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산하고 갑니다(3)
길드의 운영은 주로 신지혜가 맡는다지만, 확실히 주이원도 청람의 길드장이었다. 지혜를 대신해도 좋을 만큼 능수능란한 이원의 협상 끝에 지호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밤의 연금술사와 거래를 마칠 수 있었다.
지호는 홀가분하게 나오며 이원에게 활짝 웃었다.
“오늘 고마웠어.”
“뭘, 이 정도야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지.”
“많이 배운 것 같기도 하고.”
매번 제 앞에 가는 얄미운 녀석이지만 확실히 배울 점은 많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 몰라서 배우는 걸 자존심 상해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지호는 아니었다. 배울 만큼 배워서 나중에 앞지르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오히려 적극적이다.
물론 주이원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앞장설 수 있을지 가끔 의문이 들지만 말이다.
거래가 완벽하게 성사된 덕분에 대놓고 기분 좋은 지호를 이원이 뒤에서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분명 몸에 닿는 건 익숙한 손길이었고 코끝을 스치는 건 익숙한 향기였다. 그러나 지호의 몸은 여느 때와 달리 긴장으로 확 굳어 버렸다.
그런 지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이원은 낮게 웃으며 지호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지호의 손보다 굵고 단단한 손가락이 얇은 셔츠 아래 피부를 더듬듯 문지른다.
“자기야.”
“왜, 왜?”
“내가 더 좋은 거 가르쳐 줄 수 있는데.”
지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녀석이 말하는 게 순수한 의미가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지호의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도.
“주, 주이원…….”
지호는 이원의 팔을 붙든 채 안절부절못했다. 이걸 뿌리쳐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이원의 품에 그저 기대고 싶어져서…….
“지호야.”
“…….”
“가르쳐 줄까? 좋은 거.”
이원이 속삭일 때마다 따뜻한 숨이 귀를 간질여서 참기 힘들었다. 그리 높은 온도도 아닐 텐데 지호의 귀는 댈 듯이 뜨거워졌다.
어쩐지 어질어질한 기분이다. 휘청거리는 지호를 붙잡으며 이원은 더욱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에 입 맞췄다.
“자기도 좋아하던 건데……. 가르쳐 줄게, 응?”
“돼, 됐거든?”
“정말? 필요 없어? 그럼…….”
조금씩 낮아지는 이원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느껴져서 지호는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주이원이 스킬이라도 쓴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의 목소리에 이렇게 홀리듯 빠지는 게 가능한가. 아마 불가능할 거다.
그렇게 이원의 손이 막 지호의 옆구리로 파고들려던 절체절명의 순간…….
이원의 단말기가 몹시 요란하게 울렸다.
“…….”
이원은 평소 단말기의 소리를 꺼 둔다. 하지만 헌터 협회에서 반드시 주이원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안이 있을 때의 비상 연락은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소리가 났다.
즉, 비상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데. 반쯤 홀려 있던 지호를 정신 차리게 하기엔 충분한 자극이었다. 빨리 받지 않고 뭐하냐는 재촉에 이원은 어쩔 수 없이 단말기를 신경질적으로 받았다.
지호는 단말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군산에서 S급 게이트가 갑자기 발생해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는 심각한 소식에 지호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힐끗 지호를 돌아본 이원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위치를 말했다. 그러자 몇 초 지나지 않아 황혜림이 공간을 열고 나타났다.
“바로 엽니다.”
혜림은 지호나 이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곧장 이동을 준비했다. 이원과 마찬가지로 급히 소집됐는지, 혜림은 집에서 편하게 있다가 급하게 나왔는지 짧은 잠옷에 긴 상의 하나만 걸친 차림이었다.
혜림이 스킬을 쓰는 잠깐 동안 이원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지호에게 인사했다.
“후……. 지호야, 이따 봐.”
“나도 갈까?”
“아니, 그냥 있어……. 또 이런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르잖아? S급이 세 명이나 가는 건 낭비야.”
그냥 있으라고만 말하려다가 지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본 이원이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비상사태가 발생한다면 지호는 이곳에 대기하는 게 나았다.
“알았어.”
“이따 봐, 자기야.”
“조심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에게 인사하고 혜림이 연 [단거리 전이] 포탈로 들어섰다.
“나중에 봐요.”
혜림도 급하게 포탈 안으로 사라지고 지호는 혼자 남았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급히 갔으니 큰일은 없을 거다. 그렇게 걱정할 건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허하다.
“…….”
이제 뭘 해야 할까. 당연히 함께 놀러 다닐 생각이었는데 훌쩍 가 버려서 혼자 남았다.
애매하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안 좋을 필요 없지 않나? 지호는 새로 통장에 찍힌 거액의 골드를 생각했다. 생각만큼 기분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조금은 나아졌다.
쇼핑이라도 할까. 아니면 순찰 겸 시내나 돌아볼까. 어차피 시간도 남아도니 일단 잠시 생각해 볼 요량으로 지호는 발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건 잠시뿐이었다.
5분이나 걸었을까. 느긋하던 지호의 감각이 바짝 곤두섰다.
평온한 지구에 끼어드는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
“미쳤나?”
군산에서 예측되지 않은 S급 게이트가 발생했는데, 서울에서도 예측되지 않은 균열이 발생한다고?
이변을 느꼈을 때는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호는 던전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을 느끼며 착지의 충격에 대비했다.
그때, 누군가가 지호를 꽉 붙잡아 끌어안았다.
‘누구…….’
물을 새도 없이 시야가 점멸한다. 강력한 마력의 흐름에 휩쓸려 지호의 몸은 게이트를 넘어 이계로 떨어졌다.
“으…….”
이동의 후유증으로 잠깐 어지러운 머리를 붙들고 지호는 눈을 떴다.
낙하 시의 충격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니, 누군가가 지호를 안아 들고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평온하게 서 있었다.
사실 평온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다. 도시에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 던전에 서 있는 게 어울리는 인상의 남자는 바로 델타의 부길드장이었다.
“……조승택 헌터.”
“신 헌터는 일에 잘 휘말리는군.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게다가 은근슬쩍 메시지에서부터 말을 놓더니, 대면해서도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다. 물론 지호는 마흔 넘은 아저씨에게 굳이 존댓말을 쓰라고 할 생각은 없었기에 얌전히 수긍했다.
“네, 조심할게요.”
얌전히 대꾸하고 지호는 조승택의 품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던전의 마력이 느껴진다. 주변은 건축물의 형태가 지구와 다를 뿐 누가 봐도 마을 같은 분위기였다.
‘여기도 예전에 누군가가 살았던 세계겠지.’
이전처럼 던전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가 없다. 지호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일에 휘말린 사람들이 함께 쓰러져 있었다.
“셋…….”
“적군.”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는 지호에게 승택이 대꾸했다. 하긴, 사람을 갑자기 빨아들이는 채집형 던전은 헌터 한 명 없이 수십 명이 끌려 들어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꽤 많다.
하지만 지금은 S급 헌터 둘과 일반인 세 명이 들어왔으니, 일반인의 안전에만 유의한다면 사고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같이 온 사람이 조승택이니까.
지호는 힐끗 승택의 시스템창을 열어 확인했다.
status
이름 | 조승택 |
직업 | 델타의 부길드장 |
등급 | S |
칭호 | 암약하는 자 |
체력 | 2804 |
마력 | 3388 |
근력 | 1589 |
민첩 | 1005 |
스킬 | 초회복(SS), 독의 숨결(S), 백발백중(S), 지옥의 화염(S), 피의 저주(S), 마법 반사(A), 아냐의 마법식(A), 통제하는 자(A), 리더의 자질(A), 경고(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