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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억(3) (128/283)

15. 기억(3)

“무슨… 난 주이원을 잊어버린 적 없는데요.”

당황한 지호가 항변하자, 크사냑이 진정하라는 듯 손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잊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수많은 차원 중에 하나를 좌표로 잡을 만큼의 생각이란 건 단순히 친구를 떠올리는 수준으로는 부족했습니다.”

“…….”

“게다가 이원 님께서 지구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대로 이동하려고 했던 것도 꽤… 패착이었습니다.”

주이원은 자신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최대한 가까운 시간대로 이동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관리자인 신지호를 최대한 도와줄 수 있는 데다가… 수십 년이 흐른 시점에서는 신지호가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 가능성까지 생각했으니까.

“지호 님께서는 친구로서도 이원 님을 각별하게 여기십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아예 의식이 없으실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던 거죠.”

의식이 없는 지호가 이원을 떠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이원의 마법은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계속 실패했다.

“그럼, 내가… 그 녀석을 홀라당 까먹은 줄 알았겠네요.”

“그렇습니다.”

“화가… 많이 났겠네요.”

대답대신 크사냑은 미소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부분은 이 어린 관리자에게 들려주기는 조금 곤란한 부분이라.

당시의 주이원은 신지호가 자신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슬퍼했고, 분노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신지호를 죽여 버리고 자신도 죽겠다며 날뛰었다.

주변에서는 이대로 포기하기만을 바랐건만, 이후 왕은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오래전 신지호가 건네준 덕에 자신이 품고 있는 지구에서 비롯된 마력. 그 마력과 일치하는 마력의 미약한 신호를 잡아 좌표를 특정했다.

수십 년이 걸리는 과정이었다. 고루한 시간 동안 왕은 매 순간 자신을 잊어버린 신지호에 대한 살의를 갈고 닦았다.

처음에는 이원이 지구에 귀환하면 작별 인사를 하며 보내 주려 했던 크사냑이 이원과 함께 지구행을 결정한 건 그 때문이었다.

천 년 넘게 이어진 주이원의 사랑이 한순간의 증오나 분노로 잿더미가 된다면, 그나마 인간성을 지키고 있는 제 왕은 정말 괴물이 되어 버릴 것 아닌가.

당시에는 왕을 따른다고 했지만 사실 딴생각을 품고 있었을 세테르나, 왕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루, 이플리스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탐사하고 싶다던 레일레이 등 꽤 많은 사람이 왕을 따라 지구에 건너왔다.

그리고 당장 신지호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벼르던 왕은…….

정작 신지호를 보자마자 무너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왕은 늘 이플리스의 심해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어둡고 위험한 자였으니까. 하지만 신지호 앞의 주이원은 그저 상대에 의해 속절없이 흔들리는 바다 위의 부표에 불과했다.

주이원은 차마 자신이 했던 난폭한 생각조차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신지호의 깡마른 손을 잡고 벌벌 떨며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신지호의 곁에 있다가, 하루 정도 틀어박혀 있던 왕은 곧장 지구의 헌터로 나서기 시작했다.

지구를, 정확히는 지구의 관리자인 신지호를 돕기 위해서였다.

비장한 각오와 달리 그리 어렵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플리스는 균열이라는 재앙을 극복한 세계 중에서도 최상위급에 속하는 세계였으니까.

이플리스에서는 다른 차원에서 특별한 존재인 S급은 흔해 빠졌고, SSS급 던전조차 좋은 에너지원일 뿐이다.

이미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알고 있고, 이번처럼 특정 차원을 지정해 떠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무작위의 차원 여행은 종종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한 세상.

그곳에서도 가장 강한 왕이었던 주이원에게 막 균열이 발생한 지구의 균열은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기보다 쉬웠다.

먼저 왕을 따라온 레일레이 애샤가 시스템을 대체할 아이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왕은 세계 각지의 위험한 던전을 공략하고, 공략법을 만들고 아이템을 나눠 이 세계의 각성자들이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대던전, 본래라면 인류의 절반 이상이 죽을 만한 그 재앙을 산책이라도 다녀오듯 가볍게 공략했다.

사실 혼자서도 충분히 깰 수 있었을 테지만 만약을 위해 동행한 곳에서… 크사냑은 원래 세계보다 약해졌는데도 압도적인 왕의 힘을 목도하고 전율이 일었다.

‘우리의 가장 완벽한 왕이… 이런 곳에 와 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왕이 대던전을 휩쓰는 광경을 보며 세테르가 한탄하듯 한 말이 반역의 씨앗이지 않았나 싶지만…….

주이원이 한 건 단순히 지구를 위한 행위만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지구를 떠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그는 대중에게 자신의 모습을 강렬하게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원래 이플리스에서는 어지간한 행사는 귀찮다며 죄다 대리를 보내던 왕이, 신지호가 기억하지 못해도 수많은 사람의 기억을 기반으로 자신이 돌아올 수 있도록 존재를 아로새겼다.

그 위엄 넘치던 왕이 광고를 찍거나 예능에 출연하거나 팬 사인회까지 나가는 걸 보며 왕을 신처럼 여기던 루 오퀼라스는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지만…….

크사냑은 그런 왕의 모습이 꽤 좋았다.

생각해 보면 왕을 처음 만난 건 그가 꽤 어릴 적임에도, 크사냑은 왕이 제 연령대의 청년처럼 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지금은 청년이라기엔 지구 기준으로 정신연령이 다소 높지만… 어쨌든 즐거우면 된 거 아닌가.

겸사겸사 크사냑은 지구에서의 왕의 재산을 불리는 걸 도왔다. 수백 년간 이플리스의 경제를 책임지며 인정받다가 마지막에는 왕의 재상에까지 올랐던 인재인 만큼, 경제적인 흐름을 읽는 데는 자신 있었다.

게다가 이 세상은 막 균열이 발생한 세상이다. 앞으로 어떤 산업이 흥할지는 다른 세계의 전례가 있어서 알 수 있었다.

그 세계의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며 델타를 세워 각종 아이템을 개발한 것까지, 그들은 손쉽게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니, 이 외계인들이 다 해 먹었네.”

맞아, 이 도둑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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