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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Delta(7) (96/283)

9. Delta(7)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던 지호가 벌떡 일어났다. 노트북을 닫고 주변을 원래대로 정리하고, 증거 인멸을 꾀하는 범인처럼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부모님께 인사라도 하고 가면 좋겠지만… 거울을 보니 도저히 인사할 만한 멀쩡한 몰골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걱정만 끼치게 될 테니까…….

변명을 덧붙이며 지호는 다시 택시에 올랐다.

하지만 도망친 곳 역시 썩 속이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

제임스 휘태커의 습격으로 빌딩 곳곳에 폭발이 일어나고 작은 화재가 발생했다. 하지만 주이원이 비싼 돈을 들여 지은 건물답게 결계가 쳐져 있어서 화재가 다른 곳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다만 사건의 뒤처리, 사고로 부서진 잔해의 수거와 수리, 상황을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건물 앞부터 무척 혼란스러웠다.

빌딩의 로비로 들어서자, 헌터 협회의 직원과 노네임의 길드원들이 지호에게 우르르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을 보고 나서야 지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곳에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어제 터진 사건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길드장님. 조금 쉬시는 게 어때요?”

“사정은 양호진 헌터에게 들었습니다. 급한 일은 장효주 헌터가 처리하고 있으니 굳이 길드장님이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아요, 좀 주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현장을 살피려는 지호를 다들 극구 만류했다.

“……제가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요?”

지호가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다들 들어가서 일단 쉬라고 말렸다.

미련이 남아 돌아본 현장은 그가 없이도 수월하게 일이 해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니 차라리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길드원들의 성화로 구석에 떠밀린 지호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지호야.”

“어, 경현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헌터 협회의 소속을 나타내는 재킷을 걸친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협회에서 파견된 모양이었다.

“상황은 괜찮은 거 맞아?”

“응. 걱정할 필요 없어. 범인이 도망쳤으면 모를까 잡혔으니까. 그보다 너는 좀… 쉬어야겠다.”

“응. 쉬어야지…….”

어딘가 넋 나간 것처럼 구는 지호를 경현이 손을 잡아 이끌었다. 힘없이 끌려간 지호는 경현과 함께 건물 내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슬슬 사람이 드나들 시간이지만 지난밤의 일로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다른 가게는 다 닫았는데 연 게 용하다.

한산한 카페의 의자에 힘없이 늘어진 지호에게 경현이 따뜻한 핫초코를 가져왔다.

뭔가 입에 넣을 기분은 아니었는데……. 막상 단 냄새가 풍기자 지호는 홀린 듯이 컵을 들어 음료를 홀짝였다. 잔뜩 녹이 슨 기계 장치처럼 멈춰 있던 머릿속이 기름칠을 한 듯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고마워…….”

“안색이 너무 안 좋다.”

“밤새워서 그럴 거야.”

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했다. 아무리 보조계라지만 S급 헌터가 하룻밤 샌다고 얼굴이 퀭하게 죽을 만큼 체력이 약하진 않다. 경현이 노골적인 핑계를 대는 지호를 빤히 바라보자, 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저기, 있잖아.”

“응.”

지호는 다정한 경현의 얼굴을 눈치 보듯 살폈다. 제 입으로 내뱉기에는 부끄러운 말이라 한참을 망설이던 지호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어릴 때나 지금이나, 주이원이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응?”

“그러니까 연애 대상으로…….”

놀라서 동그래진 경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지호는 어물어물 고개를 돌렸다. 경현이 이 민망한 질문을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해 주길 원했다. 잠시 생각하던 경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원이한테 사귀고 싶은 마음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야, 무슨…….”

“하지만 진지한 건 아니겠지? 진심으로 좋아하면 너한테 그렇게 장난스럽게 굴 리 없잖아.”

“……응, 그렇지.”

지호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답을 얻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원이랑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야. 그냥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너희로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이 한둘이야? 너무 신경 쓰지 마.”

경현이 지호를 열심히 위로했지만 별 기운이 나진 않았다. 계속 축 늘어진 지호를 본 경현이 혀를 찼다.

“너 진짜 잠이 모자라긴 한 것 같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어.”

“응, 알았어…….”

지호는 핫초코를 훌쩍 다 마시고 경현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올라왔다.

다른 엘리베이터는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폭발물을 수색하기 위해 모두 사용을 멈췄다. 하지만 오직 1층과 최상층의 집만을 연결하는 엘리베이터는 부서지지 않았기에 곧장 올라올 수 있었다. 뭐하러 돈 들여서 비싼 마력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나 했는데 이렇게 쓰일 줄이야.

지호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소파 위에 앉았다.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쉬기는커녕 주이원과 함께 사는 공간이라 그런지 뺀질뺀질 얄미운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점점 더 심란해졌다.

멍하니 앉아 있던 지호는 단말기를 들어 다른 사람의 연락처를 찾았다. 경현은 친한 친구지만 오히려 그래서 제 마음을 다 털어놓긴 곤란했다. 경현 외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라면…….

신우진.

학생 때야 친구들끼리 늘 함께 몰려다녔지만, 우진과는 따로 떼어 놓고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평소에도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을 뿐 자주 연락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우진 외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마 전에 얼굴 봤으니 덜 머쓱하지 않겠냐며 자신을 위로한 지호는 우진에게 연락했다. 

슬슬 아침이라 일어나 있었는지 우진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잔뜩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 지호야! 괜찮아?

“아, 나 괜찮아.”

─ 다행이다……. 뉴스 보는데 엄청 놀랐잖아……. 노네임에 폭발 일어났다고 해서. 걱정되는데 연락해도 되나 싶어서 고민하고 있었거든.

“아, 미안.”

─ 아니, 나한테 미안할 일은 아니지. 근데 진짜 괜찮아?

“응. 다친 데도 없고 지금 집에 와서 쉬고 있어.”

─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워낙 갑작스러운 전화여서 그런지 우진은 지호에게 목적이 있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내도 괜찮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호는 단말기를 붙든 채 어색하게 웃었다.

“응. 사실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뭔데?

“저기… 혹시 주이원이 날 좋아하는 것 같아?”

말하는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지막은 분명 목소리가 떨렸을 거다. 통화중인 상대에게서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어이없다는 부정이 나오기를 바랐지만…….

─ 그건 전 국민이 다 알지 않나?

“아니, 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농담에 맥 빠진 지호가 힘없이 말하자 우진이 짧게 “응.”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 알지, 모를 수가 없지. 주이원 그 새끼 진짜, 내가 네 근처에 가기만 해도 노려보고, 애들 맨날 견제하고……. 아는 사람은 다 알았을걸? 동혁이는 확실히 알 거고, 경현이는 알 것도 같고……. 민재 그놈이야 워낙 눈치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 좋아한다는게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지?”

─ 친구끼리 그러면 애인한테 뺨 맞아. 세상에 어느 친구가 너희처럼 굴어? 야, 민재가 나한테 주이원처럼 굴면 나 토할 거야.

토할 필요까지야……. 하지만 우진의 말을 들으며 생각해 보면 이원의 태도는 그저 친구라기에는 지나쳤다. 거의 결혼한 부부처럼 굴고 있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하니 머리가 점점 더 아파졌다.

─ 그리고 지호 너도 이원이 꽤 좋아했잖아.

“나? 내가?”

─ 아냐?

“난… 아니야.”

입으로는 부정했지만 사진 속에서 본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둘 다 서로 좋아해야만 나올 수 있는 사진들이었지.

─ 근데 지호야. 이런 거 왜 나한테 물어봐?

잠시 말이 없던 우진이 나지막이 물어 지호는 뒤늦게 정신 차렸다.

“어……. 미안, 곤란한 질문이었지.”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혹시 싶어서.

“응?”

─ 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지?

지호는 숨을 삼켰다.

우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줄은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본인이 티 내지 않고 숨기려는 것 같아서 지호 또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다른 친구 중 우진에게 전화를 건 것도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제 과거를 기억하는 남은 친구 중에 동성을 좋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니까.

“……미안.”

─ 아니, 아니야. 미안해하지는 마. 나 지금 애인 있으니까 사과받으면 더 이상해진다고.

“어, 아. 그렇구나…….”

─ 응. 지금 사귀는 사람은 남자야. 네 덕에 알았지. 네가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으, 응……. 축하해.”

지호의 어색한 인사에 우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그냥 빨리 둘이 만나. 괜히 주변 속 태우게 하지 말고. 네가 입버릇처럼 학생은 공부를 해야지, 하길래 고3 끝나면 사귀려나 싶었는데 아직 안 사귈 줄이야.

“……대학생도 학생이지. 나 아직 졸업 안 했어.”

─ 야, 연애를 뭔 대학 때까지 참아. 그리고 네가 학생이야? 길드장이면 그냥 사회인이지. 빨리 사귀라고. 너도 주이원 좋아하잖아?

우진은 지호가 이원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마디를 더 이어가다가 나가봐야 한다는 우진의 말에 통화를 끝냈다.

지호는 비틀거리며 단말기를 저 멀리 밀어 두고 몸을 웅크렸다.

“미치겠네…….”

머리가 욱신욱신 쑤신다. 마치 더 알 필요 없다고 경고하듯이. 하지만 지호는 불분명한 것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머리와 가슴이 모두 ‘주이원과는 친구다’라고 말하지만, 주변의 이야기는 정반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역시, 지호는 이원을 친구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빠가 아빠고, 엄마가 엄마고, 누나가 누나고, 형이 형인 것처럼. 주이원은 그냥 주이원인데.

연애는 무슨 연애인가.

‘내가 주이원을?’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주이원이 나를?’

정말, 정말 말도 안 된다.

하지만 호진의 말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알아보면 알아보려고 할수록, 지호의 이 감정이 해롭다는 듯이 통증과 어지럼증이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으니까.

지호는 새하얘진 얼굴로 바르작거렸다. 분명 누워 있는데도 몹시 어지러워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정신이 통 안에 갇힌 매끄러운 공이라도 된 양 계속해서 흔들린다.

S급 헌터가 된 신지호가 단순한 일로 몸의 이상을 느낄 리 없다. 역시 머릿속에 봉인 따위의 장치가 되어 있다고 밖에는…….

지호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붙잡으며 주이원에 관해 생각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원을 처음 만난 건 다섯 살 때였다.

주이원의 부모님은 심하게 다친 상태의 이원을 우연히 길에서 발견했다. 며칠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원은 자신의 과거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학대를 받다가 버려진 게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한동안 이원을 보살피던 부부는 친부모를 찾아 주는 대신, 자식이 생기지 않은 자신들의 아이로 이원을 입양하기로 했다.

이원의 아버지는 청람에서 오래 일해 온, 지호의 아버지와는 사적인 자리에서 볼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그렇게 부모님의 연으로 지호는 이원과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이원은 지금과 정반대였다. 그때는 이원이 입을 꾹 다물고 지호를 무시했고, 지호가 이원을 졸졸 쫓아다녔으니까.

어릴 때는 지호가 아닌 이원이 몸이 약했다. 깡마른 아이가 점점 건강해질수록 반대로 지호는 아픈 일이 잦아졌다.

그때는 단순히 이원이 좋은 환경에서 잘 먹어서 건강해졌고, 지호는 단순히 원인불명의 병이 생긴 거라고 여겼는데.

‘아직 증거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기가 너무 절묘하게 겹친다. 특히 지호의 병이 심해진 게… 이원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일곱 살 무렵, 두 사람이 한집에 살게 된 이후부터였으니까.

그리고 이후에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다가 결국 대학까지 같은 곳으로 가게 됐다. 시간표도 맞춰서 거의 함께 다녔다.

그렇게 붙어 다녔던 게 서로 좋아했기 때문이고, 그 탓에 지호가 아팠고 각성했을 때의 등급도 낮았던 거라고?

근거는 없지만 일단 앞뒤는 맞았다. 그래서 헛소리를 헛소리로 치부하지 않은 채 망상이 이어지는 것 아닌가.

이원이 제게 해를 끼친다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생각은 풍랑을 맞이한 배에 오른 것처럼 지호의 속을 뒤집었다. 차라리 생각을 멈추고 싶은데 제 의지로 멈춰지지도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주이원에 관한 것만 가득 차서…….

그때,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다.

이 집에서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하나뿐이다.

“자기야! 여기 있었…….”

“우욱…….”

평소 듣던 것과 비슷한 이원의 목소리인데 듣자마자 속이 뒤집혔다. 조금 역겨워서, 순간 떠올린 제 생각이 끔찍해서, 더더욱.

차마 화장실까지 갈 여유도 없이 지호는 바닥에 토했다. 나오는 건 위액뿐이지만 게워 내고 나니 조금은 속이 가라앉았다.

“…….”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문 앞에 멀거니 선 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주이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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