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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Intermission(4) (152/283)

20. Intermission(4)

모처럼 부모님 댁에 들러 하룻밤을 자고, 아침 식사까지 거하게 마치고 나오는 길.

여느 때라면 곧장 길드로 향했겠지만, 오늘은 이원과 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데이트네?”

……라고 멋대로 확정지으며 들뜬 이원에게 한 소리 하긴 했지만, 지호도 신난 건 마찬가지였다.

그야, 최근 들어 거의 일만 했으니까. 게다가 늘 놀 때도 머리 한구석에서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사소하고 커다란 근심을 모두 가볍게 내려놓기로 했다.

처음, 이원에게 원하는 여행지를 물으니 그는 무턱대고 해외를 꼽았다. 하루만에 거기까지는 어떻게 다녀오냐고 물었더니, 혜림을 시키면 된단다.

지호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 부리는 데 익숙한 성격이 되었는지… 아마 저 세계에서 익숙해진 거겠지만.

“둘이 있는데 굳이 남을 끼워?”

지호의 한마디에 이원은 얌전히 목적지를 국내로 돌렸다. 그리고 지호가 선택한 곳은 바로, 놀이공원이었다.

지호는 어릴 적 놀이공원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워낙 약한 몸 탓에 늘 주의가 필요했으니, 격렬한 놀이기구를 타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몸이 괜찮아지고는 바빠서 간 적이 없다. 게다가 각성자의 발달한 육체로는 놀이기구가 큰 감흥을 주지 못하니, 딱히 선호되는 목적지는 아니었고.

하지만 한 번쯤은 이원과 하지 못했던 일을 해 보고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원은 이내 고개를 시원스레 끄덕였다. 지호가 어떤 마음에서 가자고 하는지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님의 집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놀이공원이 있는 역에 도착했다. 인파를 뚫으며 이원은 맥없이 중얼거렸다.

“지하철을 탄 건 오랜만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이원은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진짜로 지쳤을 리는 없었다. 지호가 투정하는 이원의 손을 잡자 그는 금세 살아났다.

“가자.”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이원과 둘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는데, 당시의 지호에게는 그게 무척 씁쓸했다. 자신이 괜히 이원의 발목을 잡는 것 같아서.

하지만 오늘은 그럴 일이 없었다. 이제 지호는 이원과 뭐든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사람 많은데?”

하지만 들뜬 사람 사이에서 이원은 벌써 질린 얼굴이었다. 단말기를 툭툭 두드리며 그가 음침하게 중얼거린다.

“자기야.”

“응?”

“다 쫓아낼까?”

“……관둬라.”

지호는 주변의 인파를 보며 이원을 말렸다. 하겠다고 하면 정말로 할 녀석이지만, 지호가 말리면 하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였다. 전 세계적으로 균열이 심해지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균열이 더 심해지면 저들의 안전 또한 위협받겠지.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늘은 마음 편히 놀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불길한 가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호는 우울한 생각을 짓누르듯 이원의 손을 꼭 쥐었다.

“주이원.”

“응?”

“우리 매일 둘이서 집에 있잖아. 가끔은 이런 것도 좋지 않아?”

“음, 그러게.”

쉽게 납득한 이원은 얌전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넘어 가준 것도 같지만… 어쨌든 제법 기다려서 두 사람은 놀이공원에 들어갔다.

“지호야, 저기부터.”

이원이 가리킨 곳은 놀이공원의 기념품 상점이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지호를 끌고 간 이원은 동물의 귀가 달린 모자를 지호에게 씌워 주었다.

“귀엽다, 자기.”

“설마 이걸 사겠단 건 아니지?”

“당연히 사서 쓰고 다녀야지.”

뭐 이런 쓸데없는 짓을…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원의 기대하는 눈빛을 보니 못 써 줄 것도 없겠다 싶었다. 대신 지호는 이원의 머리 위에도 비슷한 모자를 하나 얹었다.

“너도 이거 써.”

“커플 같네.”

“…….”

지호가 이원의 머리띠를 거둬 가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원은 잽싸게 자신과 지호의 모자까지 낚아채 계산했다. 지호는 어쩔 수 없이 모자를 썼다.

기념품 상점을 나온 이원이 지호를 돌아보았다.

“지호야, 뭐부터 탈래?”

“롤러코스터?”

“그거 하나도 재미없을걸.”

훨씬 빠른 속도도 아무렇지 않았으니 지호도 알고는 있지만, 그냥 한 번쯤은 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 구는가 싶어서 망설이는데…….

“그래, 타고 싶으면 타자.”

이원이 시원스레 말하며 지호의 손을 잡고 롤러코스터 쪽으로 이끌었다.

기나긴 줄을 본 지호는 자신의 결정을 조금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끝도 없이 서 있었고, 전광판에 보이는 대기시간은 평일이란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길었다.

게다가…….

“다들 쳐다보는 것 같지 않아?”

정체를 다 밝히고 놀이공원에 들어오면 제대로 즐기지 못할 게 뻔하니까. 분명 두 사람을 확실히 인지하기 힘들도록 이원의 마법을 쓰고 들어왔는데, 종종 시선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잘생겨서 그런 거 아냐? 외모를 바꾼 건 아니니까.”

“너 잘났다…….”

“아니, 우리 자기 쳐다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만 갖고 그래? 다들 너무 쳐다봐서 눈을 뽑고 싶다니까.”

지호는 미친 농담을 하는 이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머리띠가 아니라 모자를 산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호가 모자를 푹 눌러 쓰자 이원이 낮게 웃었다.

“조금 가린다고 가려질 얼굴이 아닌데.”

“놀리지 마.”

“놀리는 게 아니고 진심인데… 귀엽기는.”

지호는 닭살 돋는 소리를 하는 이원을 슬그머니 외면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금세 흘러갔다. 어느새 롤러코스터 앞에 선 지호와 이원은 운 좋게 가장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맨 앞자리에 탑승하자 사람의 손길에 닳은 안전바의 쿠션이 눈에 들어왔다. 안전바가 위아래로 몸을 고정시키고, 별생각 없이 옆을 본 지호는 풋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옆자리에는 이원이 불편하게 구겨져 있었다. 190cm가 넘는 데다가 덩치도 큰 이원에게는 자리가 작았다.

“나 귀여워?”

그렇게 묻는 이원 때문에 금세 다시 정색할 수밖에 없었지만… 솔직히 좀 귀엽긴 했다.

지호는 정면을 주시했다. 롤러코스터가 출발하며 체인이 쩔걱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설렜다. 뒤에서 “올라간다!”라며, 반쯤은 설레고 반쯤은 무서워하는 소리가 들뜬 지호의 마음을 더 위로 올려 주었다.

높이 올라갔다가 아래로 떨어지고, 다시 올라갔다가 꺾이고, 몇 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을 탔을 뿐인데 순식간에 끝났다.

평온하게 타고 있던 지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지나치게 빠르게 지나간 시간에 조금 당황했다.

“진짜 별거 없네.”

“그렇다니까.”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면 허무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이제는 줄이 짧은 것만 타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타깃을 바꾸자 둘은 꽤 많은 놀이기구를 탈 수 있었다. 놀이기구 자체가 재밌다기보다는 분위기에 취했다. 한창 놀다 보니 아침에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슬슬 배가 고파졌다.

“식사할까?”

“간식만 먹어도 될 것 같은데.”

“골고루 먹어야지.”

엄격하게 타이르면서도 이원은 얌전히 아이스크림과 츄로스를 사다 주었다. 벤치에 앉아 이원이 사다 준 간식을 먹으면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방에서 울리는 커다란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환성, 모두가 즐거운 가운데… 마찬가지로 즐거워 보이는 이원까지.

지호는 이원을 슬쩍 눈짓했다.

“너 사실 재미없지?”

“재밌어. 지호랑 함께 하면 뭐든 좋지.”

“나 없으면 재미없잖아.”

집요한 질문에 이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이런 건 애들 장난 같아서…….”

“하긴, 너 늙었지?”

지호가 가볍게 던진 말에 이원이 발끈했다.

“난 스물네 살이야. 만으로 스물셋. 이제 너랑 동갑.”

“너무 편하게 계산하는 거 아냐?”

“주민등록상으로 그런걸.”

“참나.”

완전히 억지였지만 억지면 또 어떤가. 지호는 피식 웃으며 이원의 말을 받아들여 주었다.

간식을 이것저것 주워 먹으며 놀이기구를 몇 개 타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이제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만큼 해 또한 짧아져, 순식간에 밤이 찾아왔다.

물론 놀이공원이 어두워지는 일은 없었다. 어둠을 몰아내겠다는 듯이 곳곳에 장식된 전구가 일제히 불을 밝히자, 놀이공원은 낮과 다른 풍경을 만들어 냈다.

“지호야, 이제 저거 타자.”

이원이 가리킨 건 커다란 대관람차였다. 별생각 없이 대관람차로 향하던 지호가 이원을 흘겨보았다.

“야, 왜 사람이 없냐?”

“오늘 하루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잖아. 이거 하나 정도는 봐줘.”

“…….”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었다. 결국 지호는 얌전히 이원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이 하나 없이 텅 빈 대관람차에 올라갔다. 두 사람만을 실은 대관람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예쁘긴 하네.”

고도가 높아지자 지금까지 놀던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퍽 아름다웠다.

“자기야.”

“응?”

아래를 구경하던 지호는 진지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원이 지호를 보며 조금 걱정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안 하던 짓을 하잖아.”

심각한 얼굴을 보며 지호는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이게 왜 안 하던 짓이야. 예전엔 많이 놀러 다녔잖아.”

“기억, 나?”

“어느 정도 기억은 난다니까……. 그냥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가 희미할 뿐이지.”

“음, 그랬지.”

“그래도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정신없는 장소에 와서 이원과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며,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즐기기만 했다. 아마 다른 사람과 왔으면 이렇게 즐기는 건 힘들었을 거다.

언제나 제 옆에 있어 준 이원이었기에 가능한 시간이었다.

“같이 와 줘서 고마워.”

지호가 이원을 향해 활짝 웃었다. 때마침 터진 커다란 불꽃이 지호의 얼굴 위로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원이 아주 오랫동안 그리워한 얼굴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다웠다.

* * *

집으로 돌아온 지호는 씻고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급한 일은 대충 처리해 두었고, 가족들과도 인사했고, 이원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

아는데도 손이 잘게 떨렸다. 망설임이 마음 한 구석에서 지호를 자꾸만 말렸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

이제는 정말로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니까.

[안정화]

짧은 주문과 함께 한때 꺼졌던 스킬이 다시 발동하기 시작했다.

던전 안에 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안정화]가 주는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호가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균열이 빠르게 수복되기 시작했다.

이 별의 마력이 조금씩 안정화되며 이계의 균열을 막아 낼 만 한 힘이 생긴다. 빠르게 발생하던 균열이 조금씩 아무는 것이 느껴졌다.

“윽…….”

그와 반대로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이 지호를 덮쳤다. 지금까지 지구로 침입하던 균열의 충격이 모조리 지호에게 몰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숨이 막혔고, 숨을 쉬고 싶었으나, 동시에 숨을 쉬면 폐가 찢어질 만큼 아파 숨을 멈추고 싶었다. 그대로 지호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막으려다 기침을 뱉은 순간, 입에서도 피가 한 움큼 쏟아졌다.

“아, 으…….”

이성을 완전히 앗아갈 만큼 지독한 고통 속에서 떠오르는 건, 지하철역에서 본 제 얼굴이었다. 광고판에 대문짝만하게 인쇄되어 걸려 있던 제 얼굴과 많은 사람이 마음을 담았을 문구.

〈지호야, 생일 축하해.〉

사실, 오늘은 신지호의 생일이었다.

그가 지구를 위해 태어난 날. 그러니 책임지기에 가장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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