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관리자(9)
공터에서의 휴식은 30분 정도 이어졌다.
지호가 눈을 붙인 시간은 15분 남짓이지만 마법으로 잠든 탓인지 정말 개운하게 일어났다.
잠깐의 휴식이 다른 사람에게도 꽤 도움이 된 모양이다. 허소리는 물론이고 임승주와 양호진의 얼굴도 꽤 밝았다.
특히 호진은 태용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정중한 김태용의 태도가 늘 겁 많은 호진에게 안정을 주었는지 꽤 편한 분위기였다.
“그럼 이제 출발하죠.”
길드장이나 부길드장 대신, 두 사람 이상으로 의욕에 넘치는 허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임승주가 앞장섰다.
“제가 앞서 가겠습니다. 길을 찾는 건 제 특기니까요.”
“관련 스킬이 있으신가요?”
“비슷합니다.”
임승주가 공식 등록한 스킬 중에는 길을 찾는 스킬이 없다. 하지만 빈말할 성격이 아니니 스킬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다시 시작한 던전 공략은 처음 몬스터를 마주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수월했다.
몬스터 한 마리에 쩔쩔맬 때와는 다르다.
대부분의 몬스터가 일격에, 또는 이격에 무너졌다.
훈련 자체를 [별의 축언]으로 강화한 채 진행했기 때문에 임승주와 허소리의 손발도 조금 전보다 더 잘 맞았다.
승주의 광역 공격은 강력하지만 검을 크게 휘둘러야 하는 자세 때문에 빈틈이 생긴다. 소리는 마치 상대의 움직임을 모두 읽는 것처럼 신묘하게 승주의 빈틈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모두 막았다.
보조로 따라온 호진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강화된 [힐]로 두 사람이 상처를 입자마자 곧장 치료했고, 두 사람이 위기에 처할 때는 상태를 순간적으로 최상으로 만드는 [일상의 기쁨]이나 힘을 강화하는 [넘치는 힘]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지호로 말할 것 같으면 그냥 뒤에서 얌전히 따라가는 중이었다.
‘나야 공격용 스킬이 없으니까…….’
가끔 들고 있던 마력총으로 견제 사격을 했지만 대단한 기여는 아니다.
애초에 이 던전은 지호의 공격 능력을 확인하려는 게 아니다. 지호의 보조 스킬이 얼마나 남을 강화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들어왔다. 지호 덕분에 세 사람은 처음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산책이라도 나온 듯 여유롭게 던전을 공략했다.
하지만 조금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허소리에게는 자신만만하게 말해 놓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을 뿐, 지호 역시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몬스터가 습격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별의 축언]은 지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무력만 따지고 본다면 이전의 한심한 B급일 때보다 더 낮아졌다.
어떻게든 위력적인 공격 수단 하나쯤은 마련해 둬야 하는데.
지호는 자신의 상태에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강해지고 싶고, 약하다는 자학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런데 벗어나지 못해 답답하고…….
생각에도 [안정화] 스킬처럼 ON, OFF 기능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때, 스태프를 꽉 쥔 채 걷고 있던 지호를 누군가가 붙들었다.
“뭐야, 아……. 아니, 죄송합니다.”
이원인 줄 알았는데 상대는 김태용이었다. 태용은 순해 보이는 눈으로 지호를 빤히 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갑자기 신지호 헌터를 붙잡은 제 잘못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걱정스레 묻는 지호에게 태용이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던전 공략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신지호 헌터가 갖고 계시는 듯하여, 주제넘게 참견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가진 문제라니요?”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던전 공략은 순조롭고, 곧 신지호 헌터의 누명은 완전히 벗겨질 것입니다.”
“음, 그렇겠죠.”
지호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 잘 아는 사이처럼 구는 건 이 사람의 원래 성격일까?
자신의 소문에 관해서는 깊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 자리를 피할 겸 얼버무리고 앞장서기 전에 태용이 지호의 옆으로 따라 붙었다.
“저는 예전부터 신지호 헌터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저야 뭐 별것도 없는 평범한 헌터인데요. 물론 지금은 괜찮은 스킬이 생겼지만요.”
“당신은 이 지구에서 최초로 각성하신 분이십니다.”
“……최초라고 다 의미 있는 건 아니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초는 근원. 모든 각성자가 당신이 각성한 이후로 각성했습니다.”
갑자기 거창해진 내용에 지호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좀… 과한 생각이신 것 같네요.”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완전히 지호의 말문이 막혔다.
만약 상대가 미르의 길드장이 아니었다면 사이비 종교의 포교라고 생각할 법한 발언이다. 길에서 누가 이런 말을 한다면 당장 무시하고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하다.
예전이라면 단번에 부정했을 말을 지금은 완전히 부정하기 힘들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시스템창. 누가 봐도 굉장히 특별한 스킬. 분명 왼쪽 심장이 꿰뚫렸는데도 멀쩡하게 회복하는 몸.
자의식 과잉인가 싶어서 자제하고는 있지만, 역시 신지호는 남들과는 뭔가 다르다.
태용의 말을 듣자마자 지호는 동요했다. 그리고 찰나의 동요를 태용은 놓치지 않았다.
“신지호 헌터. 저는…….”
태용이 말을 모두 마치기 전, 지호의 몸이 홱 끌려갔다. 맥없이 끌려간 지호는 이원의 품에 쏙 안겼다. 지호를 단단히 끌어안은 이원이 매서운 눈으로 태용을 노려보았다.
“작업은 거기까지.”
태용 역시, 지지 않고 이원을 쏘아보았다.
“작업? 대화 중일 뿐입니다.”
“수작 부리지 말라는 소리야.”
최소한의 예의로 쓰던 존댓말까지 집어치운 채 이원이 사납게 말했다.
“수작이 아니라 신지호 헌터와는 격의 없이 우애를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걸 수작이라고 하는 거야. 손대지 마.”
“너나 손대지 마라.”
지호는 이원의 배를 팔꿈치로 찍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순순히 물러나 줄 이원은 꼼짝하지 않고 지호의 몸을 더 세게 붙들었다.
“수상하잖아, 김태용. 그동안 관심도 없었으면서, 뭐야? 갑자기. 뭐 좀 뜯어먹고 싶고 그래?”
“야, 주이원. 넌 무슨 말을……!”
“그런 게 아닙니다. 주이원 헌터는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해는 무슨.”
이원이 차갑게 웃었다. 그리고 지호를 놓더니 성큼 김태용에게로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지만 태용은 동요하지 않고 똑바로 이원을 노려보았다.
“네가 왜 수작 부리는 건지 알고 있어.”
“수작이 아니라…….”
“네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거든.”
픽 웃은 이원이 손을 뻗어 김태용을 바짝 끌어안았다. 놀란 김태용은 눈을 부릅뜬 채 뻣뻣하게 굳어 버렸고, 오직 이원만이 여유롭게 속삭였다.
“성가시게 굴지 말고 얌전히 있어.”
이원은 태용을 뿌리치듯 놓았다. 그리고 태용과 닿았던 부분이 더럽다는 듯 손을 닦았다.
잠깐 휘청거린 태용은 뭔가 충격받은 얼굴로 이원을 보다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손을 닦던 이원과 지호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태연하던 이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지호야.”
“왜?”
“아니…….”
지호는 이원이 왜 자신을 빤히 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좀 한심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그 감정이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났나?
김태용을 힐끗 보니, 그는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이원과 지호를 번갈아 보다가 물러났다.
어색해진 두 사람의 사이에서 지호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아무 데서나 그러고 다니냐.”
“아무 데서라니, 그건 아니지.”
“나, 김태용 헌터. 둘 다 남자니까 괜찮은데 여자한테는 그러지 마.”
이원의 걱정과 달리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았다. 바짝 접촉했다고 해도, 누가 봐도 단란한 분위기는 아니고 협박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성이라면 여러모로 더 문제가 커질 수 있다.
던전을 너무 돌아서 상식을 살짝 잊어버린 친구 녀석에게 지호는 좋은 마음으로 충고했다. 그러나 이원은 억울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 너 외에는 안 끌어안아.”
“변명할 필요 없는데.”
지호는 뚱하게 대꾸하고 이원을 지나쳐 앞장섰다. 하지만 이원은 곧장 따라붙었다. 그리고 낮게 속삭였다.
“지호야, 김태용을 조심해.”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원을 쳐다보았다. 늘 뻔뻔한 얼굴에는 오늘도 의미 없는 심각함이 걸려 있었다.
“밑도 끝도 없이 조심하라고? 내가 볼 때는 김태용 헌터가 너를 조심해야 할 것 같던데.”
“그건 김태용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어.”
“그게 무슨 경고야.”
뚱하게 대꾸하는 지호에게 이원이 목소리를 낮춰 귓가에 바싹 대고 속삭였다.
“난 김태용의 비밀을 알고 있거든.”
“뭔데, 그게?”
“그건 당장 말하기 좀 곤란하고…….”
지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헌터가 된 이후의 주이원은 항상 이런 식이다. 계속 근처에 맴도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일 때는 거리를 둔다.
그래도 최근에는 이전처럼 몇 분 만에 휙 가 버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신뢰나 우정 따위의 단어와는 먼 행동뿐이었다.
주이원도 스스로 제 태도의 모순을 모르진 않는지 난처하게 웃었다.
“내가 김태용의 약점을 좀 건드린 거지. 많은 건 말 못 해.”
“김태용 헌터는 변태에게 약한 건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정색하고 부정하는 이원에게 지호는 픽 웃었다.
김태용과 거리를 둘 생각은 없지만, 이원의 말대로 조금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지호는 슬슬 태용의 맑은 눈동자가 사이비의 선한 광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식물에게 말하는 거며, 갑자기 거창한 이야기까지.
누가 봐도 이상한 종교에 심취한 사람 같다. 미르 길드가 이상하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으니 길드장 본인의 취향일 확률이 높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제 충고를 다소 무성의하게 듣는 지호를 보며 이원이 한숨 쉬었다.
“이래도 맘에 안 들고, 저래도 맘에 안 드네.”
“뭐가?”
“너 말이야. 전에는 쉽게 꼬신 것 같은데… 이젠 내 말도 안 듣잖아.”
지호는 더 이상 대화할 의지를 잃었다. 꼬시기는 무슨. 평생 친구보다 가까운 가족 같은 사이였는데…….
“또 개소리한다. 이제 그만 뒤로 가.”
더 상대하지 않기로 결심한 지호는 이원을 뒤로 보냈다.
지금은 주이원이든 김태용이든 깊이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비록 손을 거들 일은 없다고 해도 던전에 집중해야겠지.
노네임의 세 사람 덕에 던전은 쭉쭉 공략되었다. 트랩도 문제없이 돌파했고 몬스터 역시 큰 부상 없이 상대해 죽였다.
중간에 나타난 중보스, 이름하여 광삼중 역시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방.
태용이 앞에서 주의를 주었다.
“마지막 보스 광삼대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광주 제3 던전 대장, 즉 광삼대는 던전 난이도에 비해 어려운 적으로 꼽혔다.
물론 나무로 만들어진 골렘이라 화염 속성의 헌터가 있으면 비교적 쉬운 공략이 가능했지만. 지금의 파티에는 화염 속성을 지닌 사람이 없다. S급 던전의 보스이니만큼 요주의의 대상이다.
하지만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콰과과광!
임승주의 강력한 일격이 광삼대의 사람 몸통만 한 거대한 주먹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이후로도 보스 몬스터는 꽤 발악하는 듯싶었지만 상대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강화된 세 사람은 처음 싸운 광삼일보다 쉽게 광삼대를 상대했다.
물론 보스 몬스터이니 만큼 상대 역시 다양한 스킬로 버텨 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상대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특히 강화를 최대로 받은 임승주는 펄펄 날아다녔다.
이런저런 스킬을 시험해 볼 겸 다양하게 싸우며, 갖고 놀듯 광삼대를 상대한 끝에…….
쿠웅!
불과 십여 분 만에 광삼대의 거대한 몸체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공략 성공이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변화했다.
머리 위로 높이 떠오른 해가 붉게 물들고, 길게 늘어선 나무의 그림자가 불길하게 흔들린다. 나무와 나무의 사이로 비명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서서히 던전의 모든 것이 정지한다. 지금 이 던전의 세상이 한 번, 완전히 끝났다는 듯이.
불길한 배경과 달리, 지금까지 쭉 지켜보다가 앞으로 나서는 협회 직원의 표정은 밝았다.
“5시간 52분 만에 클리어했습니다. 우수한 기록이군요.”
지금까지 거의 말이 없던 협회의 직원이 나섰다. 내내 무표정한 낯이었던 직원은 멀거니 서 있는 지호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어 보였다.
“공식적인 발표는 오늘 밤에 나오겠지만……. 먼저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S급 헌터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