.”

“…….”

지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굳이 기척을 죽이지도 않았을 텐데 알아차리지 못한 건 지호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SS급인 이원과 지호의 실력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존심이 상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원과 경쟁하기 시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의식할 수밖에 없다. 현재 헌터로서 자신과 이원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함을 알면서도.

“왜 내가 나간 사이에 물어본 거야?”

“그야…….”

네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너무 직설적인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려워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이 이미 충분한 답이 되었다.

“왜 나한테 먼저 안 물어봤어? 내가 어떻게든 알아내서 알려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별것도 아닌데 상처받은 목소리에 지호가 움찔했다. 그러나 올려다본 이원의 얼굴은 감정이라곤 한 톨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워서 연기를 하는 건가 싶을 만큼 괴리감이 들었다.

지호는 새카만 흑색 동공 안쪽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금빛을 똑바로 응시했다.

“괜히 청람한테 빚지지 않으려고.”

“청람한테 빚지는 게 아니라… 나한테 개인적으로 부탁하면 되잖아.”

“그게 그거지.”

이 집도, 길드 사무실도, 이미 넘치도록 청람에게 받았다. 물론 아버지나 누나, 이원 모두 그런 건 계산하지 말고 세금만 잘 내자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지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받아 온 건 너무나도 많았고, 지난 1년간 깎아 먹은 것은 받아 온 것보다도 많았다.

신지호는 이미 청람의 이름에 먹칠했다. 더 이상의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는 욕망이 컸다.

사실 여기까지는 남의 힘으로 왔다. 노네임은 지호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일반인이었다면 절대 유지할 수 없었을 길드니까.

이제부터라도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이원과 나란히 서고 싶었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주제넘은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호는 언젠가 이원을 뛰어넘고 싶었다. 물론 가능하더라도 먼 훗날의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이원이나 청람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서 해내야 했다. 상대를 의지해서는 결코 뛰어넘을 수 없을 테니까.

올곧은 지호의 눈을 마주 응시하던 이원이 손을 놓아주었다. 어렴풋이 회복 스킬이 어깨에 맺혔다가 사라진다.

이원이 손을 놓자마자 화를 내며 들어가려고 했는데…….

절망한 이원의 분위기에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주이원.”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내가 혼자 잘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널 따돌렸다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어린애도 아닌데 언제까지 도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지호는 최대한 부드럽게 제 뜻을 전달했다.

주이원은 매번 날을 세우면서도 중요할 때는 제게 한없이 약해지는 신지호를 응시했다. 하지만 정말로 결정적일 때는 제 손을 잡아 주지 않는 이를.

“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도와 달라고 하면 되잖아.”

“야, 그렇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면 끝도 없거든?”

이원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탄식을 힘겹게 내뱉었다.

“어렵네.”

“뭐가.”

“전에는 내가 널 어떻게 꼬셨는지 모르겠다. 분명 쉽게 넘어왔는데.”

뭔가 분위기가 어두워서 진지하게 들어 주려던 지호는 기가 차 웃었다.

“안 넘어갔거든?”

“넘어왔었어.”

“……꿈이라도 꿨냐?”

지호의 말에 이원이 피식 웃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 안쪽에 서린 금빛이 희미해지더니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분명 꼬셨었는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뭔 헛소리야……. 늙은이처럼 말하긴.”

“그러게…….”

낮게 중얼거리는 주이원은 정말 수십 년 살아온 늙은이처럼 지치고 기운 없어 보였다. 이미 제 생을 내던져 가장 강렬한 불꽃을 피워 내고 재만 남은 사람처럼.

그제야 지호는 뒤늦게 후회했다.

‘내가 피곤한 놈을 데리고 괜히 나갔다 왔네.’

회복 스킬을 걸어도 피로도가 완벽하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휴식해 줘야 각성자도 완벽한 컨디션을 되찾을 수 있다. 각성자도 결국 인간이니까.

과민 반응을 하는 데다 헛소리까지 심하게 하는 걸 보니, 주이원은 최근 과로해서 피곤한 게 분명하다.

다음부터는 휴일에 꼬박꼬박 쉬도록 해야겠다. 지호는 굳게 다짐하며 이원의 등을 토닥였다.

“야, 알겠으니까 이제 자러 가자. 너 내일 출장 가야지.”

“……그래.”

이원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나치게 기운 없어 보이는 미소가 안쓰러웠지만, 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지호는 일찍 일어나 이원을 배웅했다. 아무래도 누가 배웅해 주니 기분 좋은지 나갈 때의 이원은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날 오후, 경현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경현

지호야

알아봤는데

이플리스라는 이름의 길드가 있어

그런데 여기 미등록 길드야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가는 정보 관련 길드래

위험한 냄새는 안 나는데 그래도 미등록 길드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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